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공돌이' 전창훈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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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회원님의 소개와 학창시절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이름은 전창훈, 1960년생입니다. 지금은 미국 뉴저지 프린스턴에 8년째 살고 있습니다. 저는 모범생 이공계 종사자들과는 달리 ‘날라리’ 기질이 심해서 잡기가 많아요. 하지만 요즈음은 다 끊고 테니스와 글쓰기만 계속하고 있습니다. 가끔 강연을 나가는 적도 있는데, 미국에 살다 보니 오라는 데가 그렇게 많지는 않습니다. 올 봄에는 카이스트에서 초청강연이 들어와서 모처럼 한국에 들어갔다가 이틀간 떠들다 온 적이 있습니다. 낮에는 연구원, 밤에는 작가라는 ‘이중생활’을 한 지 벌써 5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간 한국에 책을 5권 출판했습니다. 거의 전부가 이공계 전공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었습니다만, 유일하게 마지막으로 나온 책 ‘나는 공돌이’는 이공계 문제를 다룬 책이었습니다. 책을 쓴다는 것은 힘들고 어렵지만 보람 있는 일이죠. 그런데 경제적 수익이 너무 빈약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책을 잘 안 읽어요. 돈들일 필요 없이 인터넷만 두드리면 엄청난 정보들이 나오니까, 수백 페이지 책들을 읽고 싶지가 않겠죠. 그래서 힘이 많이 빠집니다. 책이 인터넷에 계속 밀려서 세상에 정보만 남고 지식은 다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염려스럽습니다. 저는 출판계에서 제법 대접을 잘 받는 작가인 편인데도 불만이 많은데, 가방 끈도 짧고 팔아먹을 외국경험도 없는 젊은 작가들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가 없겠죠. 이런! 우리 이공계 걱정하기도 바쁜데, 주제넘게 남의 집 어려운 사정까지 끼어들려고 하는군요. 지금도 여전히 책을 쓰고 있지만, 시간이 너무 모자라고요, 몸이 많이 지쳐서 좀 천천히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마누라가 힌트를 줬어요. ‘당신은 글보다 말이 더 나은 사람이니까 앞으로는 강연으로 궤도를 좀 바꿔보라’는 이야기를 하더군요. 그래서 강연으로 부전공을 정해보려고 합니다. 혹시 코센에서 강연 기회를 주실 수 있으면 한 번 불러주세요.
이제 저의 학창시절 이야기로 필름을 되돌려보겠습니다. 저는 강원도 속초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때 본 동해바다의 푸른 빛과 설악산의 형형색색 단풍 빛깔이 아마 제가 상당히 로멘티스트적 취향을 가지게 만들지 않았나 합니다. 지금도 어려울 때면, 그때 애들과 한밤중에 솜방망이에 횃불 지펴서 게 잡으러 바닷가 바위틈을 누비던 생각, 겨울에 토끼 사냥한다고 ‘네쇼날 플라스틱’ 세숫대야를 타고 산을 내려오다가 엉뚱한 곳에 처박히던 생각만하면 인생이 즐거워집니다. 유년기의 아름다운 추억은 두고두고 재충전 가능한, 인생 항해의 고갈되지 않는 연료전지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가 경남 마산으로 이사를 왔어요. 억센 경상도 사나이들 틈에서 정신이 없었죠. 먹고 살기 바빠서 아들에게 신경 쓸 틈이 없으시던 홀어머니, 적응 안 되는 낯선 도시, 명절이 되어도 딱히 오가는 사람 없는 썰렁한 집 등등은 사춘기를 어긋나게 보낼만한 구실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늘 지녀오던 기독교 신앙 탓에 크게 어긋난 행동은 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공부를 좀 안하고, 밤거리에서 고성방가하고 다닌 정도죠. 친구를 만나서 데려다 주고는 다시 그 친구가 우리 집에 나를 데려다 주는 일을 반복하면서 저녁시간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시험 쳐서 들어갔던 마산고등학교는 애들이 공부를 잘했어요. 하지만 저는 수업시간에 언제나 영어단어나 수학공식 대신, 두고 온 동해의 푸른 물과 설악산의 단풍으로 머리를 채우곤 했죠. 성적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인지, IMF 체제 아래의 증권가격인지 분간이 안될 정도로 급강하했었습니다. 성적표와 무관하게 살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고3이더군요. 그때 다행히 약간 정신이 들었습니다. 늦게나마 공부를 열심히 했고, 간신히 부산대학교 기계설계학과에 입학했습니다.
