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04
org.kosen.entty.User@3062c5d6
이병현(dlqudgus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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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이루어졌고 또 지금과 비교해 불가능하거나 진행이 매우 어렵던 연구는 무엇이 있습니까?
일단 광범위한 통계조사나 암호처럼 얽힌 염기서열을 해독하는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것 같은데요.
답변 부탁드리겠습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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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분야 한인연구자와 현업 전문가분들의 답변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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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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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안길홍님의 답변
2008-04-10- 0
우선 그당시에는 생명공학이라는 학과 자체가 없었습니다. 아마 이 부분은 의과대학 계열에서 취급하였을 것입니다. 공과대학의 예를 들어 간단히 설명드리겠습니다. 학과도 지금처럼 세분화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으로 기계과,화공과,금속과,전기과,토목과,건축과 이렇게 나뉘어 있었고, 그때의 등록금은 (60년대에서 70년대 초)국립대 3만원 정도, 사립대 5만원 정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국민소득이 300$ 정도 되었으며, 실험 자재를 살려고 하여도 US$가 없어서 살 수 없었습니다. 월남전이 한창이었을 때 인데, 파병하여 들어오는 US$로써 산업자재를 구입하기 바빠서 학교에서의 실험 자재는 엄두도 내지 못할 때 였습니다. 실험시간이라고 하여도 겨우 시약 몇가지 시험관,알콜램프 정도.... 그리고 조금 고가의 자재는 주로 독일 과 미국의 원조로 현물이 들어 왔을 정도 입니다. 그때 생명공학이라는 학과가 있었다면 아마 입학부터 졸업 때 까지 휴강하여야 하였을 겁니다. 그래서 자연히 교재에 의한 이론교육에 치중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좀더 공부하고자 및 해외 유학을 가고자 하는 학생은 대학원을 진학하였습니다. 해외 유학 시험의 응시 조건이 대학원생이어야 하니깐요. 왜냐하면 국비 장학금으로써 유학을 갔으니 깐요.US$는 국가관리하에서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지금처럼 자기집에 돈이 있다고 하여도 마음대로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여권이 없으니깐요.자연히 외화는 포항제철,울산 석유화학 공단 및 대한 석유공사(지금의 SK)로 갈 수 밖에 없었는 것이 공장이 돌아가고 전력에 기름이 필요하니깐요. 공부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유학을 갔습니다. 1년에 약 100명 정도. 그리고 국내에서는 공학게열에 관한 논문을 쓰도 심사할 사람이 없었으니깐요. 대부분이 일본에서 공부하고 온 교수 들이니깐 영어에 대하여도 매우 어려움이 많았습니다.그외 여러가지가 있습니다만 그때는 대강 그렇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