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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용소군도 굴락, 노릴스크(Norilsk)메 가다

 
 
1965년이던가, 대학 4학년 때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읽었다.
‘오전 다섯 시, 여느 때와 다름없이 기상종이 울렸다.’로 시작하여 시베리아의 수용소에서 춥고 배고프고 힘든 하루의 작업을 끝낸 ‘이반 데니소비치 슈호프’는 막사로 돌아와 담요를 들추고 메트 위에 누워 ‘오늘은 아주 운이 좋은 날이었다.’고 생각한다. 가장 비참한 상황 속에서도 만족해하는 이반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행복 속에 살면서도 늘 불만스러워 하는 우리들에게 말한다. ‘오늘 하루 안에서나마 행복을 찾아보라고...’
1991년 5월 27일 노릴스크(Norilsk) 공항에 도착하니 90년 2월 서울에 와서 ‘극한지 건설 세미나’에 참여했던 동토연구소 이가르카 연구분소 노릴스크 연구실장인 라스테가에프(I. K. Rastegaev)박사가 마중 나와 있었다.
 
 
호텔 ‘노릴스크’에 짐을 풀고 이튿날 ‘노릴스크 시위원회 사회,정치센터’에서 열린 ‘지구온난화에 따른 동토지역에서의 기초, 구조물 및 환경문제 국제 세미나(International Seminar, “Foundations, structures and environment in the cryolithic zone under forecasted global climate warming-up and soil temperature increase in the following 30 - 50 years”’라는 긴이름에 세미나에 참석하였다.
 
모두 7개국에서 95명이 참석하였는데 소련 내의 동토전문가는 모두 참석한 것으로 보였다. 서방세계에서는 한국인 두 명을 포함하여 모두 아홉 명이 참석했다. 소련 과학 아카데미의 멜니코프(P. T. Melnikov) 원사(Academician)는 외국에 50매 정도의 초청장을 발송했는데 단 9명만 이를 받아들여 아쉽다고 했다.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버스에서 내다 본 노릴스크는 5월말인데도 눈으로 덮여 황량한 풍광이었고 주변지역 대부분은 수목이 없는 툰드라(tundra)지대였다.
식사는 호텔의 식당에서 4일간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세끼 식사를 했고 식사 때면 버스를 타고 호텔에 돌아와 식사 후 다시 버스로 행사장을 오가는 일을 반복했다. 식사는 우크라이나에서 왔다는 작고 시퍼런 사과 외에는 다른 과일이 없었고 매 끼니마다 순록(reindeer)고기가 나왔다.
노릴스크 시내의 거리는 겨우내 제설하여 길옆에 쌓아두었던 눈이 밤이면 얼었다가 한 낮엔 녹기 시작하여 거리는 융설수로 온통 젖어 있었다. 흙과 한데 섞인 눈은 더럽기 짝이 없었고 길은 진창이었다.
 
산업도시인 노릴스크는 예니세이(Yenisei)강과 타이밀 반도(Taymyr Peninsula) 사이에 위치한 인구 약 175,000 명의 도시다. 북위 69도 22분에 위치한 서시베리아의 최북단 도시이며 북극권(북위 66도 33분) 안에 있다. 영구동토의 연속대에 속하며 북방수림한계선에 접해있어 수목을 거의 볼 수 없었다. 노릴스크는 1935년에 ‘노릴스크 채광-제련시설’이 들어서며 ‘굴락 강제노동 수용소(Gulag labor camp)’중 하나인 ‘노릴락(Norillag)’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초기의 주민은 오로지 강제 노동을 위한 죄수였으며, 죄수의 수는 1950년대초에는 약 7만 명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는 정치범들이 많았고 노역기간이 끝난 죄수들이 그대로 눌러 앉아서 노릴스크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노릴스크는 ‘푸토란 산맥(Putoran Mountains)’아래 지구상에서 가장 큰 니켈 광맥 위에 자리 잡고 있어 채광과 제련이 주산업이다. 닉켈, 구리, 코발트, 백금, 팔라디움 등이 채굴된다. 노릴스크-탈낙(Norilsk-Talnakh)의 닉켈 매장량은 180억톤으로 추정되며 1,200 m 이하에서 채굴되는데 2008년의 닉켈 채굴량은 30만 톤이었다고 한다.
강제노동수용소(Gulag)의 죄수들은 1935년에 노릴스크의 제련공장을 짓기 시작하여 1942년에 닉켈이 최초로 생산되기 시작하였다한다. 노릴스크의 많은 건물들의 스타일은 ‘쎄인트 페쩨르스부르크(Saint Petersburg; 당시에는 레닌그라드)의 건축양식을 연상시키는데 이는 많은 건축가들이 쎄인트 페쩨르스부르크에서 노릴스크로 유배되었고 유배기간을 마친 그들이 이곳에 눌러앉아 도시건설에 가담했기 때문이란다.
 
