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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쓰나미

이번 달에는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가 없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온통 KAIST 자살사건으로 과학-교육계가 시끌벅적하여, 다른 이야기는 접어두고 필자까지 판에 끼어들어 이야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징벌성 등록금 부과는 약간 썰렁하기는 하지만, 가능한 제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제도가 상대평가였다는 것이죠. 오래된 영화 Deer Hunter에서 나왔던, '러시안 룰렛' 같은, 반드시 누군가는 죽어야 하는 게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절대평가를 하면 적당히 봐주니까 절대로 절대평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에도 불구하고 우수한 학생들을 적당히 겁주고 적당히 봐주며 절대평가로 운영하는 것이 현실적입니다. 순진한 사람들은, 국가가 학비를 대는 학교에서 그 정도는 해야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비슷한 수준의 학생이 서울의 명문대를 간다면, 학교생활도 낭만적이고 설렁설렁 과외해서 등록금도 번다고 합니다. 졸업 후 사회의 평가는 카이스트 학생들은 공부만 해서 외골수라고 합니다. 그렇게 고생해서 졸업해봐야, 인간관계와 학연이 중요한 사회에서 엇비슷한 대접을 받는 것이죠. 그래서 세상사에 빠꼼한 집안 애들은 카이스트 잘 안오는 것 같습니다. 너무 세속적인 이야기를 오래하는 것도 피차 낯부끄러우니 이 정도로 마무리하구요, 다른 측면에서 문제들을 한 번 봅시다.

이런 제도를 운영하면, 학생들 사이에 존재해야 할 연대의식이 엄청 약해지죠. 같이 토론하고 같이 성장해야 할 동기들이 적으로 보일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교수들이 몰라서 징벌성 등록금제도가 존속되었을까요? 사실은 교수들이 가장 큰 수혜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학생들 컨트롤이 너무 쉬워지죠. 군사부일체를 중요한 덕목과 윤리로 삼는 유교적 한국사회에서 교수들의 힘은 항상 너무 지나쳐서 탈입니다. 그런데 교수에게 학생들의 생사여탈권까지 쥐어준 것이죠. 그것도 상대평가이니, 개인적 원성을 피해갈 수 있는 장치까지 마련되어 교수들에게 완벽합니다. 이런 학교분위기에서 자유로운 지성의 성장이 가능한 일일까요? 자살사건이 시끄러운 와중에 몇몇 교수님들이 학생들에게 미안하다는 무슨 시라는 것을 지어 올린 것을 읽어보면서, 저는 감동보다는 다른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시어머니에게 뜯겨 정신이 멍해진 며느리를 말린답시고 거드는 시누이들의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사회구조라는 것이 한 번 만들어지면, 혁명이나 항명파동 또는 이런 극단적인 사고가 아니면 다시 검토되기는 어렵기에 교수들이 전부 한패인양 매도하는 것은 좀 지나친 면이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저는 교수들을 비난하기보다는 이런 사회구조를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위에 있으면 훨씬 적은 책임만으로도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지만, 아래에 있으면 책임만 있고 아무 권한은 없는 것 말입니다. 기업의 문턱을 넘은 극단적 자본주의 쓰나미가 정부뿐만 아니라 학교와 종교에까지도 덮친 결과라고 해야 할까요? 그런데 이제는 학교를 보호해야 하겠으니, 교내에서는 죽은 학생들이 너무 의지가 박약했던 것으로 몰고 가는 분위기입니다. 흔히 있는 사회현상이죠. 성추행 같은 형사사건의 피해자가 되면 괜히 사건과 전혀 관계없는 사생활까지 노출되어 피해자 가족들이 오히려 사건을 덮으려 하는 것과 같은 원리라고 해야 할까요? 의지가 부족한 사람일수록 자살의지도 더 부족할 수 있습니다. 자살이란 개인의 의지력의 문제로만 볼 일이 아니죠. “얼마나 극단적으로 몰렸기에 죽음을 선택했을까?”라고 생각하는 것이 정상인들의 생각 아닌가요? 제가 자살한 학생들 부모라면 정말 학교구성원들이 밉고, 한국사회가 싫어질 것 같습니다.

징벌성 등록금 제도는 철회를 한다고 했지만, 카이스트가 이공계 인력 찍어내는 붕어빵 기계가 아니라, 열정 있고 창의적인 과학기술계 인재들을 길러내는 자리로 빨리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학점경쟁 같은 것으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충분히 걸러진 인재를 모은 집단에게는 그에 걸맞는 자유도를 허락해야 합니다. 창의력은 그 자유도에 비례해서 나오는 것이죠.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학생들 전부가 똑같은 생각과 방법론을 가졌다면, 인재가 아니라 그냥 조금 비싼 제품에 불과한 것이죠. 그리고 어느 집단이나 모아두면 그 속에서 또 머리가 생기고 꼬리가 생깁니다. 거기서 또 꼬리를 잘라내고, 또 잘라내고를 거듭하면 아무도 안 남습니다. 사회에 기여한 훌륭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학창시절에 우수했던 사람들이 많지만, 또 다른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주로 뒤쪽에 앉던 사람들입니다. 사람마다 성장속도도 달라서, 영재에서 대기만성인 사람까지 천재도 각양각색입니다. 왜 이리도 한 줄로 서는 사회로 가는지요? 이런 극한 경쟁구조를 만든 장본인이 훨씬 더 유연한 경쟁구조를 가졌다는 미국에서 거의 평생을 보낸 분이라는 아이러니는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참 답답하군요. 혹시, 우리 모두가 승자만 되려는 욕심이 그분의 모습으로 현신한 것은 아닐까요? 꽃다운 청춘들이 목숨을 끊어도 여전히 우리집 자식 차례에서만 안 터지기를 바라고 열심히 돌아가는 폭탄 돌리기는 계속되겠죠? 일본은 자연재해 쓰나미가 왔다면, 우리에게는 교육구조 한계를 지적한 쓰나미가 온 것으로, 학생들의 죽음을 생각해볼 수는 없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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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느끼는 거지만 글을 참 시원하게 잘 쓰십니다. 사회 문제에 지속적으로 관심 가져주시고 이렇게 계속 글을 써주시는게 고맙게 느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