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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ESSAY
베를린에서의 연구원 생활
김주훈 (darcy95)저는 베를린에서 12년째 살고 있는 베테랑 베를리너입니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혈혈단신 독일로 건너 올 때만 해도 빨리 공부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 갈 마음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저를 12년 동안이나 묶어 놓은 베를린이라는 도시의 매력에 대해서 하나 하나 설명해 볼까 합니다. [ 베를린의 전경: 베를린 TV 타워와 베를린 시청사 ] [ 베를린의 전경: 베를린 구 박물관 (Altes Museum)과 베를리너 돔 ] 그 전에, 저에 대한 정보를 조금 풀어 놓자면, 저는 베를린 공대에서 컴퓨터 공학 석사, 박사를 마치고 현재 도이치 텔레콤 연구소에서 차세대 인터넷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김주훈이라고 합니다. 일하는 곳이 기업 연구소인 관계로 학교에서처럼 논문 발표 위주의 연구 보다는 유럽 연합 프로젝트의 멤버로 참여하여 첨단 기술의 발전 과정을 가까이에서 경험하면서 검수된 연구 결과를 내부 프로젝트에 적용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 베를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원의 모습 ] [ 베를린 곳곳에서 볼 수 있는 분장 예술가들 ] 역사적인 이유로 한국과 함께 분단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베를린은 통일 이후 독일의 수도로 정해진 도시입니다. 한국의 수도인 서울보다 큰 면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구는 3백 50만 명 정도로 서울의 3분의 1 밖에 되지 않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베를린 인구의 15% 정도가 외국인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외국인의 비율이 높아 베를린은 독일 내에서도 가장 다양한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최근까지만 해도 중•서유럽 국가의 수도들 중 가장 물가가 낮은 도시로 유명했으며, 그로인해 소득 수준이 낮은 젊은 문화인들에게는 메카와 같은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급속한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과 베를린 신공항 건설의 여파로 인해 날이 갈 수록 집 값이 높아져 가고 있고, 어느새 이 도시는 제가 처음 발을 딛었던 12년 전의 베를린과는 사뭇 다른 모습으로 발전해 가고 있는 중 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로움을 잃지 않으며 풋풋한 젊음의 향기를 내뿜는 베를린의 다양성이 제가 베를린을 좋아하게 된 첫 번째 이유인 것은 분명합니다. [ 물놀이를 하며 여름 날씨를 만끽하는 베를린 시민들 ] 베를린의 기후는 한국만큼이나 사계절이 뚜렷하지만, 겨울은 습하고 여름은 건조하기 때문에 우중충하고 비가 많이 오는 겨울 보다는 나무 그늘 아래만 앉아 있어도 시원해지는 여름이 지내기 훨씬 수월합니다. 서울에 비해 높은 위도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동지 즈음에는 서울보다 2시간 30분 정도 낮의 길이가 짧고, 하지 즈음에는 그 만큼 낮의 길이가 깁니다. 뿐만아니라, 일광시간 절약제도를 시행하고 있어서 한 여름이 되면 밤 10시가 다 되어서야 해가 뉘엿뉘엿 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베를린 시민들 중에는 이 기나긴 일광을 가장 효율적으로 만끽하기 위해 출근 시간을 앞당겨 업무를 진행하고 일찌감치 퇴근하여 호숫가 또는 공원에서 친구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행을 계획하고 있는 분들은 이 정보만 가지고도 일년 중 언제가 베를린을 여행하기 가장 적합한지 짐작 하실 수 있을 것 입니다. 길게 드리워진 나뭇가지를 지붕 삼아 푸르른 잔디에 누워 기나긴 햇빛과 부드러운 바람을 즐길 수 있는 베를린의 여름이야말로 이 도시를 좋아하게 만들 수 밖에 없는 두 번째 이유로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 흔히 볼 수 있는 베를린 회사들의 송년 파티 ] 비교적 젊은 세대에게 인기가 많은 도시인 베를린은 스타트업 회사가 많기로 유명합니다. 2014년 통계에 의하면 베를린에는 대략 500여개의 스타트업 기업들이 있으며, 매년 아주 가파른 추세로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들 중 상당수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 제작을 기반으로 하는 IT 기업이며, 이로 인해 베를린에는 IT 분야의 인력 수요가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처럼 IT 인력의 수요가 많은데 비해 악명 높은 독일 공과 대학들의 학업 강도 때문에 많은 스타트업 회사들이 고급 인력 수급에 허덕이고 있고, 덕분에 능력 있는 해외 개발자들이 베를린에 정착할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유럽의 실리콘 밸리로 급성장하고 있는 베를린의 역동성과 그로 인한 높은 구직 가능성은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세 번째 이유가 될 수 있을 것 입니다. [ 팀 전체가 의기 투합 하여 조기 퇴근하고 축구 보러 가기로 자율적인 결정을 내렸던 지난 겨울 ] 제가 일하고 있는 연구소에는 이렇다 할 만한 상하 관계가 없습니다. 