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니스커트와 넥타이 그리고 과학
- 1859
- 4
- 0
길게 늘어진 치마는 원래 여성들의 몸매를 가리는 용도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인간의 몸은 성적욕망을 연상시켜 종교나 윤리가 엄격한 사회에서는 언제나 많이 가려야 할 부분입니다. 조선시대에도 남녀 모두 하반신 몸매가 드러나지 않는 옷을 입었고, 지금의 아랍제국들처럼 여성들은 외출시에 얼굴도 가리고 다녔습니다. 노출에 자유로워진 것은 불과 얼마전입니다. 제가 고등학생일 때만 해도 장발과 함께 미니스커트도 단속대상이었습니다. 남자경찰이 대학생 누나들을 불러세워놓고, 자로 무릅부터 치마 밑단까지를 재는 것입니다. 개미허리를 연출하려고 너무 졸라맨 탓에, 경찰 앞에서 치마를 끌어내리려고 해도 잘 안내려오는 웃지못할 장면을 TV에서 본 기억도 있습니다. 땅을 쓸고다니던 한복 치마가 차츰 짧아져 미니스커트까지 갔다가, 또 다시 길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짧아져 이제 거의 ‘하의 실종’에까지 왔습니다. 눈이란 쉽게 익숙해지는 것인지, 유럽에 사는 저는 심지어 ‘누드 비치’에 가서도 별로 놀라지 않았습니다. 해변가에서 길을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우연히 다다르게 되었을뿐, 일부러 간 것은 아니었습니다. 믿어줄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만…
남자들 의상으로 옮겨가 볼까요? 넥타이는 길이가 짧았다가 길어지기도 했지만, 넓이도 심하게 변했습니다. 옛날에는 거의 한 뼘이던 것이 계속 얇아져서 새끼줄 정도로 좁아졌었는데, 이제는 아예 안매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남자에게 유일하게 허용되던 화려한 넥타이를 안하니, 중년남자들 모습이 너무 무채색입니다. 공무원들이 출퇴근하는 정부청사 앞 풍경을 가끔 매체를 통해 봅니다. 전부 비슷한 양복을 입었는데, 넥타이까지 없으니 개인은 사라지고 그룹으로만 보입니다. 김동길 교수님이 즐겨 하시던 나비 넥타이나 비틀즈가 하던 얇은 넥타이 시대가 다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내친 김에 엉뚱한 이야기 하나만 더 하고 본론에 들어가겠습니다. 서양에서는 정장 또는 성장을 할 때 남자는 최대한 가립니다. 반면 여성들은 신체를 드러냅니다. 그래서 결혼식에서 남자들은 더워도 짧은 소매 옷을 입지 않습니다. 반면 여자들은 겨울에도 뒤가 많이 파이고 팔이 없는 옷을 입습니다. 남성의 육체는 폭력을, 여성의 육체는 아름다움을 상징한다고 생각하나 봅니다.
왜 엉뚱하게 의상 이야기를 했냐구요? 유행 이야기를 하려구요. 저는 과학이 유행에 민감한 것이 아주 못마땅합니다. 그런데 전세계가 유행따라 과학을 한 지 오래되었고, 한국도 유행을 만들려고 기를 씁니다. 시대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르니 과학이라고 유행이 없을 수 없겠죠. 시류를 따름이 지나치면 유행이라는 휘발성 단어를 사용하지만, 변화된 요구에 부응하려는 시도라면 시대정신(Zeitgeist)이라는 멋있는 말을 사용합니다. 둘 사이의 차이를 굳이 말하자면, 전자는 변덕스럽고 후자는 진지합니다. 변화에 대한 성찰이 다각도로 조명되고, 사회적 논의가 활발해지면 유행도 시대정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갑자기 등장한 ‘4차산업혁명’이라는 신조어는 마치 기복 심한 사춘기적 감정처럼 갑자기 튀어나와 불안하게 돌아다닙니다. 알파고라는 프로그램에게 바둑황제가 뒤통수를 맞고나서 갑자기 유행하지 않았나요? 과학기술에서 4차 산업혁명이 진행되면, 사회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사람들은 여가가 늘고 평균소득이 줄지, 빈부차는 오히려 더 커질 지 등등의 고민이 있었나요? 제가 여태껏 본 겨우 한가지는 ‘로봇에게도 세금을 물리자’는 빌게이츠의 발언입니다. 수출에 강한 대한민국이, 사회 논의와 과학 주제는 언제나 바깥에서 수입됩니다. 미국이 하면 우리도 무조건 달려가고, 수출가능하면 뭐든지 팔려는 과잉의욕은 이제 좀 자중해야 합니다. 이미 한국은 상당히 컸는데, 아직도 우리는 멀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어른이라고 자신을 인정해야 어른이 되는 것이지, 나이가 먹었다고 자동으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른처럼 스스로 판단하여 결정하는 연습을 이제는 해야죠.
