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휘소박사에 관한 숨겨진 진실
2002-02-26
신동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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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입자가속기가 있는 페르미연구소에서 서쪽으로 약 2백㎞ 떨어진 일리노이주의 80번 고속도로. 평소처럼 한산했지만, 안개끼고 노면이 젖어 있었다. 55마일의 속도로 1차선을 따라 달리던 대형 트레일러가 갑자기 소리를 냈지만 운전사는 타이어가 펑크난지 몰랐다. 차가 오른쪽으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바로 잡으려 했으나, 이번엔 왼쪽으로 미끄러졌다. 커브길에서 트레일러는 움푹 파인 폭 20m의 중앙분리 잔디대를 넘어 마주오던 승용차와 충돌했다.
이 충돌 사고로 반대편에서 승용차를 몰고오던 이휘소 박사(당시 42세·페르미연구소 이론물리부장)는 앞 유리창을 지탱하는 철제 창틀에 머리를 부딛쳐 병원에 옮겼을 때는 이미 숨져있었다. 뒷자리에 탔던 부인 매리언(중국계)과 딸 아이린은 경상을 입었고, 아들 죠프리는 상처가 약간 깊었지만 큰 부상은 아니었다.
일리노이주 경찰청이 보관하고 있는 당시의 사고 기록이다. 77년 6월 16일 오후 1시 22분에 일어난 일이었다. 소식을 듣고 미국 각지에서 달려온 한국인 물리학자들과 페르미연구소 동료들에 의해 이 박사는 시카고 교외의 글렌엘렌 공원묘지에 묻혔다.
비운의 물리학자 이휘소(미국이름 벤자민 리)가 교통 사고로 세상을 뜬지가 벌써 25년이나 됐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휘소에게 참배하려고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를 찾는 사람이 끊이지 않고 있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를 읽고 이 박사가 정말 국립묘지에 묻힌 줄 알고 오는 사람들이다”고 국립묘지 민원실 관계자는 말한다.
지난 89년 공석하씨가 <핵물리학자 이휘소>란 전기를 지어내고, 이를 토대로 김진명씨가 쓴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4백만부 넘게 팔리고, 영화까지 나오면서 실제와 다르게 재창조된 인물이 국민들의 머리 속에 각인된 것이다.
<핵물리학자 이휘소>는 이 박사가 핵무기 설계도를 다리 뼈 속에 넣어 박 대통령에게 전달한 것을 알게된 미국 정보기관이 교통사고를 가장해 그를 살해 했다는 내용이다. 이휘소의 모델 소설 <무궁화꽃…>은 미국 정보기관의 사주를 받은 중앙정보부가 폭력집단을 고용해, 플루토늄을 국내에 들여온 한 물리학자를 청와대 뒷산에서 살해하지만, 박 대통령은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훈장을 주고 동작동 국립묘지에 묻었다는 줄거리를 담고 있다.
그러나 이 박사를 잘 아는 동료 물리학자들 그리고 함께 사고를 당했던 가족은 작가들이 돈벌려고 꾸며낸 허무맹랑한 얘기라며, 맞아 일그러진 고인의 모습을 복원하려는 노력을 벌이고 있다.
이 박사의 부인과 자녀는 <무궁화꽃…><핵물리학자 이휘소><소설 이휘소>가 고인의 명예를 훼손했다며 작가와 출판사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내기도 했다. 부인 매리언은 “정말 비극적인 죽음이었지만, 단순한 교통사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며 “조국과 과학을 사랑하는 한국인들에게 이 박사를 전혀 왜곡된 모습으로 알게 만드는 것은 고인에 대한 최대의 모욕이자 진실에 대한 부끄러운 훼손”이라 말하고 있다. 매리언은 소송 이익금을 기부해 ‘이휘소 장학금’을 만들기를 희망하고 있다.