물론 저에게도 일의 진행 상황을 보고 할 수퍼바이저가 있기는 합니다만, 상하 관계로 인식되기 보다는 동료라는 인식이 깊습니다. 수퍼바이저는 제게 일을 맡기는 경우보다, 제가 겪는 문제를 해결해 주는 해결사 역할을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출퇴근 시간부터 단기간 혹은 장기간에 걸쳐 처리해야 할 업무들을 모두 스스로 결정하게 되며, 연구 활동의 결과를 어떤 방식으로 마무리 지을지도 스스로 혹은 같이 프로젝트에 참여한 동료들과 함께 결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자유로운 업무 문화를 생산성으로 이어 나가기 위해서 독일 회사나 연구소들은 일 주일에 한 번 정도 꼼꼼히 꾸며진 안건을 마련하여 서로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와 업무에 관한 주제 토론을 하곤 합니다. 이 과정에서 동료 연구원의 관심을 얻어 진행 중인 프로젝트에 합류 시키는 경우도 있고, 아이디어를 얻어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경우 프로젝트의 범위 설정, 프로젝트의 결과에 관심을 가질 만한 타겟의 선정을 비롯하여 필요한 예산까지 모두 동료들과 결정하여 진행합니다. 이 과정에서 팀의 매니저는 조언자가 되어 줄 뿐, 지시를 하거나 적극적인 참여를 하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런 과하다 싶은 자율성은 박사과정 중에서도 똑같이 경험 했었기에 현재 일하고 있는 연구소만의 문화는 아닐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율적인 업무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포기할 수 없는 업무 문화이며, 베를린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네 번째 이유이기도 합니다. [ 여름에 빼 놓을 수 없는 즐거움. 베를린 근교 Spreewald에서의 카누잉 ] 도시 정책과 업무 햇수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베를린의 노동자들에게는 평균적으로 1년에 30일간의 휴가 일수가 보장 됩니다. 이는 법정 공휴일 뿐만 아니라 병가 및 육아 휴가같은 특수한 휴가까지 제외한 휴가 일수이며, 심지어 휴가 중 몸이 아플 경우, 병가로 전환하여 휴가 일수를 보전할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을 처음 들었을 때는 '법적으로야 그렇겠지만, 설마 저렇게까지 휴가를 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법정 휴일에 휴가, 병가, 그리고 각종 이유로 인한 재택근무까지 꼼꼼히 챙기고도 틈틈이 농땡이까지 부리는 독일 동료들을 보면서 적잖이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한국에서 그렇게 긴 휴가를 보내 본 경험이 없었던 저는 처음 2년 간 휴가 일수의 3분의 1도 사용하지 못했었습니다. 어느 날 수퍼바이저로부터 휴가를 사용하지 않으면 회사가 곤란을 겪게 된다는 지적을 듣고 난 후, 있는 힘껏 휴가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저도 매년 30일의 휴가 일수 중 20일을 뭉텅 잘라내어 한국을 방문하고 있습니다. 20일이면 주말을 포함해 꼬박 한 달을 한국에 머무를 수 있기 때문에 한국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직장 해고 당하고 귀국한 게 아니냐는 오해를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긴 휴가를 쓰고도 여전히 열흘이나 휴가 일수가 남았다는 것을 친구들에게 자랑 할 수 있는 것 또한 베를린에서 생업을 이어가는 점의 매력들 중 하나로 꼽고 싶습니다. [ 해마다 열리는 베를린의 문화 축제 '카니발 데어 쿨투렌’ (Karneval der Kulturen) ] 베를린 생활의 매력을 저의 관점에서 설명해 보았습니다만, 이것이 베를린이 가진 매력의 모든 것은 아닐 것이고, 또한 베를린이 장점만을 가진 도시도 아닐 것입니다. 베를린에서 혹은 범위를 조금 넓혀 독일에서 연구원으로 생활 한다는 것을 짧게 요약해 보자면 "물질적으로 풍족하진 못하되, 심리적으로 여유로운 삶"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여름이 오면 가끔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 퇴근을 해서 동료들과 시원한 맥주를 한 병씩 들고 물가에 앉아 이러쿵 저러쿵 시덥잖은 이야기를 나누고는 합니다. 가방을 베고 누워 버리는 동료가 있는가 하면, 신발을 벗고 물에 발을 담그는 동료도 있습니다. 이렇듯 길고 긴 오후 시간을 보내면서 천 원도 안 되는 맥주 한 병을 마시고 있지만, ‘삶이 여유롭다 못해 한가롭기까지 하구나’라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RELAY BOOK