대학에 와서는 진짜 공부를 좀 해보려고 다짐을 했었어요. 하지만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웠습니다. 객지생활에, 시국은 언제나 데모였고, 급기야 제가 2학년이던 어느 날 제도기를 들고 제도실습실로 향하는 데, 캠퍼스 분위기가 좀 이상해지더니 금방 심각한 사태로 발전했습니다. 부마사태의 시작이었죠. 그 후 우리는 군인들의 야영지가 되어버린 캠퍼스를 떠나 해운대백사장에서 통기타치고 노래 부르는 것으로 또 세월을 죽여야 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그 시국 전선에 나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닥터 지바고처럼 격랑의 정치체제 하에서도 가장 중요한 가치는 인간애라고 믿었죠. 당시 제 처지에 민주화라는 구호가 사치였기에 그렇게 합리화했던 것 같습니다.
졸업 후에는 바로 창원공단에 취직해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늘 동경하던 샐러리맨의 꿈을 이루었죠. 하지만 직장생활이 쉽지 않았습니다. 노조도 없고 파업하면 군대가 출동하던 시대라서 출근하면 언제 퇴근할 지 기약이 없었습니다. 3년을 힘겹게 버티면서, 이 에너지의 반만 들여도 공부에 성공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사표 쓰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7개월 동안 거의 아침 해가 뜨는 것을 보며 잠자는 생활 덕에, 카이스트 석사과정에 합격했습니다. 지금도 제가 가장 자부심을 느끼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너무 일찍 지쳐있어서 석사과정 후 박사과정으로 연결을 포기하고 또 곧바로 취직했습니다. 이제는 학벌도 어느 정도 갖추었고 경력도 있으니, 이대로 대충 가면 되겠다는 안이한 생각을 하고 살았죠. 결혼도 하고 아들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책상 하나 뒤로 옮기는데 몇 년씩 걸리는 조직 속에서 진급해서 살아남는다는 것이 의미 없어 보이기 시작했어요. 자기 개발도 없는, ‘실력=잔머리’ 같은 생활이 싫어졌습니다. ‘이대로 내 인생 끝내야 하나……’ 고민하다가 4년간 정든 직장을 그만두고 아내와 아들의 전송을 받으며 불란서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불어도 한마디 못하면서 불란서로 갔던 이유는 단순합니다. 학비가 거의 없다는 점과, 몇 번 출장을 가봐서 약간 익숙해졌다는 것이었죠. 어쨌든 무모한 결정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어학과정 중에 불어를 엄청 열심히 공부했었습니다. 그 실력이 밑천이 되어 박사 마칠 때, 논문발표 성적서에는 이공계 전공자로서는 쌩뚱맞게도, ‘귀하는 불어를 잘 마스터했다’는 평가가 붙어 있죠.
불란서에서 학위를 마친 후에는 운이 좋게도, 아니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곧바로 미국 프린스턴 대학 연구소에 엔지니어로 취직이 되었습니다. 유학기간 5년반 동안 한 번도 가보지 못한 한국에 들를 사이도 없이 가족들을 데리고 바로 미국으로 이사를 왔지요. 그래서 이곳에서 8년째 일하고 있습니다. 학교와 일터를 번갈아 가며 들락날락한 것은 제가 색다른 자부심을 느끼는 부분입니다. 전공도 약간씩 바꿔가면서 공부한 것도 그렇고. 그런데 이런 경력이 한국에서 교수가 되기에는 불리하다는 것을 당시에 잘 몰랐습니다. 물론 그때는 학교로 돌아갈 마음도 없었는데, 이제는 좀 더 있다가 늘그막에 귀국해서 가르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2. 회원님의 연구분야를 간단하게 설명해 주세요. 그간 이루어오신 연구실적과 앞으로의 연구방향에 대해서도 듣고 싶습니다.
