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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의 과학 :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SF 디스토피아(Dystopia)의 걸작

영화를 처음 접했을 때의 생소함이 어렴풋이 생각난다. 조지루카스(George Lucas)의 스타워즈 시리즈를 보고 영화를 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던 기억……필자는 이 영화 속에 스며들어 있던 SF (Science Fiction)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고, 이 글에서 과학과 SF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SF와 과학이 안겨다 준 미래가 녹아있는 작품 중 특히 소개하고 싶은 영화는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이다. 이 영화에서 감독인 리들리 스콧 (RIDLEY SCOTT)은 두 가지 명제를 전달하고자 했다. 복제인간과 인조인간. 서기 2019년 11월, 가까운 미래. 계속되는 지역간 분쟁과 내전으로 국가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시민들이 통제되는데... 개개인의 뇌파가 지문처럼 모두 다르고 그것으로 개인을 통제한다. 이 영화에서 우리의 주인공은 반은 사람이고 반은 사이보그 (Half Man Half Cyborg)로서 뇌파 통제로부터 자유로운 동시에 창조적인 사고를 할 수 있다. 지하철 안내방송 사이에서 고저를 반복하는 기묘한 기계음. 잔뜩 찌푸린 날, 빌딩 숲 사이 사이로 빛나는 시티비전 동영상의 번득임. 2003년 서울은 이 영화가 예견한 2019년 LA의 을씨년스러운 풍경과 놀라우리만큼 비슷하다. 리들리 스콧은 내용 뿐 아니라 Visual Style 면에서도 전무후무한 걸작을 남겼다. 이 영화는 안드로이드와 공생하는 인간의 미래가 끔찍할 정도로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식민지에서 살고 있는 리플리컨트 (Replicant)라는 안드로이드들에게 예기치 못한 인간적 감정이 생겨나고 그들은 자신들의 한정된 목숨을 연장하기 위해 지구로 잠입한다. 여기서 '블레이드 러너'는 탈출한 안드로이드들을 추적해서 '폐기'하는 형사들이다. 인간과 겉모습은 물론 감정을 느끼는 것까지 똑같은 인조인간 리플리컨트와 그들을 제거하기 위해 뒤쫓는 특수 경찰간의 대립을 통해 이 영화는 “인간 본질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82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가 보여주는 37년 후의 미래는 20세기 첨단 대도시 풍경을 확장해 놓은 것 같은 초거대형 우주 도시와 빌딩 숲, 날아다니는 택시와 뒷골목 포장마차, 곳곳에 등장하는 동양풍이 핵심이다. 인조인간보다 오히려 더 인간미를 잃은 인간들, 죽음이 코 앞에 닥친 음울한 미래의 모습은 공해로 인해 항상 비가 내리는 어둡고 지저분한 대도시 공간으로 시각화 된다. '블레이드 러너’는 이후 수많은 영화의 모델이 되었다. ‘공각기동대’(1995)의 오시이 마모루는 “블레이드 러너의 충격은 지금까지 내 모든 작업의 기반이 됐다”고 토로할 정도였고, ‘아키라’(1988)의 오토모 카쓰히로는 자기 작품에 ‘블레이드 러너’의 미래상이 담겨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신작 ‘여섯번째 날’에서 주인공의 정신과 진단을 하는 의사가 던지는 질문은 ‘블레이드 러너’에서 리플리컨트인지 아닌지를 밝혀내는 테스트 문항과 같으며 ‘눈’을 들여다 봄으로써 진짜 인간인지 아닌지의 여부를 판별한다는 것도 똑같다. ‘다크 씨티’ ‘12몽키스’ ‘매트릭스’ 같은 작품에서도 '블레이드 러너’의 잔영을 볼 수 있다. '블레이드 러너’는 최근 논란이 됐던 복제인간의 윤리성과 그에 따른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성찰 면에서도 의미가 크다. 블레이드 러너 (해리슨 포드)를 구하고 죽어가는 리플리컨트 (루트거 하우어)의 마지막 대사, “내가 그동안 보아왔던 모든 순간들도 비 속에 흐르는 내 눈물처럼 사라지고 말겠지... 이제 죽어야 할 시간이군”(All those moments will be lost in time like tears in rain... time to die.). 영화가 던진 인간 본성에 대한 질문은 이후로도 끊임없이 반복된다. 