월든 (이달의 주자: 김훈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 저
20대 후반에 처음 『월든』을 만났습니다. 대학원을 졸업하면서 새롭게 고민이 시작되던 때였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환경단체에서 일을 했고, 자연스레 생태학과 관련된 읽을거리를 찾다가 눈에 들어온 책이었어요. 조금 훑어보다 금세 덮었습니다. 숲속에 은둔하며 사는 어느 낭만주의자가 쓴 글이려니 생각했지요. 소로(1817-1862)를 단순한 낭만주의자라고 여긴 것이 큰 오해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시기는 40대 후반이었습니다. 학교에서 고전읽기 강좌를 운영하면서 제가 선택한 책이 그나마 익숙한 『월든』이었어요. 수업준비 때문에 열심히 완독했습니다. 관련 논문들도 찾아 읽었고요. 그리고 자발적으로 몇 차례 더 완독했습니다. 읽을수록 감탄했어요. 20년 전 눈에 들어오지 않던 구절들이 (나이 탓인지)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월든』을 읽었고 훌륭한 교양도서로 추천해 왔습니다. 19세기 미국 북동부를 중심으로 급성장하던 자본주의 시대, 물질문명과 인간의 끝없는 탐욕에 대항하기 위해 홀연히 월든 호숫가로 떠나 2년간 절제된 생활을 실천하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돼 있습니다. ‘꼰대 아냐?’ 사실 처음 완독했을 때 느낌은 이랬습니다. 과학기술 덕분에 편리한 생활에 익숙해지고 어떻게 하면 안락한 노후를 준비할 수 있을지 늘 걱정하는 저에게 잘못 살고 있다며 계속 훈계하는 투로 서술했기 때문이죠. 가령 “집이라는 불필요한 재산을...보유하면 장례비용을 넉넉히 마련한다는 이점밖에 없다”라든지 “인생에서 가장 가치 없는 노년기에 자유를 누리기 위해 인생 최고의 순간인 젊음을 돈 버는 데 허비하는 모습”이라는 문구에서 그랬어요. 특히 ”고전을 원어로 읽지 못하는 이들은 인간의 역사에 대해 아주 불완전한 지식을 갖게 된다”라는 대목에서는 반감마저 들더군요. 하지만 두 번 세 번 읽으면서 반감은 경외감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일단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의식주만 확보하며 사는 절제력이 과연 가능할까 싶었어요. 남은 시간에는 오로지 영적 성숙을 위한 실천이었고요. 호수에서의 목욕과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독서와 산책으로 마무리하는 생활이 꾸준히 이어졌습니다. 낮에는 최소한의 식량을 얻기 위해 몸소 농사를 지었지요. 제가 또 한 번 감탄한 부분이 바로 농사에 대한 그의 생각과 표현에서였습니다. 농경은 “성스러운 기술”이며 “콩을 심어 얻는 것은 콩만이 아니다...콩은 어떤 의미에서는 우드척을 위해서 자라지 않는가?”라는 문구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소로는 무척이나 신중한 작가였습니다. 그는 1846년부터 집필을 시작해 무려 일곱 차례나 고쳐 쓴 후 1854년에야 『월든』을 출판했어요. 이 과정에서 자연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집중적으로 증가했다고 합니다. 실제로 『월든』의 후반부에는 호수와 동식물에 대한 박물학자 수준의 섬세한 묘사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월든』은 전반부와 후반부가 다소 다른 느낌을 전해주는 것 같아요. 『월든』에서는 인간이 추구해야 할 영성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해답이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고귀한 영성에 도달하기 위해 얼마나 고독하고 치열하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소로가 세상과 등지고 자신만의 정신세계를 추구하는 은둔형 인간은 아니었어요. 『월든』에서 구체적으로 묘사되진 않지만 소로는 노예제 폐지를 위해 남다른 활동을 펼친 실천가였어요. 위험을 무릅쓰고 틈틈이 노예의 탈출을 도와주기도 했고, 과격한 군인 한 명이 노예소유주를 살해하고 무기고를 습격한 죄로 잡혀 교수형에 처하기 전날 그를 지지하는 대중연설을 홀로 감행하기도 했어요. 『월든』은 저에게 잔잔하면서도 거대한 여운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추천하는 다음 주자는 한겨레신문 오철우 기자님입니다. 사실 기자라는 직함으로는 너무 설명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시죠. 서울대 영문학과를 졸업했는데, 석사와 박사를 서울대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마치셨어요. 신문사 초창기 시절에는 다방면으로 기사를 작성하다가 어느 순간 과학에 올인하고 계시죠. 현재 국내 최고 수준의 과학웹진 ‘사이언스온’의 운영자이시고요. 옮긴 책으로 『온도계의 철학』, 「과학의 언어』, 『과학의 수사학』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 『갈릴레오의 두 우주 체계에 관한 대화』가 있습니다. 최근에는 박사논문을 다듬어 『천안함의 과학 블랙박스를 열다-분단체제 프레임 전쟁과 과학 논쟁』을 출판했습니다. 누구나 관심을 갖고 있지만 누구도 쉽사리 접근하지 못하는 과학 주제를 두고 뚝심있게 고민과 글쓰기를 행하는 분입니다. 자세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