포스트 코로나: 만약 지구가 하나의 거대 고등생명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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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이후의 삶이 어떻게 달라질 지 또는 달라져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들이 활발해지고 있다. ‘달라질 지’와 ‘달라져야 할 지’에 대한 구분은 아주 중요한데도, 대부분의 논객들은 양자를 별 구분 없이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아마도 도덕선생님 같은 이야기를 해봐야 잘 안먹히는 세태라는 판단을 하고 있기 때문일까? 정말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보다는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에 대한 상황인식에 더 예민해졌다. 절대적 기준을 애써 찾으려 하지 않고 상대적으로 용인된다면 나쁘지 않다는 판단을 하는 것이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어우러져 사는 세상이니 어차피 절대적 기준이란 없는 것이지만, 그런 고민을 해보는 것은 발전속도나 발전방향에 대한 균형감각을 주기 때문에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마치 미적분을 공부할 때, 전혀 사용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다다를 수조차 없는 숫자인 무한대에 대한 개념이 꼭 필요한 것처럼 말이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가게나 사업체를 운영하는 분들 중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본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코로나로 사망한 분들도 다수 있을 것이지만, 다른 질병이 있었는데 적기에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들까지 피해자는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다양할 것인데도, 여기에서는 약간 ‘스톡홀롬 현상’적인 관점에서 코로나를 살펴보려고 한다. 죄없이 인질에 되었다고 하여도, 그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오히려 인질범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게 된다는 심리적 현상 말이다. 즉 우리 삶을 엄청 망가지게 한 것이 코로나 사태지만, 현상황에서 코로나가 꼭 필요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억지로 찾아보려 한다는 이야기다.
지구가 의식을 가진 하나의 고등생명체라면, 이번 코로나는 자신이 살기위해서 선택한 고육지책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수많은 매연을 내뿜고 달리는 자동차들, 주차공간이 모자라 주택가 골목이 전부 자동차로 뒤섞이게 되었고, 명절때나 주말 퇴근시간만 되어도 쌩쌩 달려야 할 차들이 도로에 정차해 있는 것처럼 심각해진 교통체증이 대다수의 나라에서 일상이 되었다. 현재 세계의 연당 자동차 생산대수는 약 1억대에 이른다. 한국은 2.2명당 차가 한대씩 있다고 하며, 미국은 거의 인구 1명당 자동차가 한대씩 돌아간다. “응애!”하는 소리를 지르며 태어나는 신생아에게, “아기야, 너는 위대한 땅 미국에서 태어났기에 벌써 너에게도 배당된 차가 한 대 있으니 울지 말어라!”라고 산파가 아기에게 말을 걸 수도 있을 것같다. 재미있게도 자동차 관련 통계를 찾아보는 와중에 마주친 뉴스들은 한국의 자동차 생산대수가 세계 6위 또는 7위라며 더욱 분발해야 한다는 논지의 기사들을 다량 쏟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심한 미세먼지 사태를 겪는 와중에 나온 기사들이어서 참 아이러니였다. 한국은 반도체 강국인데, 알다시피 반도체의 주요공정은 독극물로 재료를 녹여내며 전자회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 많은 독극물은 다 어디로 가는 것일까? 고가의 장비를 사용하여 정말 꼼꼼하게 재처리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반도체 공장의 사고와 암환자 소식에 대한 메아리는 우리 주변을 돌고 있다. 정말 안전한 것일까, 아니면 공정 대신 그들의 입을 안전하게 틀어막고 있는 것일까? 그런데 반전은 아주 쉽게 찾아온다. 그렇게 환경이 걱정스러우면 당장 전기도 없고 차도 없는 산속에서 농사나 지으며 살 것이지, 누릴 것 다 누리는 현대생활을 하면서 혼자 고상한 척 하냐는 공격을 받으면 모두 조용해진다. 우리는 이미 현대문명에 중독된 생활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코로나 처방’ 같은 극단적 지구의 선택이 없이는 환경을 되살릴 길이 없었을 것이다. 