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은 전쟁만큼이나 야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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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예체능계 폭력문제가 자주 불거졌다. 고질적인 문제가 국회나 정부가 아닌 피해자들에 의해 공론화되었다는 것이 아쉽지만, 한 번 짚고넘어가게 되어 다행이다. 필자가 학교다니던 시절에도 폭력은 일상이었다. 학생들간의 폭행시건은 물론이요, 수업시간에 공개적으로 행해지는 교사들의 폭력도 흔했다. 필자에게도 트라우마로 남을만큼은 아니지만,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 몇 컷이 기억속에 남아있다.
정말 이해되지 않는 부분은, 폭행죄로 재판을 받을 경우 피해자와 합의되면 형량이 낮아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가해자가 구속되어 있는 동안 그 가족들은 피해자 가족들을 찾아다니며 읍소하거나 심하면 협박까지 한다. 결코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피하려 숨바꼭질해야 하는 피해자 가족들은 이중고에 시달린다. 형사재판은 원고가 개인이 아니고 국가이다보니 검사가 악착같이 항소하는 경우가 많지 않으며, 전관예우 변호사를 선임하여 형량을 줄일 여지도 많다. 폭력사건 재판에서 전국민을 분노하게 만드는 부분은, 술에 의한 심신미약상태와 합의 여부 그리고 반성하고 있다는 것이 감형이유가 된다는 사실이다. “초범이라는 점을 고려하여…” 라는 감형이유는 그런대로 설득력이 있지만, 술에 의한 심신미약상태는 감형이 아니라 오히려 가중처벌이 마땅하다. 실제로 프랑스법은 가중처벌한다고 한다. 영미법은 심신미약상태를 감형이유를 받아들이지 않지만, 유독 일본과 한국만 술이 감형의 이유가 된다고 TV의 한 프로그램이 설명해주었다. 심신미약상태가 감형의 이유가 된다면, 음주운전자가 일으킨 교통사고는 일반 부주의 운전자 사고보다 형량이 가벼워야 논리에 맞다.
필자가 외국에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 경험에 의하면 서양사회에서도 과거에 폭력이 심했지만, 부단한 노력으로 상당히 줄일 수 있었던 것같다. 예를 들면 화장실 갔다가 돌아오기도 바쁜 5분간만 휴식시간을 주는 것을 보았다. 필자가 학교 다닐 때 휴식시간은 10분이었는데, 선생님이 입실하기까지는 15분 정도다. 교실 내 많은 폭력사고는 이 짧은 시간에 발생했다. 점심시간은 상대적으로 길지만, 밥먹는 시간이 모두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덕분인지, 아니면 다른 반 아이들도 많이 복도를 지나다니는 탓인지, 폭력사건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리고 외국에서는 교무실이 따로 없는 학교들이 대부분이라, 교사는 교실 한쪽에 책상을 두고 사무실로 사용하기 때문에 애들만 따로 있을 시간이 많지 않고, 중학교부터는 학생들이 과목별로 교실을 찾아가게 만들어 다른 짓을 할 시간을 줄이는 등의 조치가 기억난다.
한국은 수직구도 유교문화를 기반 위에 서양의 능력위주 자본주의가 얹혀진 구조다. 그래서 지위에 의한 수직구도에 능력별 차이까지 더해졌으니 차별이 이중화된 면이 있다. 위아래를 엄수해야하는 유교문화와 결과를 중시하는 능력주의가 이중나선 형태로 결합된 사회에서 자란 세대는, 약자에 대한 차별과 평범한 시민들을 무시하는 태도를 DNA처럼 물려받을 것이다. 이런 구조에서는 하의상달이 어려워서 최고책임자가 되면 마치 외국에서 금방 입국한 사람처럼이나 실제 상황을 잘 모른다. 그래서 “애들이 구명조끼를 다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구조하기가 어렵습니까?” 와 같은 황당한 질문을 듣게 되는 것이다.
폭력의 원인중 한 축은 인간의 기본권을 중시하지 않는 야만성에 근거하는데, 이것은 유교를 잘못 적용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원래 유교는 체면을 중시하는데, 잘못된 윗분들이 체면보다 자기 이익을 앞세우면 조직에 대한 구성원들의 충성심도 줄어든다. 이런 조직에서는 필요한 성과를 내기 위해 과잉충성자들이 과격한 수단을 사용한다. 구성원들은 결국 수장의 뜻이 반영된 폭력이거나 최소한 묵과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니 소극적으로 저항하여 문제가 만성화된다. 살신성인하는 모습을 보이는 수장은 없고 성과만 내라고 다그치는 스포츠팀 내부에서 발생하는 전형적인 폭력형태다. 두번째는 능력주의 때문이다. 능력이 있다는 오만함 때문에 언어폭력이나 갑질을 하기도 하지만, 능력 없는 사람들이 사회에 대한 반감표출의 수단으로도 폭력은 사용된다. 폭력은 인간문명을 부인하는 행동이며 한국사회에서 하루빨리 축출되어야 할 행위니까 사회전반의 문화를 바꾸는데 좀 더 세심해야 할 것같다. 개그에서는 너무 쉽게 외모를 비하하고, 드라마에서는 걸핏하면 따귀를 올려붙이고, 영화에서는 아예 폭력이 직업인 조폭들 이야기가 대세인 문화에서는 폭력근절은 커녕 은연중에 폭력이 미화될 것이다. 능력은 능력에 따라 대접을 받는 수준에 머물러야지, 인격권에까지 특권이나 차별이 적용되면 안된다.
학교다닐 때 폭력의 야만성에 대해 배운 기억은 거의 없고, ‘사랑의 매’라며 은근히 폭력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는 분위기였으며, 공공연하게 “너희들이 덜 맞았지?!”등의 공포감 조성이 팽배했었다. 좋은 성적을 위해서는 ‘빳다’가 필요하고 분위기를 잡으려면 단체기압이 필수였던 악마의 세월이 아직도 진행형이라면 그것은 21세기 휴매니티의 수치다.
교육수준이 높고 영민한 사람들이 모인 과학기술계에서는 아래로 과학고등학교부터 위로는 박사과정까지 이런 반문명적인 폭력은 거의 없겠지만, 우리는 누구보다도 능력위주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어 사람을 능력별로 판단하려는 습성이 배여있을 수 있다. 과학기술은 연약한 인간이 자연에 순응하며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학문이니, 결국 과학기술 궁극의 목표는 약자를 보호하는 것임을 명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