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나눠주는 환경 지킴이
2002-11-25
조강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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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더미에서도 꽃을 피울 수 있답니다”
다국적 기업의 직원과 밭을 가는 농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개의 직업을 조화롭게 유지하며 살아가는 최광진(38)씨의 삶에 대한 관점은 평범하면서도 독특하다.
주중에는 경기도 평택 공단에 입주해 있는 미국의 다국적 기업 세트코 코리아의 직원으로서 열심히 일한다.이 회사의 창립 멤버로,올해 1월 회사가 낯선 한국 땅에 닻을 내리는 데 일조했다.그만큼 회사에 대한 애정도 각별하다.세트코 코리아는 세계 여러 나라에 20여곳의 지사가 있다.쓰레기매립장이나 신공항 건설 등에 긴요한 제품들을 생산한다.쓰레기 더미에서 흘러나온 오폐수가 땅으로 들어가는 걸 막는 차단막이나 공항에 바닷물이 스며들지 않게 하는 차수재 등이 그것.최씨는 “10여년 전 서울에서 개인 사업을 하다 실패한 뒤 처음 취직한 공장도 세트코 코리아 처럼 친환경적인 제품을 만드는 회사였다”고 말했다.
최씨는 주말이면‘변신’한다.밭농사를 짓는‘흙투성이 농부‘로 탈바꿈하는 것이다.그가 나이 드신 홀어머니와 함께 기르는 작물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콩, 마늘, 고추, 들깨 등등이 최씨 모자의 정성을 먹고 쑥쑥 자란다.
최씨가 환경보호론자가 된 게 우연이 아님을 보여주는 대목이다.그는“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다 보면 검은 비닐이 쉽게 눈에 띈다.그게 생활에 굉장히 요긴하다.잡초 제거 효과도 있고 고추 등의 씨를 뿌리기 전에 이 검은 비닐을 덮으면 보온효과가 있다.하지만 작물을 수확하고 나면 병충해가 기생하기 때문에 거둬서 불에 태워야 한다.그런데 그냥 방치하는 집들이 적지 않다”고 안타까워했다.
밭일은 홀어머니를 도와주는 차원에서 계속하고 있다.평택 시내에 괜찮은 아파트도 마련했지만 노모가 시골에 살기를 원해 도시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는 그다.충남 아산시 둔포면.아산 방조제에서 10분 거리에 최씨 모자의 시골집이 있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착했던 그가 소년소녀 가장을 돕게 된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게 다가온다.인터넷 동호회 ‘물망초’를 무대로 한 소년소녀가장돕기는 코센을 무대로 서핑할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을 그에게 선사한다.물망초의 꽃말은‘돈 포켓 미(나를 잊지 마세요)’.유독 가슴을 찡하게 하는 단어다.물망초는 1992년 6월 25일 하이텔이 출범할 때 같이 닻을 올렸다.최씨는 94년부터 가입했다.사업 실패 후 충북 음성에 있는 회사에 다니던 시절.컴퓨터 통신이 거의 유일한 낙이었을 때 인터넷에서 물망초 사이트를 보고 취지에 공감해 열성적인 회원이 됐다.
물망초는 지난 10월에 서울 광화문의 한 호프집을 빌려서 연‘소년소녀가장돕기 일일호프’행사를 열었다.동호회의 연례 행사로 수익금은 전액 적립돼 소년소녀가장들의 후원금으로 쓰인다.올해는 약 3백만원 정도의 순익을 냈다.이는 작년, 재작년에 4-5백만원을 벌었던 것에 비하면 크게 준 것이라고 한다.하이텔의 기타동호회나 난초동호회 등이 연주회나 전시회를 열어서 모은 수익금 일부를 보태줬는데 올해는 그게 없었기 때문이다.적립 기금의 수혜자는 현재 13명.이들의 보호자에게 통장을 만들어 주고 한달에 한 가정당 12-13만원씩 지원한다.
“동호회에 가입한지 2-3년되는 회원들이 주축이 돼서 하고요.저는 뒤에서 돕는 일을 합니다”
참 좋은 일을 하신다고 추어주자 겸손의 말씀이 어김없이 돌아온다. 하지만 그는 올해는 이 행사에 참석하지 못했다.갑자기 몸을 다쳤기 때문이다.“행사에 참석 못해 너무 아쉽다”고 그는 말했다.
최씨와 KOSEN과의 인연은 대학(충북대 미생물 유전학과)친구들 덕분에 시작됐다.KOSEN에 들어가면 여러 가지 과학기술정보가 있다는 말에 솔깃해져 그닥 인터넷 사이트로 접속했다는 것이다.회사 제품 개선의 기술적인 측면과 관련해 유용한 정보들을 찾기 시작하면서 코센에 푹 빠져들었다.
지금 가장 애착을 갖고 있는 커뮤니티는‘날아라 책방’이다.한마디로 '눈앞에 보이는 도서관’이 아니고 ‘온라인 도서관’이다.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코센 회원들이 소중한 책을 돌려볼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들락날락하면서 인사말을 적는 등 흔적을 남기는 정도”라고 겸손하게 말했지만 실상은 다르다.그는 아이디‘블루 코어(푸른 심장)’인 시샵과 함께 활동하는 4명의 부시샵 가운데 한 사람이다.프랑스에사는 시샵 곽지혜씨와 미국의 일부 회원들과 커뮤니티를 개설한지 2개월 남짓되는 기간에 두권을 보내고 세권을 받아 보았다고 한다.자신이 읽고 싶다고 신청한 소설가 이외수의 ‘외뿔'을 독일의 이승미씨에게서,칼린 지브란의 ‘세월’을 곽시샵으로부터 받았을 때 무척 기뻤다고 한다.두 책이 모두 여행 다닐 때 배낭에 넣고 다니며 읽으면 좋을 듯하다고 독서를 권유하는 순진함에서 그가 때묻지 않은 심성의 소유자임을 쉽게 읽을 수 있다.
“心不負人 面無懺色”-마음에 거리낌이 없으면 얼굴에 부끄러운 빛이 나타나지 않는다.좌우명이 뭐냐고 묻자 그가 가장 좋아하는‘명심보감’의 글귀 하나를 꺼냈다.최씨는 “서울에서 사업할 때 대기업 사옥 앞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사원들이 출근할 때 보면 휴지가 바람에 날려도 대부분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바빠 신경쓰지 않더라고요.그런데 어떤 분이 허리 굽혀 줍는 걸 봤어요.그 때 갖고 있던 기억이 나중에 명심보감의 이 구절을 읽을 때 파노라마처럼 떠오르데요.” 마음의 욕심을 버리고 물 흐르듯 순리대로 살아가겠다는 그의 다짐이 실린 ‘글 이상의 무엇’같이 느껴졌다.
짐작했겠지만 최씨는 아직 미혼이다.그에게 결혼은 초미의 관심사다.KOSEN의‘광장카페’에서 선남선녀를 짝지어주는 캠페인을 할 때 간단한 자기 소개도 올렸을 정도다.하지만 여유를 잃지 않고 너스레를 떤다.“다 준비가 됐는데 신부가 없네요.바쁘게 살다 보니 못 갔는
데 이제는 장가가는 일이 골칫거리예요”
그에게서 삶을 느리게 사는 법을 아는,쓰레기더미 속에서도 꽃을 피우는 법을 알 것만 같은 구수한 사람의 향기를 맡아내는 것도 하나의 행복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