제가 근무하는 프린스턴대학의 플라즈마 연구소는 핵융합을 연구하는 연구소입니다. 연구비는 전액 미국정부 에너지성에서 지원 받습니다. 말하자면, 대체에너지 연구를 하는 정부연구소인 셈이지요. 핵융합은 실험실 단위로는 반응자체가 증명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효율적으로 만드는 데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성공하면 입력보다 500배 더 큰 출력 에너지가 얻어집니다. 휘발유 1리터에 20킬로미터 가는 차가, 핵융합에너지로는 무려 1,000 킬로미터를 가게 되는 셈이니, 엄청난 효율이죠? 핵융합 내부의 플라즈마 거동을 연구하는 것은 물리학자들이 하는 일이고, 저는 이 장치를 설계하고 안전성을 계산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여러 가지 일에 약간씩 가담해와서 딱히 연구실적이라고 내세우기에는 좀 이른 감이 있습니다만, 저는 기계공학 전공자인데, 박사과정에서는 전기공학으로 바꾸어서 전자기장 연구를 했고, 지금도 전자기력에 의한 기계적 응력을 계산하는 일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전자기 현상을 신호로 사용하면 통신분야 연구가 됩니다만, 저는 전자기 현상을 기계적 힘으로 사용하는 일을 합니다. 그러니 기계와 전기 중간 정도의 일이죠. 기계공학자들은 공간감각에 익숙한데, 전기전공자들은 시퀀스 개념에 더 익숙합니다. 전자기력은 기계공학적 공간감각이 필요한 전기공학 내 부분이어서 기계전공자나 전기전공자 누구에게도 친근한 분야가 아닙니다. 이 분야의 연구를 하고, 실질적 계산을 한다는 것이 보람 있고 재미있습니다.
옛날부터 인류는 힘을 언제나 접촉에 의해서만 전달이 되는 현상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중력과 전자기력은 마치 기나 장풍처럼, 물체에 닿지 않고도 전달되는 힘이죠. 그런데 중력은 너무 큰 지구나 천체로부터 오는 힘이니 크기나 방향을 조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자기력은 인간이 조절할 수 있는 유일한 비접촉력인 셈입니다. 여기에 매료되어서 전공도 바꾸게 되었는데, 아직 갈 길이 멉니다. 예전에 이미 다 나온 이론인데, 제대로 뼈 속 깊이 아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요. 머리로 이해하는 경지를 넘어 가슴으로 느끼는 사람들이 흔치 않습니다.
앞으로 계획은 국제공동 프로젝트인 ITER 사업에 참여할 예정입니다. 거대한 핵융합장치 건설을 위해 미국,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가 참여하고 있는 사업이죠. 이 장비가 지어질 장소로 프랑스 남부가 지정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몇 년 후에는 다시 프랑스로 컴백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지방 출신인 알퐁스 도데의 ‘방앗간에서 띄우는 편지’를 흉내 낸, 분위기 있는 프로방스 통신을 코센으로 띄울 날이 오기를 기대합니다.
3. KOSEN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현재 KOSEN에서 어떤 활동을 하고 계신지요? 그리고 KOSEN 까페의 시샵으로 활동하고 계신데요, 까페 소개와 홍보 부탁 드립니다.
