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은 동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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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인이 연로하신 부친을 모시고 병원에 가서 기다리는 과정을 쓴 칼럼을 인터넷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시인은 ‘기다린다는 말을 뜻으로 보면 분명 형용사일 터인데, 왜 동사인가?’를 묻고는, 종국에 가서는 결국 동사가 맞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기다리는 일”, 오은 시인)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는 이야기를 우리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이 말에 어울리는 상황은 미인계 또는 비밀리 이루어지는 협잡이나 은밀한 거래였습니다. 그렇게 밤이라는 이미지는 지나치게 감성적이거나 어두운 구석을 보여줍니다. 실제로 사랑이든 범죄든 대부분은 밤에 이루어지죠. 그런데 요즘 잠에 대한 연구를 해보면서 밤에 대한 생각이 좀 바뀌고 있습니다. 저는 나이가 들어가는데도 잠이 줄지가 않아 일찍 일어나기가 늘 어렵습니다. 비슷한 연배의 친구들은 도닦는 선승들처럼 새벽 4~5시면 눈이 떠진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일찍 일어날 수 있으면 얼마나 많은 일과 공부를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래서 잠에 대한 기사나 가벼운 논문들을 많이 보게 되었습니다. 내용 중 재미있는 것을 소개하면, 어떤 고래들은 물 속에서 무리를 이루어 수직으로 선 채로 하루에 불과 몇 분만 잠을 자고, 돌고래는 뇌가 두 개여서 하나씩 뇌가 번갈아 잠드는 방식으로 하루종일 사실상 깨어있다고 하는군요. 컴퓨터로 말하면, CPU를 두 개 가진 기종인 것입니다. 두 개의 뇌 사이에 소통은 문제가 없을 지 궁금합니다. 아니면 한 쪽 뇌는 본능적인 기능만 하고, 다른쪽 뇌는 좀 더 고등기능을 담당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낮 근무 뇌와 밤 근무 뇌 간에 인계인수는 매일 이루어져야겠죠.
생태계에서 먹이사슬 아래에 위치하는 동물은 잠을 깊게 그리고 길게 자기 어렵습니다. 잠을 많이 잘 수 있는 동물은 천적에게 쫓기지 않는 강자라는 이야기입니다. 의사를 만나서 아직도 잠을 많은 것이 고민이라고 했더니, 행복한 고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잠이란 어제를 리셋하고 내일을 새롭게 시작하게 해주는 창조적인 행위라고 하더군요. 지우는 것도 창조라는 주장은 좀 지나쳐보이고, 뭔가를 그리기 위해 지저분해진 종이를 깨끗하게 지우고 다시 준비한다는 것은 의미가 있어보입니다. 따지고 보면 낮은 어젯밤에 고민했던 것을 단지 행동에 옮기는 ‘근육 노동’의 시간일 지 모릅니다. 그러면 밤은 내일 행동할 모든 것을 결정하고 기획하는 ‘정신 노동’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살면서 큰 결정을 해야 할 때마다 얼마나 많은 밤을 고민으로 지새웠던가요? 낮에 모은 정보들과 사람들 말의 진위를 고민하고, 내일 결행할 액션이 ‘신의 한 수’가 될 지, 아니면 ‘장고 후의 악수’가 될 지를 수십번 시뮬레이션 해보는 것이죠. 그래서 차라리 근육이 피곤하여 정신 없이 잠들어야 하는 상황일 때가 오히려 마음이 편하고 행복합니다.
밤은 기다림으로 참으며 통과해야 하는 긴 터널이고, 잠은 우리 삶의 계획이며 기도이기도 합니다. 기다림이 형용사일 때는 삶이 편안할 때이지만, 동사일 때 진짜 우리 삶이 힘들고 중요할 때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잠이 쉼이 아니라, 몇 번을 갈아엎고 다시 기획하는 내일의 시나리오를 쓰는 시간일 때 언제나 우리 삶은 선택의 기로에 서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이런 격정과 염려를 그냥 즐겨야 한다고 생각해볼 수 없을까요? 지나고보면 그 불면의 시간들이 결국 나를 키웠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서정주는 자화상이라는 시에서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나이 때는 몰랐는데, 지금은 이 싯구가 너무 멋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기다림이다.’ 아니면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불면의 밤이다.’ 라고 바꾸어봐도 멋있을 것 같습니다.
권투에서 펀치만 좋다고 챔피언이 되는 것은 아니고, 맷집도 좋아야 합니다. 스피드가 빠르고 펀치도 좋은 선수들이 맷집이 약하면, 잘나가다가도 정말 맥없이 무너집니다. 경기라는 것이 자기는 한 대도 안맞고 상대를 때리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잘 견디는 사람이 최종적인 승자가 되지 않을까요? 잡다한 스트레스가 많은 세상이어서, 사람들은 기다림도 싫어하고 불면도 괴로워 합니다만, 우리 삶을 업그레이드 해주는 것이 이런 형용사 같은 동사들이 아닐까 합니다. 실험이 너무 고되고 데이터가 잘 안나온다구요? 프로그램이 잘 안도는데,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구요? 일단 오늘은 잊어버리고 일찍 주무세요. 좋은 방법이 꿈에 현몽할 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내일 차분하게 참고 잘 견디면 결과도 서서히 당신 편으로 돌아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