작가들도 소설이 창작한 것임은 인정하고 있다. 공석하씨는 “<핵물리학자…>의 내용 가운데 핵 개발 참여, 박대통령의 친서 등은 창작한 것이어서, 회수하고 <소설 이휘소>를 다시 썼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부 잡지들은 핵무기 개발 선언으로 한·미 긴장이 고조됐을 때 교통 사고가 났다는 점을 들어 여전히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박사가 핵 개발에 참여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이 박사를 아는 국내 물리학자들은 한결같이 이휘소가 핵물리학자가 아니라 소립자 물리학자로, 핵무기 개발에 도움이 안되는 사람이라는 점을 우선 강조한다. 서울대 조용민 교수(물리학)는 “이 박사는 양성자·중성자를 이루는 쿼크 등 기본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연구하는 소립자 순수이론물리학자로 핵무기와는 정말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미국 브라운대 강경식 교수(물리학)는 “원폭을 만들었던 맨하탄 프로젝트의 비밀이 해제돼 당시 미국에서는 물리학과 대학원 졸업생 정도의 수준이면 핵무기 설계는 할 수 있었다”며 “그러나 실제 핵무기를 만들려면 수백명의 핵공학자·기술자·실험물리학자가 수억 달러의 돈을 들여 여러번 시행착오를 반복해야 하므로, 천재 이론물리학자가 혼자서 만들 수 있는게 절대 아니다”고 설명한다.
이 박사가 죽기 며칠 전까지 페르미연구소에서 두 달 간 함께 일했고, 장례식에도 참석했던 강 교수는 “교통 사고 직후 한국인 물리학자들이 여러명 모여 사고 경위를 따졌지만, 의문사의 가능성은 당시 누구도 제기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강 교수는 소설에 대해 “이 박사를 몰라도 정말 모르고 하는 얘기다”며 70년대에 두차례 이 박사에게 모국방문 학술대회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가 ‘나는 군사독재와 상대 안한다’며 잘라 말해 무안당했던 경험담을 전한다.
뉴욕주립대 교수였던 이 박사가 72년 1월 6일 당시 한국과학원 부원장이었던 정근모 박사에게 보낸 편지는 귀국 강연 요청을 정치적 이유로 거절하고 있다. 이 편지는 이 박사의 유일한 제자인 강주상 교수(고려대)가 공개한 것이다.
“위수령 발동, 학생운동 탄압 등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로 우리가 추진해온 하계 대학원 행사를 재고합니다. 하계 대학원의 책임을 맡는다면 내가 한국의 현정권과 그 억 정책을 지지하는 것으로 비쳐질까 걱정됩니다… 한국의 과학 발전을 위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원칙을 무시하는 이러한 처사들에 실망해 반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싶습니다. 한국정부에서 이에 관한 초청이 오더라도 수락하지 않을 결심입니다.”
이처럼 적대적인 감정을 품고 있었던 박정희 독재 정권을 도와 핵무기를 개발했다는 것은 평소 그의 행적으로 보아 납득하기 어렵다. 어렸을 적부터 이 박사를 잘 알고지낸 정근모 전 과기처 장관도 소설에 대해 “황당무개한 얘기다”며 “이 박사는 요리가 취미였던 가정적인 사람”이라고 말한다. 73년 이휘소는 일본의 초청을 받아 토쿄에 와 한국에 올 기회가 있었지만, 보복당할 것을 우려해 어머니를 일본으로 오라고해서 만나기도 했다. 이 박사의 어머니인 박순희(83·서울 은평구 대조동)씨는 “유신에 반대하기 때문에 한국에 올 수 없다며 심각한 표정으로 말하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밝힌다.
54년 미국 유학길에 올라 사고를 당하기까지 23년 동안 이 박사가 한국에 온 것은 74년 9월 딱 한번 뿐이다. 그는 서울대 자연과학대학원 육성을 위한 AID차관 타당성 평가를 위해 미국 국무부 평가단의 일원으로 와서 한달 동안 한국에 머물렀다. 공석하씨는 이 때 이 박사가 박대통령을 만났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한달 동안 매일 함께 다녔던 서울대 김제완 교수(물리학)는 “이 박사는 한 달 내내 한남동의 미8군 영내에서 숙식을 했다. 평가단 일행과 함께 민관식 교육부장관을 만난 것 외에 고위관리는 접촉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박사가 독재를 비판하고 한국정부와 의도적으로 멀리했던 것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풍토 속에서 살았던 탓도 지만, 존경했던 물리학자 오펜하이머와 양첸닝 교수의 영향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박사는 60년대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있을 당시 소장이었던 오펜하이머 박사가 자주 불러 점심 식사를 함께 했던 말 벗이었다. 원폭을 개발한 오펜하이머는 수소폭탄 개발을 거부해 54년 모든 공직에서 쫓겨났으며, 매카시 열풍 속에 공산주의자로까지 낙인찍혀 불행한 말년을 보내면서 젊은 이 박사와 적지 않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서울대 조용민 교수(물리학과)는 “이 박사는 노벨상을 탄 중국계 물리학자인 양첸닝 박사의 도움을 많이 받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며 “모택동이 개방 정책을 취하면서 먼저 부른 사람이 양 박사였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전쟁의 상처가 할퀴고간 조국을 등지고 떠난 지 20년만인 74년 한국에 와서 발전된 모습을 본 뒤로는 한국에 대한 이 박사의 생각도 상당히 달라졌던 것으로 동료 물리학자들은 말하고 있다. 그는 78년 8월에 서울대에서 열릴 소립자물리학 하계 대학원에 다시 연사로 참석키로 돼있었는데 그만 다시 조국에 오지 못하고 교통 사고로 숨지고 말았다. 이에 따라 하계 대학원은 ‘벤자민 리 추모 심포지움’으로 바뀌어 열렸다.