영화는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안드로이드와 칼처럼 차가운 인간의 모습을 극적으로 대비시키면서 과연 '인간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몇 년 전 다시 개봉된 “감독판 블레이드 러너 (여전 개봉시 제작자에 의해 편집된 장면을 감독이 새로 편집하여 만들어진 판)”에서는 안드로이드를 폐기하는 '블레이드 러너'인 데커드 형사(해리슨 포드)마저 안드로이드라는 암시 장면이 삽입됨으로써 자신이 안드로이드임을 알고 있는 안드로이드와 인간이라고 믿고 있는 안드로이드에 대해 이야기한다. 감독판은 제작자판보다 더 충격적이고 중층적이라 할 수 있다. SF는 안드로이드를 등장시켜 인간성의 참다운 한계와 의미를 되새긴다. SF의 영원한 화두. “과연 '인간적'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또 하나 SF영화에서 가장 흔한 캐릭터 중의 하나가 인조인간이다. 그런데 ‘로봇’과 ‘인조인간’은 어떻게 다른 걸까? 스타 워즈에 나오는 귀여운 로봇 듀엣인 ‘R2―D2’와 ‘C3PO’는 엄밀한 뜻에서 인조인간이라 할 수 있을까? 무자비한 살생로봇 ‘터미네이터’나 신출귀몰하는 액체 로봇은 안드로이드인가? 21세기의 암울한 미래상을 펼쳐 보인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사람과 구별이 안되는 인조인간들은 사이보그라고도 할 수 있는가? ‘로봇’이란 말은 1920년대에 체코의 극작가 카렐 차펙이 ‘R.U.R.’라는 희곡에서 처음 만들어냈다. 당시엔 사람과 아주 닮은 일하는 인형을 뜻했지만, 그 뒤에 의미가 변하여 겉모습과는 상관없이 사람대신 일하는 장치를 뜻하게 됐다. ‘로봇’이란 말은 비록 처음엔 SF에서 탄생했어도 오늘 날에는 일반적인 용어로 자리잡은 반면, ‘안드로이드’라는 말은 아직 SF 차원에 머물러 있다. 안드로이드는 인간과 똑같은 모습을 지닌 로봇이라는 뜻. 로보캅의 경우 외형이 로봇에 가까우므로 안드로이드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한편 ‘사이보그’라는 말은 ‘사이버네틱 오르가니즘[cybernetic(인공두뇌학) ORGanism(유기체)]’의 약자로서, SF작가가 아닌 인체공학자들의 연구결과로 생긴 말이다. 즉, 로봇은 금속이나 플라스틱으로 구성된 기계이고, 안드로이드는 원형질로 이루어진 구성물로서 인공적으로 배양된 것을 말하며, 사이보그는 기계와 원형질의 결합, 혹은 인간과 기계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섹스용 로봇도 있긴 하지만, 이 영화에서 리플리컨트는 지루하고 위험한 여러 가지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 제조된 로봇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미숙한 상태로 설정되어 있다. 신형 리플리컨트인 레이첼은 감성적 제약을 완충하기 위한 테스트 버전형으로 기억이 심어졌으며 자신 스스로 리플리컨트임을 모르는 채로 제작되었다고는 하지만 결국 이 장치 역시 감정을 제어하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더군다나 지구에 잠입한 다섯 명의 리플리컨트들은 불과 몇 개월이 지나면, 동작을 정지해야 하는 자기들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구의 타이렐 회사를 찾았다. 마치 죽어야 하는 인간의 문제를 극복하려는 듯. 그런 면에서 그들의 모습은 인간보다 더욱 인간다운 듯하다. 무엇이 과연 인간다운 것일까? 인간의 이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인간의 감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일까? 다만 우리는 Blade Runner 라는 영화를 통해 영화 속에서 복제 인간과 인조인간이 어떻게 비추어졌는지 살펴볼 수 있다. 분명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의 상상력 또한 따라가게 되어 있다. 복제인간과 인조인간이 인간 세계에 미칠 영향과 그들과 공존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정확한 답은 어느 누구도 내릴 수 없다. 인간이 그들의 생명을 복제하고 다시 생산한다는 다소 철학적이며 윤리적인 논쟁과 신에 대한 도전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만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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