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는 새로운 바람, 융합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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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는 흐름이 빨라서 언제나 에너지가 넘쳐보입니다. 빠른 흐름을 따라가기에는 내 다리가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재미있는 현상은 연구분야에서도 유행의 흐름이 너무 빠르다는 것입니다.
한 20년 전에는 퍼지가 안들어가는 연구제목이 없었는데, 이제는 IT나 바이오 또는 나노라는 말이 빠지면 구닥다리 취급을 당합니다. 그러다가 이제는 융합이라는 말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융합이란, 말 그대로 여러 개를 동시에 연구한다는 것이지요.
원조는 역시 수학-과학과 철학을 동시에 다루었던 그리스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일 것이니, 사실 융합은 원시학문시절부터 있었던 자연스런 세계관입니다.
그러다가 중세 암흑시기를 지나 위대한 융합연구자인 파스칼(1623-1662)이 등장합니다. 수학, 과학, 철학의 세가지 교과서에 동시에 이름이 나오는 사람이죠.
컴퓨터의 원조도 파스칼의 계산기라고 보는 사람도 많지만, 위대한 철학 저서 팡세를 모르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학문이 융성하던 20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사람들이 분야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디테일이 많아지면서 종합적인 시야로는 전문성을 가지기가 어려워진 것이지요.
이때부터 우리는 다른 과목 교과서에 동시에 이름이 나오는 사람들을 더 이상 볼 수 없어집니다. 학문이 넓이보다는 깊이쪽으로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넓을 박'자를 쓰는 박사학위는 이제 '얇을 박'자로 바꾸어야 할 판입니다. 조지훈의 시 '승무'에 나오는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라는 구절 속의 '박'자 말입니다.
요즘 새삼스럽게 융합이라는 말을 접하게 되어 기분이 묘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겪은 슬픈 추억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석사까지는 기계공학을 전공했는데, 박사학위는 전기공학을 했습니다. 전기모터 속 전자기장을 수치해석으로 계산하는 전공을 했습니다.
프랑스에서 학위를 마치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처음 일을 시작했을 때, 한국에서 교수로 있는 친구가 안식년을 나와서 같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귀국할 마음은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대학에 갈만한 자리가 있는지를 그 친구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자기 몸값을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발동했던 것이죠. 아마도 복수전공이면 두 배로 갈 자리가 많을 것이라는 오만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아주 냉혹했습니다.
한국에서 교수를 선발할 때, 나처럼 전공을 바꾼 사람들은 '칠거지악'에 해당된다고 하더군요. 마누라를 내어쫓을 수 있는 합당한 이유 7가지 말입니다.
아마 그 중에 하나를 고른다면 제 경우는 '행실이 음탕한 죄'에 해당할 것 같습니다. 전공을 옮겨 다닌 것은, 남편 놔 두고 음탕하게 다른 남정네랑 서방질한 것이겠죠?
지금 융합을 논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융합보다는 한가지 외곬 연구로 유명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 말에도 있지 않습니까? 한우물을 파야 한다고. 한우물 파기에 당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한가지 메뉴로는 장사가 안되니, 간판을 바꿔달려는 것입니다. 설렁탕만 하던 집에서, 요리사는 안 바꾸고 비프스테이크나 스파게티도 된다는 메뉴부터 내보이는 것이죠.
사실 여태껏 우리나라에서는 전공이 너무 중요해서 융합이 설 자리가 없었죠.
대학 시절에 가방만 들고 다녔던 사람들이 태반인데도 항상 전공이 뭐냐고 묻지 않습니까?
전공이 없으면, 소속 없는 운동선수나 고향 없는 후레자식 신세가 됩니다.
학벌을 묻고 싶을 때도 “대학은 나왔수?“라는 말이 너무 직접적이니, 대신 학번이나 전공을 묻습니다.
전공에 집착하는 것은 자기 전공의 잣대로 보고 싶은 것만 보겠다는 것이니, 편협적이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런 편협성에 아랑곳 없이 학문은 베풀기 보다 자기 권위를 보호하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을 해왔습니다.
홍익인간의 넓은 목표보다는 동일업종 경쟁자들보다 우위를 점해야 한다는 좁은 시각으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관심도 없는 지엽적인 논문을 쓰고 그 숫자로 도토리 키재기 하는 것이 학계의 현실입니다. 하지만 이제 그런 분위기의 연구는 점점 사회와 시장의 외면을 받고 있다는 것에 점점 위기감을 느끼게 된 것이지요. 이런 빠른 분위기 파악이 사실 한국의 힘입니다.
아직 융합연구가 피상적으로 느껴지는 분들을 위해 한가지 예를 든다면, 컴퓨터 공학과를 들 수 있습니다. 컴퓨터 초창기에는 프로그램은 수학하는 사람들이 했고, 하드웨어는 전자공학자들이 만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에 대한 동시적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컴퓨터 공학과가 만들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컴퓨터공학은 학문적 분류가 아닌, 시장의 요구에 의해, 제품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최초의 융합연구학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서서히 자동차학과라는 것도 생기고 있습니다. 전자기술과 기계기술이 접목된 자동차라는 제품에 학문을 맞추는 실사구시적 접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현장 엔지니어로 일할 때 경험한 것입니다만, 기계가 고장 나서 보수과 직원을 부르면 기계담당 수리자가 와서 기계 쪽은 이상이 없다고 하고 그냥 갑니다. 다시 전자부품 수리 담당자가 와서 보고는 전자 쪽도 문제가 없답니다.
납기는 임박했는데 고가의 장비가 서 있으니, 비싼 줄 알면서도 도리 없이 독일 쪽 엔지니어를 불렀습니다. 뭐 전문인지를 물었더니, 전자니 기계니 하는 말은 없고 그냥 수리전문이라고 하더군요. 와서 별 일도 안하고 기계를 돌려놓고 여기저기 소리를 들으며 왔다갔다 하더니 말끔하게 고쳐놓고 갔습니다.
이 사람은 학문적 체계가 아니라, 문제해결 중심으로 공부하고 훈련받은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융합이니 통섭이니 구호만 외칠 것 없고, 우선은 복수전공을 장려하는 방식으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이미 한 전공으로 고착된 구세대 교수님들부터 융합연구로 장사한다고 나서봐야 먹을 것 없는 소문만 잔치가 되기 쉽습니다. 그리고 무전공은 너무 오버한 융합이라고 생각합니다.
두 개에서 세 개 정도를 전공하며 대학을 일년 더 다니게 하는 것, 아니면 석사논문 대신에 다른 학과에서 일 년 동안 석사를 하나 더 하게 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융합연구도 씨를 뿌리고 가꾸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당장 뭐를 하겠다고 허둥대서는 돈과 시간만 낭비하고 미니 스커트나 나팔 바지 같은 유행처럼 그냥 지나가 버릴 것입니다.
융합연구는 훌륭한 연구나 제품을 만들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과학기술자들의 넓은 시야와 풍성한 삶을 위해서도 너무 중요한 '복지정책'입니다.
너무 좋은 글을 올려주셨네요.
어느 학자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외국 모 대학에서 열심히 연구하는 대학원생을 보고 칭찬을 했더니, 그 지도 교수님의 대답이 "그 친구는 자신이 하는 것이 뭔지도 모르고 하고 있어요."
영국의 콜링우드는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학문에 대해 철학적 탐구를 해보지 않은 과학자는 조수나 모방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래 책에서 과학하는 철학자를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뇌과학과 철학,
과학적 사고에 날개를 달아주는 철학의 나무
전공 한 가지만 잘 하면 된다고 생각 하던 저에게
좋은 것을 일깨워 주셨네요.
글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