창피한 일이지만, 과학기술 유행의 흑역사를 한 번 짚어보려고 합니다. 한 20년 전에는, 자고 일어났더니 모든 제품에 ‘퍼지’라는 단어가 붙어있었습니다. 전기밥솥에도 퍼지가 붙어있기에 ‘밥이 잘 ‘퍼지’라고 퍼지라는 단어를 붙였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재개그는 제가 원조입니다.) 그 후에도 소소한 유행이 많았는데 결정타는 ‘나노’였습니다. 그 당시 ‘나노’가 안붙으면 프로젝트 제안서를 들이밀기도 민망했다고 합니다. 나노에 쏟아부운 돈과 성과를 대비한 보고서는 보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차분하게 나노가 진행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 다음에 분 바람은 ‘녹색’과 ‘융합’의 연합군 돌풍이었습니다. 이전 글들에서 ‘녹색’을 옹호했다시피 녹색은 유행이 아니라 시대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전전 정권에서 녹색은 결국 ‘녹조라떼 만들기’로 보고서가 마감되었습니다. 이것 역시 외국회사만 발빠르게 대응했습니다. 맥도날드는 자기들 로고에 노란 M자 글씨 밑 빨간색 바탕을 녹색으로, 색깔만 바꾸었습니다. 맥도날드가 녹색바탕에 걸맞는 조치를했다는 이야기는 못들었습니다. 새정치의 상징이던 모 융합대학원장님을 연상시키는 융합학과는 어떨까요? 관련학과 졸업생들은, 사회가 그들을 융합형 전방위 지식인이 아닌, 경계인으로 본다는 자조감을 말합니다. 비교적 오랜기간 유행이 지속되던 분야가 생명과학인데, 황우석 교수의 논문조작 사건으로 바람이 잦아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4차 산업혁명이 과학계 뉴스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아마 곧 거의 대부분의 가전제품에 ‘인공지능’이라는 말이 붙을 것 같습니다.
정권 따라 움직이는 과학은 시대정신이 아닙니다. ‘인간을 위한 기술’을 이라는 구호는 난무했지만, 세월호가 서서히 바닷물 아래로 사라져 갈 때 기술은 아무런 일도 못했습니다. 바깥에 살고있지만, 저는 이부분을 우리 과학기술의 치욕으로 지금껏 마음에 담고있습니다. 로봇 강국이라는 일본도 후쿠시마 사태 때 아무런 조치도 못했습니다. 과학기술은 생명과 안전 그리고 행복과 자유를 우선해야 합니다. 그 다음은 복지-교육 정도가 되겠죠. 돈을 버는 이유도 앞에서 말한 6가지를 위해서 입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흔한, 자기들 연구에 투자해야 국가가 재건된다는 각계 전문가들의 핏대올린 목소리가 싫어 저는 새정부에 어떤 것을 요구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과학기술계 내부인 우리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과학은 유행이 아닙니다. 과학은 자연을 이해하는 것이고 기술은 자연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굴러가는 자연이 그러하듯이 과학기술에 유행은 필요없습니다. 그럼에도 유행에 편승하여 잘나가는 분들은 열심히 하시길 바랍니다. 천박한 대중문화도 잘 이용하면 훨씬 더 효과적으로 의미있는 결과를 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유행에 뒤처진 분야를 연구하느라 어깨에 힘이 빠진 연구자들도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2003년의 대재해로 기록된, 우주왕복선 콜롬비아호의 폭발도 사소한 부품의 이탈 때문이라지 않습니까? 열손가락처럼 어디 하나 중요하지 않은 분야가 없습니다. 인생이나 유행이나 모두가 싸인 커브처럼 굴곡지는 것이니, 바닥과 정상 어디에 있든지 즐겁게 그리고 질기게 우리의 길을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