버스로 30분 이상 걸리는 학원을 하루라도 빼먹거나, 자동차로 한시간 넘게 걸리는 회사를 지각이라도 하면 낙오자가 되는 줄 알고 살았다. 아침 일찍 나서서 저녁 늦게 파김치가 되어 돌아오는 생활만이 우리를 구원해주리라고 평생 믿으며 열심히 살아왔는데 어떻게 갑자기 지구온난화 문제나 미세먼지 같은 ‘멀고도 사소한 문제’로 모두가 믿는 성공을 향한 일상을 멈출 수 있었겠는가? 코로나가 아니면 그 누구도 예전같이 맑고 구름이 피어오르는 하늘을 우리에게 다시 돌려줄 수 있는 정치가나 기업가 그리고 학자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것이 우리의 탓도 다소 있지만, 결국은 이웃나라 탓이라는 정치적 프레임을 만들어서 그곳으로 대중들의 손가락이 향하게 하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조금 먹고살만해지면 사람들은 이제 인기있는 사람,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모으고 화려한 언변과 연예인 기질로 볼거리를 제공하며 사람들의 잉여시간과 잉여재산을 자기 이익으로 거두어들였다. 발달해진 사회에 살수록 삶의 변수가 많아져 불안감이 더 늘어만 가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한 종교집단들, 돈은 있는데 놀거리가 없어 따분해진 사람들을 모아서 더 화려하고 자극적인 대형행사 기획자들, 남는 에너지가 쓸 데 없어 굳이 자기와 관계없는데도 자기 편을 정하고 적군 편을 정해 고래고래 고함지르게 하는 스포츠 행사들이 우리시대의 최대 권력자들이요 이벤트다. 종교적 가르침은 개인적 명상과 깨닮음 그리고 삶속에서의 실천을 통하여 이루어가는 것인데도, 용하다는 무당 찾아다니듯 인기 설교자들을 찾아다녔다. 문화를 아는 세계인이란 역사를 통해 각 나라의 문화차이를 이해하고 독서를 즐기며 일상에서 고상한 삶의 방식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하지만 유명하다는 연주자들의 연주회를 찾아다니며, 유럽이나 북미는 기본이고 히말라야나 인도 오지까지 다녀와야 문화인이고 세계시민이라는 생색도 공식처럼 자연스럽게 굳어져가고 있었다. 코로나 사태 직전까지는 말이다. 점점 오버가 지나쳐가는 이런 생활방식을 과연 누가 있어 되돌아보게 할 수 있었을까? 코로나라는 도구 밖에는 없었을 것이고,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우리의 고귀한 생명체 지구는 눈물을 삼키며 이런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여전히 대답하지 못한 질문이 있다. 지구를 지속가능하지 못하게 변질시키려는 인간들의 행위에 경종을 울리려는 지구의 결정에는 어쩔 수 없이 동의하지만, 이번 사태로 가장 큰 피해와 죽음을 맞이해야 했던 사람들은 가장 중요한 피의자 순서가 아니라는 부분이다. 전쟁이 나면 정작 군인들보다 아이들과 여성들이 더 많은 피해를 입는 것처럼 고래들 간의 싸움이나 합의가 아니라, 그곳에 같이 사는 새우들의 등이 터진다는 부분이다. 이부분은 어떻게 생각해봐도 ‘스톡홀롬 현상적 이해’로는 풀 수 없는 의문이다. 다음달까지 이 문제에 대한 생각이 정리된다면 한 번 더 컬럼을 써볼 작정이다.
코로나로 대기가 좋아진 현상도 참 아이러니한 현상이긴 합니다. 코로나와 같은 재난이 경제적 약자들에게 더 견디기 힘든 재난이라는 것도 안타깝구요... 아뭏든 님의 다음 컬럼이 기대됩니다.
지구가 거대 생명체이며 코로나는 스스로의 자구책이었다는 시선이 그럴법 하네요.^^ 지구 역사의 거대 흐름속에서 약자들이 희생된 사례들이 많이 있었지요. 큰 틀에서 본다면, 현재의 지구에서 오래 살아남는게 과연 좋은 걸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매번 좋은 글 잘보고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으로 제 블로그에 몇편의 글을 올린적이 있습니다.
https://m.blog.naver.com/lgicman/140027476665
https://m.blog.naver.com/lgicman/220614482525
https://m.blog.naver.com/lgicman/221850510561
코로나가 핵심 악인들만 심판해 준다면 정의라고 할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https://m.blog.naver.com/lgicman/221960986581
지구를 거대한 생명체로 보는 시각에 공감합니다. 인류가 지구환경을 보존할 수 있으려면 과열되고 있는 경제 전쟁과 과학기술 경쟁을 당면한 환경보존문제로 조절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와 정치라는 넘 어려운 장벽이 있지만 코로나, 지구 온란화 등의 문제로 인류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려는 시도가 곧 있겠지요...
'달라져야 하는 것'에 대해서 더 생각해보게 되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