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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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을 영어로는 Identity라고 하는데, 선형대수에서는 숫자 1로 대각선이 채워진 행렬을 말합니다. 그래서 Identity행렬에 어떤 행렬을 곱해도 원행렬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방정식에서는 항등식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정체성은 ‘동일하다’는 뜻이고, 더 나아가 누군가와 가장 일치되는 정의(definition)라고 볼수 있겠습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또 우리 자신도 많이 옮겨다니며 살다보니, 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이 가끔 생깁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라는, 엄청 낡아빠진, 그러나 비켜갈 수 없는 질문들 말입니다. 질문을 위와 같이 하면 괜히 답없는 철학 같으니 좀 더 자연스럽게 질문을 바꾸어 봅시다. 나는 뭘 좋아하는가? 나에게는 무슨 스타일이 가장 어울리는가? 나는 무엇에 가장 많은 돈과 시간을 쓰고 싶은가? 정도로 질문을 바꾸어보면, 정체성이라는 단어가 훨씬 구체화됩니다. 이제 보다 객관적인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어봅시다. 우리를 구성하는 정체성의 우선순위를 나름대로 매겨보았습니다.
- 1. 성별 (남자냐, 여자냐)
- 2. 나이
- 3. 가족(출신) 배경
- 4. 지역 (국가보다 좁은)
- 5. 문화권 (국가보다 넓은)
- 6. 오래토록 종사한 직업
- 7. 종교
위의 순위는 제가 임의로 정한 것이니, 사람에 따라 순위가 바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종교가 가장 위로 올라가야 한다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맨 위의 두 개는 벗어나기 어려운 객관적 정체성이며, 4번과 더불어 여권에 활자화되는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사회의 어려운 문제로 등장한 정체성이 1번입니다. 확고부동하다고 생각되던 성별 정체성의 문제가 흔들리니, 동성애자가 아닌 사람들도 당사자들 못지않게 크게 반응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서도 1번에 대해서만 간단히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남녀의 차이에 관하여는 “화성… 남자, 금성… 여자”를 비롯하여 무수하게 논의된 주제이지만, 여전히 깜깜합니다. 우리 모두가 언제나 어느 한쪽일 뿐, 두쪽 모두에 속하지 않으니까요.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최근에 결혼한 젊은 직장동료가 있어 그에게 주제 넘게 결혼생활을 조언한 일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한가지만 알면 상당히 유용할거야. 내가 결혼생활 사반세기를 넘게 지내오며 이제야 득도한 것이지!” 라며 거창하게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큰 일은 작게, 작은 일은 크게 생각한다.” 저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예를 들어, 너가 오늘 저녁에 집에 돌아가서, ‘여보, 나 오늘 해고되었어!’ 라고 말하면 아내는 너를 위로하며 ‘괜찮아! 아직 젊으니까 또 다른 직장을 찾으면 되지 뭐!’라고 답할거야. 하지만 발렌타인 데이에 장미 한송이를 안사들고 들어가거나, 떨어진 양념 하나를 사들고 오라는 부탁을 잊고 그냥 퇴근한다면 오늘 저녁 아마 평화롭게 식탁에 마주 앉기는 어려울거야!” 벌써 자주 당해봤다는듯, 그 친구가 파안대소하며 묻더군요. “여자들 머리는 도대체 어떤 논리로 작동되나요?” 저의 답변이 이어졌습니다. “큰 일은 우리가 어쩌지 못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운명이라는 것이지! 하지만 작은 일은, 너가 할 수 있는데도 안했다는 것이야. 괘씸하고 나이브하고 자신을 무시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그 친구는 자칭 동양의 도인에게 두 손을 모아 경의를 표하고는 자기 사무실로 돌아갔습니다.
한 번은 미국에서 아내와 함께 자동차를 사러 간 적이 있습니다. 현대인에게 가장 큰 구매는 집을 사는 것이고, 두번 째가 차를 살 때일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열심히 딜러의 성능스펙 설명을 듣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딴전을 피던 아내는 시승운전을 하는 중요한 순간에 커피잔 놓을 데가 마땅치 않다는 불평을 늘어놓았습니다. 성격 급한 저의 입에서 핀잔이 바로 튀어나왔습니다. “이 사람아! 커피는 수족관 놓인 지하다방에서나 마셔! 차는 달리는 기계니까 엔진성능이 중요하다니까?” 곧이은 아내의 반격에 참패 후 상황은 종료되었습니다. “커피 받침대 디자인까지 신경 쓴 차가 왜 엔진이 나쁘겠어? 차에서 엔진은 기본이야. 좋은 차와 나쁜 차는 디테일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지! 당신 엔지니어 맞아?” 그날 이후로 저에게도 큰 일은 작게, 작은 일은 크게 보려는, 여성화가 진행중입니다. 갑자기 페니니스트인 척 하려니 얼굴이 좀 간지럽군요. 저는 페미니스트도, 마초이스트도 아닌 휴머니스트입니다.
“할 수 있는 일부터 잘하자!” 라는 구호로 가장 중요한 1번 정체성의 이슈가 정리되었습니다. 사실 직장생활하다보면, 곧 인사이동이 있을 것이라는 둥, 조직개편 예정이라는 둥 온갖 ‘큰 일’들이 루머로 돌아다녀서 모두가 손을 놓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그와 관계없이 자기가 할 일만 열심히 하는 것이 답인데 말입니다. 아마 5.16 이래 최대의 ‘큰 일’인 탄핵정국 아래에서 5천만이 몇 달 동안 그렇게 일손을 놓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상으로 돌아와야죠. 탄핵 같은 ‘큰 일’은 국가적 운명이라면, 투표 같은 ‘작은 일’은 성인국민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니 꼭 해야죠.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확실하게 챙길 때 우리는 실수하지 않고 탄탄하게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나저나 이제 서빙 로봇 시대가 온다는데, 로봇에게도 성적 정체성을 심어두려나요? 아마도 네비게이션에서 선택가능한 목소리처럼 버튼 하나로 성별과 나이설정을 바꿀 수 있겠죠? 이 경우의 정체성은 Identity가 아니라, Multiple choice가 되겠군요. 절대로 도구와 존재를 착각하지 않는 과학을 하자는 주장을 하고 싶습니다. 4월이 잔인한 달이 아니라, 주위와 우리 마음 속 어디에나 꽃이 만발한 진정한 봄이 되길 바랍니다. 그리고 물 속에 잠겨있는 아이들도 빨리 올라와 이제는 제 갈 길을 갈 수 있고, 가족들도 그들을 사랑과 눈물로 배웅해줄 수 있는 유종의 4월이 되길 기원합니다.
유종의 4월이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