이 박사의 생전 업적 가운데 누가 뭐라해도 확실히 노벨상을 탈 만한 독창적인 업적은 없었다는게 국내 물리학자들의 대체적 평가이다. 그러나 그의 연구가 원숙하게 무르익고 있었기 때문에 참변만 당하지 않았더라면 노벨상 수상 가능성이 높았다고 입을 모은다.
실제 그는 70년대 들어 노벨상을 염두에 둔 듯한 편지를 어머니에게 보내기도 했다. 서울대 김제완 교수(물리학)는 “미국에서는 학회의 학술발표가 끝 난 뒤 물리학의 대가들이 종합평가를 하는데, 이 박사는 종합평가자가 된 유일한 한국인이었다”고 말한다.
74년 박사가 한국에 왔을 때 함께 지냈던 김 교수는 “내가 거의 2주일에 걸쳐 계산한 결과를 이 박사는 흑판에서 단 5분만에 계산했다”면서 거의 수학 능력에 혀를 내둘렀다.
강경식 교수는 “이 박사는 까다롭고 지루하도록 긴 계산을 끝까지 해낼 수 있는 수학적 기교를 터득한 물리학자였고, 추상적이면서 기교적인 것처럼 보이느 이론이 실험 현상과 어떤 관계에 있는가를 잘 포착했다”고 말했다.
77년 이 박사의 장례식에서 페르미연구소 윌슨 소장도 “페르미 박사 처럼 이휘소는 추상적이고 비밀스런 이론을 추구하면서도 실험 결과를 잘 식별하고 이해하는 특기를 가진 물리학자였다. 20명의 현대 이론 물리학자 대열에 낄 인물이다.”고 평가했다.
이 박사의 사망 직후 재미 물리학자들과 한국물리학회는 훈장 추서를 건의해 최형섭 과기처장관으로부터 어머니가 동백장을 대신 받았다. 그러나 부인 매리언은 유신 체제의 한국 기관에서 경비를 부담하는 초청에 응할 수 없다며 불참했다.
78년 ‘벤자민 리 추모 심포지엄’을 열었던 서울대는 과학기술처의 지원을 받아 79년과 80년에 두차례에 걸쳐 양첸닝 교수 등 노벨상 수상자를 연사로 초청해 이휘소 추모 학술대회를 가졌으나, 5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이 행사도 중단돼 버렸다.
이휘소는 1935년 의사 부부인 이봉춘씨와 박순희씨의 3남 1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52년 경기고 2학년 때 검정고시로 서울대 화공과에 수석입한한 그는 물리학에 더 흥미를 느껴 54년 미국 마이애미대학으로 유학하면서 물리학으로 전공을 바꿨다. 이회창·이홍구씨는 그의 경기고 동기이다.
그는 미 공군부인회가 주는 유학생에게 주는 선발 시험에서도 1등을 했으나, 일본 학생과 한국학생의 장학금 액수를 차별하는 데 항의해 장하고 장학금 수혜를 포기하고 부모에게 돈을 받아 유학을 떠났다.
58년에 핏츠버그대에서 석사학위, 60년에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이론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59년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치른 박사논문자격시험에서 그는 평균 93점을 받아 차석의 71점을 22점이나 앞지르면서 이 대학 역사상 최고의 점수를 받아 화제를 낳기도 했다.
그는 박사학위를 끝내기 이전에 벌써 산란이론을 응용한 소립자 사이의 산란현상에 대한 6편의 논문을 물리학 최고의 권위지인 <피지컬 리뷰 레터스> 등에 발표하기도 했다.