 
외국인 세미나 참가자들은 나릴스크 북쪽 25 km지점의 탈락(Talnach)시에 소재한 타이미르스키(Taimyrsky) 광산 지하에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은 작업복, 작업헬멧, 머리전등, 방독면 등으로 완전무장한 후 엘레베타를 타고 1,535 m를 내려가 운반차(hauler)를 타고 갱도를 이동하였다. 소련군은 탱크, 장갑차, 트럭 등 장비의 내한성능을 높힌 특수기술을 보유하고 있다고 들었으나 광산에서 사용되는 장비들은 실망스럽게도 대부분 외국제였다. 환기용 압축공기 생산공장은 소련제 장비로 가동되었지만 시추(drilling)장비는 스웨덴제(Atlas Copco사), loader(GHH사)와 hauler(Kawasaki사)는 일본제, 그리고 덴마크제 펌프를 사용하고 있었다. 다만 지하 정비고에 있는 5대의 선반은 소련제였다. 카자흐(Cossack)인 광산 메니져에게 한국인이 이곳에 온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자신은 고향인 코카서스의 게오르기아(Georgia)에서 많은 고려인들과 함께 자랐으나 여기서는 본 일이 없다고 했다. 북빙양 항로를 통해 식품이 들어오고 광석이 실려 나가는데 핀란드제의 쇄빙선 10척이 운항되고 있다고 한다.
 
닉켈 광석은 노릴스크에서 제련되는데 이 제련과정에서 산성비와 ‘스모그(smog)’를 발생시키고 주변 토양을 중금속으로 오염시켰다. 나릴스크 시내에 작고 소박한 기념관이 있어 들렀더니 강제노동수용소 시절의 사진, 스켓치, 그림, 엽서, 편지 등이 있었다. KGB가 운영했고 약 50만 명의 노동자가 이곳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강제수용소는 1953년 스탈린 사망 시까지 계속되었다는데 스탈린 사망 직후 소규모의 폭동이 일어났는데 진압과정에서 300명 정도의 노동자들이 폭격을 받고 사망하였단다. 비야로프(Sergey S. Vyalov)박사가 29일 토론 때 얘기한 것처럼 나릴스크는 지난 50년간 폐쇄된 지역이어서 이번에 이곳을 방문한 외국 인사들은 50년만에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한 것이라 한다. 그는 이곳에서 많은 유형수들이(대부분 무죄였음) 기초공법을 실험하고 도시를 건설하였으며 유형에서 풀려난 후에도 계속 남아 오늘날의 크고 아름다운 도시를 건설하였으니 그들의 삶과 그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인식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라스테가에프 박사의 아버지는 원래 육군 장교였는데 이곳 강제수용소에 보내졌는데 소련 아카데미의 슈밋(Schmidt)원사의 도움을 받아 부인을 이곳으로 불러들일 수 있었고 이곳에서 자신이 태어나게 되었다고 한다. 박사의 부인은 친정인 우크라이나에 가 있다가 체르노빌 (Chernobyl) 원전사고(1986년 4월)시 방사능에 노출되었다가 암에 걸려 현재 이곳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한다.
작년 우리 일행이 야쿠츠크의 동토연구소를 방문했을 때는 군에 입대한 자신의 아들이 아파서 우리를 만나러 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1920년대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수백만 명의 정치범과 죄수들을 수용했던 강제노동수용소인 굴락(Gulag)은 알렉산더 솔제니친(Aleksandr Solzhenitsyn)이 1973년에 ‘수용소 군도(Gulag Archipelago)’를 출판할 때까지 서방세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또 다른 한국인이 언제 다시 이곳을 방문할 수 있을까? 기념관에 비치된 방명록에 나는 한글로 메모를 남겼다. 한국인이라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 한 한국인이 이곳을 다녀갔다고.’(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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