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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cial Network

  코세니아님들,
  무더운 여름은 잘 보내셨는지요? 지진이니 홍수니 해서 좀 어수선한 여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게다가 추석이 빨라서 가을 준비도 없이 곧바로 찬바람을 맞아야 하는 시간의 순환 앞에 서있습니다.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요즘 유행하는 Social Network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이 언제부터 핸드폰을 사용하기 시작했나요? 상당히 최근인 것 같은데, 나이 50인 저도 핸드폰을 안들고 나온 날은 약간 패닉상태가 됩니다. 우선 공간적으로, 바지의 한쪽 주머니에는 지갑, 다른 주머니에는 휴대폰이 들어있어야 하는데, 한쪽이 헐렁하게 비어있는 상실감에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그러니 젊은이들의 불안감은 아주 크겠죠.

  우리 시대와 가장 큰 차이는, 우리 때는 누가 안보이면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든 애인이든 오랜 기다림과 수소문을 한 끝에 마주 앉습니다. 그리고는 뭔가 결심을 한 상대는, 예측할 수 없었던 심중의 변화를 털어놓는 일이 많았습니다. 정말 삶이 소설처럼 극적일 때가 많았어요. 요즈음은 그 극적인 요소가 아주 짧게 단타로 이어지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지나친 문명개발을 경계하는 것이 저의 철학이지만, 그래도 휴대폰은 삶에 상당한 기여가 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다가 발명이 지나쳐서 스마트폰이 나오고, 트윗터와 패이스북이 나오면서 상황은 좀 달라지는 것 같습니다. 이전에는 블로그가 많이 퍼졌지만, 곧 시시한 블로그들은 간판만 걸린 흉가처럼 되어갔는데, 이제는 과거의 블로그와 달리 방문객을 기다리는 마켓팅이 아니라, 찾아가는 마켓팅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즉, 가게형 넷트웍이 방문판매용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문판매용 마켓팅에는 지인들을 굴비처럼 엮어오는 다단계 마켓팅이 가미되고 있습니다. 내 돈 안들어가는 Social Network을 왜 위험한 장사에 비유하느냐고 생각하시나요? 오리지날 다단계는 돈을 벌거나 잃는 대신에 지금 넷트웍의 다단계는 시간을 잃거나 사람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론은 오리지날과 동일합니다. 벌거나 얻는 사람보다는 잃는 사람이 압도적으로 많다는 것이죠. 그 많은 시간은 도대체 누가 보상해주나요? 어차피 남는 시간을 사용하거나 할 일 없는 사람이라구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고급 정보를 찾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주도적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남들에게 코가 꿰어 자기 시간을 써야 하니, 시간이 남는 사람도 좀 더 생산적이고 고상하게 시간을 보내지 못해 문제입니다. 패이스북 창시자는 남의 시간을 훔쳐서 거부가 된 사람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물론, 그가 누구도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남들이 다 하는데 안하려면 강요보다 더 사람을 불안하게 만들죠.


  최근에 제가 출간한 ‘제조업…’이라는 책에서도 이야기했지만, 정보통신 시대가 더 발달될수록 계층간의 차이는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소득 계층, 나이 계층, 직업 계층에 따라 사람들의 행태가 오히려 세분화된다는 느낌입니다. 이런 현상은, 정보통신을 통한 정보의 공유로 더 많은 평등을 누리게 해줄 것이라는 애초의 추정과는 반대입니다. 인간은 남들보다 더 나아지고 싶고, 그런 것을 달성할만한 더 많은 도구가 주어지면 당연히 더 차이가 생기겠죠? 마치 기계없이 육상으로만 경주하는 것보다, 자동차로 경주하면, 차라는 도구에 따라 기록이 엄청 달라지는 것과 비슷합니다. 더욱이 거리가 짧을 때는 그나마 다행인데, 더 장거리로 갈수록 차량의 성능이 기록을 좌우하겠죠. 그래서 계층은 대물림되는 현상이 생기는 것이죠. 아래 계층은 자기가 가진 돈과 시간을 위 계층에 (기꺼이) 바치고, 윗계층은 그것을 누리고 돈을 버는 현상이 생깁니다. 증권시장 개미군단의 희망과 절망, 날마다 소식을 공유해도 외로움이 지워지지 않는 패이스북 팬들과는 달리, 위에서 주무르는 사람들은 시장의 손실을 개미군단의 돈으로 막고, 패이스북의 외로운 영혼들에게 광고를 팔고…

  제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이런 Social Network들을 집어치우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이 우리 삶에 어떤 역할을 미칠 지 성찰해보고, 제대로 알맞게 사용하자는 것이죠. 그리고 한 번 빠지면 절제하기 어려운 우리의 속성을 알고 약간 경계하자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멀리서 갑자기 올 굿뉴스를 갈망하기보다, 구질구질해 보이는 주변과 일상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용기있는 삶을 살자는 주장입니다. 좀 엉뚱한 인용이 될 지 모르겠습니다만, 미국의 건국지성 밴자민 프랭클린은 어릴 때 마음이 혹하여 호루라기를 너무 비싸게 지불하고 산 기억을 평생 떠올리며 살았다고 하더군요. 1779년에 그가 쓴 엣세이의 일부를 옮깁니다. 아래 내용에 나오는 돈을 시간으로 치환하면, 오늘 하고 싶은 Social Network에 대한 저의 의견입니다. (아래 영어는 200년전 고어여서 표현이 현대영어와 약간 다릅니다.)


  …When I was a child of seven years old, my friends, on a holiday, filled my pocket with coppers. I went directly to a shop where they sold toys for children; and being charmed with the sound of a whistle, that I met by the way in the hands of another boy, I voluntarily offered and gave all my money for one. I then came home, and went whistling all over the house, much pleased with my whistle, but disturbing all the family. My brothers, and sisters, and cousins, understanding the bargain I had made, told me I had given four times as much for it as it was worth; put me in mind what good things I might have bought with the rest of the money; and laughed at me so much for my folly, that I cried with vexation; and the reflection gave me more chagrin than the whistle gave me pleasure.

  This, however, was afterwards of use to me, the impression continuing on my mind; so that often, when I was tempted to buy some unnecessary thing, I said to myself, Don’t give too much for the whistle; and I saved my money.


  As I grew up, came into the world, and observed the actions of men, I thought I met with many, very many, who gave too much for the whis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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