60년 박사학위를 마친 뒤 조교수 생활을 시작한 이휘소는 28세에 펜실베이니아대 정교수가 또 한 번 주위를 놀라게 했다. 62년 의학을 전공한 중국계 여성인 매리안과 결혼했다. 천재들만 모인다는 프린스턴고등연구소(아인슈타인을 위해 만든 연구소임)에 있었던 65년에 그는 연구원들을 이끌고 매달 한편씩 <피지컬 리뷰 레터스>에 논문을 발표해 오펜하이머 소장의 총애를 받기도 했다.
노벨상 수상자인 양첸닝 교수의 권유에 따라 66년 새로 설립된 뉴욕주립대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이 때부터 파리대, 캘리포니아공대, 유럽핵공동연구소(CERN), 쿄토대의 객원 교수로 초청받는 등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강연과 토론을 했다.
특히 그는 72년 ‘게이지이론의 재규격화’ 논문을 통해 소립자의 전자기력과 약작용력을 통합하는 게이지 이론을 확고히 증명해 세계 정상급 소립자 물리학자의 위치를 확고히 굳혔다. 73년 이 박사가 <피직스 리포트>에 출판한 1백번째 종합논문 ‘게이지 이론’은 이 분야의 독보적인 단행본으로, 모든 소립자 물리학자들이 꼭 갖추어야 할 논문이다. 그는 생전에 1백38편의 쟁쟁한 논문을 발표했다.
시카고 근교에 당시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였던 직경 2㎞의 짜리 자가속기 ‘테바트론’이 완성되면서 그는 73년 이 연구소의 이론물리부장으로 취임했고 시카고대 교수를 겸임했다. 페르미연구소 소장과 부소장은 실험 결과에 대한 이론적 자문 뿐 아니라 가속기 실험 계획을 짜는데도 이 박사의 의견을 꼭 들을 만큼 이 연구소에서 그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74년 이 박사는 당시에 존재가 예언됐던 매혹입자의 성질과 질량을 계산하는 논문을 썼는 데 바로 얼마 뒤 그가 예측한 매혹입자가 발견돼 화제를 낳았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버릇을 가진 이 박사는 77년 6월 16일도 새벽3시까지 연구에 몰두하다가 11시께 깨어났다. 이날 그는 페르미연구소의 과학정책회의에 참석할 겸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가족을 승용차에 태우고 시카고 근교의 집을 떠나 콜로라도주의 애스펜으로 가던 중 트레일러와 충돌해 한창 피어날 4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박사의 사망 이후 페르미연구소 등의 친구와 동료들은 가족의 생활을 위해 상당한 돈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부인 매리언은 이 돈을 남편의 모교인 오하이오주 마이애미대학에 기증해 ‘벤자민 휘소 리 장학금’으로 물리학과 학생들에게 지급되고 있다.
이휘소가 세상을 떠난 뒤 20년 동안 한국의 경제력과 과학기술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당시 이 박사의 명성에 근접한 한국인 물리학자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박사가 특출나기도 했지만, 우리의 교육에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이 박사의 유일한 제자인 강주상 교수가 스승의 25주기를 맞아 던지는 질문이다.
<이휘소 박사의 업적>
물리학은 가장 폭넓게 우주의 삼라만상을 다루고 있다. 태초에 우주가 생성돼 지금까지 진화해온 과정과, 물질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립자들 사이의 상호 작용을 알려는 것이다. 물리학도의 궁극적 목표는 통일된 원리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려는 것인 데, 이휘소 선생은 이 방면에서 선구적 대열에 있었던 역사적 이론물리학자 가운데 한 분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기본입자들은 각각 6종류의 쿼크와 경입자 그리고 게이지 입자들이다. 이들이 결합하고 상호작용을 함으로써 우주의 모든 물질이 구성되는 것으로 물리학자들은 믿고 있다.
현재 알려져 있는 힘은 네가지 종류가 있다. 물체를 땅에 떨어지게 하거나 지구를 태양 주위에 돌게 하는 힘은 중력으로, 흔히 만유인력이라고도 한다. 전기나 자성을 가진 물체들 사이의 상호 작용이나 빛 현상을 설명하는 것은 전자기력이다. 한편 원자핵이 형성되도록 핵자간에 작용하는 강한 힘을 핵력이라 하고, 원자핵의 베타 붕괴에서 볼 수 있는 약작용력이 있다.
코페르니쿠스의 천동설을 근거로 하늘의 천체운동에 관한 케플러법칙과 땅 위에서의 물체운동에 대한 갈릴레오의 운동법칙을 통일한 것은 뉴튼의 만유인력이다. 19세기 중반에 맥스웰은 전기·자기·광학적 현상을 함께 설명할 수 있는 전자기 이론을 만들어내 현대 전기 문명의 기반을 닦아 놓았다. 아인슈타인은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일장 이론으로 설명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힘의 통일은 67년 와인버그, 살람, 글라쇼가 네가지 힘 가운데 전자기력과 약작용력 두가지 힘을 먼저 통합함으로써 큰 틀이 마련됐다. 이는 게이지이론의 자발적 대칭 파괴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러나 실험적으로 타당한 이론이 되기에는 재규격화라는 큰 난제가 있었다. 이것은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진공’이 실제로는 ‘무한대’가 되어 모순이 되지만, 관계되는 물리량들을 다시 규격화함으로써 유한한 상태를 얻는다는 다소 철학적이면서도 기술적인 문제였다.
당시에 이미 물리학자들은 전자기력의 ‘재규격화’라는 과정을 통해 양자전자기 현상을 엄청난 정밀도로 예측할 수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서울∼부산 간의 거리를 종이 한장 두께의 1백분의 1 정도까지 재는 것에 견줄 정도 였다.
그러나 전자기력과 약작용력을 통합하는 게이지이론의 재규격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두가지 힘을 통일하는 게이지이론의 재규격화는 마침내 70년대 초에 해결되었는데, 특히 이휘소 박사가 72년에 발표한 ‘게이지 이론의 재규격화’ 논문을 통해 대칭이 파괴되는 게이지이론을 정연한 수학적 논리로 증명함으로써 이 방면에서 세계적으로 다섯 손가락에 들 정도의 큰 기여를 하였다.
게이지이론의 재규격화는 인간이 자연을 더욱 깊이 이해하는 데 커다란 역사적 이정표가 되었다. 이에따라 게이지이론을 제창한 와인버그 등 3명은 79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다.
그 뒤 두가지 힘 외에 강작용력까지 세가지 힘을 통일하는 ‘표준 모형’이 완성되었고 세계 각국에서 고에너지 입자가속기를 이용해 검증작업을 진행 중이다. 한편 중력까지 포함해 네가지 모든 힘을 모두 설명하는 대통일이론도 활발히 연구되고 있다.
이휘소 선생의 다른 큰 업적은 매혹 쿼크로 구성된 새로운 소립자의 이론적 예측이다. 당시에는 위, 아래, 기묘 등 3가지 종류의 쿼크만 알려져 있었는데, 어떤 소립자가 아주 드물게 붕괴하는 현상은 매혹이란 새로운 쿼크의 존재를 가상해야만 설명될 수 있다는 이론이 70년대 초 글라쇼 등에 의해 제기됐다.
이휘소 선생은 74년에 쓴 ‘매혹 입자들의 탐색’이란 논문을 통해 이들 입자를 어떻게 찾아낼 수 있는지, 또 어떤 성질을 갖고 있는지를 치밀하게 계산해 예언했다. 몇 달 뒤 이 선생의 언대로 매혹 쿼크의 결합상 인 차모니움이란 새로운 소립자가 발견됐다.
이로 인해 이 선생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고, 노벨상 후보에 올랐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실제로 2년 뒤인 76년에 이 새로운 소립자를 발견한 두 그룹의 대표들인 팅과 리히터가 노벨상을 수상했다.
77년 향년 42세로 교통사고를 당하여 세상을 떠났을 때 영결식에서 당시 페르미연구소장 윌슨 박사는 이휘소 선생이 당시 세계적으로 20위 이내에 드는 훌륭한 이론물리학자라고 극찬을 했다. 비운의 운명을 맞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노벨상을 받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고 이휘소(Benjamin W. Lee) 박사의 약력
1935. 1. 1 서울生
1977. 6. 16 교통사고로 타계
학 력
1953 서울대학교 화공학과 입학
1955 미국 유학
1956 Ohio주 Miami 대학 졸업(이학사)
1958 University of Pittsburgh 대학원 졸업 (이학석사)
1960 University of Pennsylvania 대학원 졸업 (이학박사)
경 력
1960~66 University of Pennsylvania 물리학과 교수
Princeton, Institute of Advanced Study 연구원
1966~73 뉴욕 주립대학 (Stony Brook) 물리학과 교수
1973~77 Fermi National Accelerator Laboratory 이론물리학부장
University of Chicago 물리학과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