우연히 제가 사는 근처(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로 연구차 나온 후배님이 연락을 줬더군요. 저는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만…… 그 후배님은 저와 식사도 하고 몇 번 놀러 다니고 하다가 귀국을 했어요. 그 다음에는 그 후배님이 가족들 동반하여 다시 미국에 잠시 나왔는데, 부인께서 ‘코센’의 실세이시라고 귀띔을 해주더군요. 그때는 ‘코센’은 ‘콧대 센 사람들 클럽’인줄 알았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런 국가기관의 정보수집 어쩌고 하는 조직들이 다 고객이나 회원의 권익보다는 자체이익추구, 그리고 관료주의적 성향이 심하잖아요? 그래서 별 다른 기대는 없었고, 그냥 그런 직장에 다니나 보다 생각했어요. 하지만 점차 코센이 정말 한민족 전체 과학기술자들을 아우르고 포용할 의지가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조금씩 ‘조직’ 안으로 발을 들이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코센의 이런저런 일에 괜히 많이 끼어들게 되었습니다. 카페시샵, 해외통신원, 논문분석 등등에 줄줄이 엮여있습니다. 그래서 코센전문가에는 절대로 가담하지 않으리라 버티고 있죠. 누가 하라고 강요나 추천해주지도 않았습니다만, 이러다가 코센 직원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드는군요.
제가 시샵을 맡고 있는 ‘르네상스 공돌이’는 과학기술계를 둘러싼 삶의 여러 요인들을 과학인의 눈으로 보자는 취지의 카페입니다. ‘과학기술인의 세상보기’ 정도라고 할까요? 글을 좀 더 자주 못 올려서 뭐라고 이야기하기도 부끄럽습니다.
4. 전세계의 KOSEN 회원과, KOSEN에 바라는 점, 기대나 발전방향을 제시해주세요.
제가 서양사회에 나와서 보니까, 이 사람들이 우리보다 크게 똑똑한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우리보다 잘 사는 이유는 장기플랜에 강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뭐 하나 시작이 어렵고 시작하고 나면 셋팅이 어렵지만, 한 번 시작한 일은 대를 걸쳐서 진지하게 하는 것이죠. 외국 나와 보신 분들은 하나같이 이들의 일 처리가 늦어터진 것에 한 번쯤 열통 터져보지 않았거나, 피해를 안보신 분이 없으실 것입니다. 그런 엉망이고 느린 나라들이 어떻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까? 에 대한 대답은 일관성과 끈기인 것 같습니다. 사실 끈기는 옛날 우리민족의 주특기였는데, 요즘은 어디로 갔는지 다 없어졌어요.
코센 본부도, 코센 회원님들도 잘해보려는 몸부림도 중요하지만, 모든 것이 자리를 잡을 때까지잘 버티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몇 년 정부가 밀어주다가 결과가 시원찮을 것 같으면, 없애버리거나, 통폐합하거나, 아니면 간판 바꿔 달아서 또 다시 하는 식으로는 어렵습니다. 예를 들면, 설렁탕 집이 겨우 어려움을 벗고 조금씩 자리를 잡으려 하는데, 매상이 시원치 않다고 금방 식당 이름 바꾸고 메뉴를 비빕밥으로 바꾸는 식으로는 매상은 약간 더 오를지 몰라도, 이른바 ‘명가’가 될 수는 없겠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같은 메뉴로, 같은 시간에 열고 닫는 식당을 손님들은 사랑합니다. 그런 역사성 있는 주막으로 잘 정착되어야 거쳐간 손님 중에 장원 급제자가 나오는 법이죠. 이런 목표를 분명히 해서 정부 쪽을 꾸준히 교육시키고, 회원들의 긴 호흡을 끌어내야 할 것 같습니다.
회원님들 간에는 외국에서까지 오프라인 만남도 종종 있고 사진도 올라와서, 회원과 스텝들 간의 ‘점 조직’이 아니라, 회원들 간에도 뭉쳐지는 ‘동호회’ 성격으로 갔으면 좋겠습니다.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서 잠시 등장했다가 먹이만 낚아채 달아나는 ‘독수리 회원’은 진짜 큰 먹이감이 차려진 식탁에는 정작 숟가락도 놓을 수 없는 것이 세상 이치 아닐까요? 주변의 눈치가 따가울 수 밖에 없습니다. 좋은 정보, 좋은 만남에는 그에 상응하는 시간과 노력의 투자가 병행해야 할 것입니다.
5. 마지막으로 앞으로 전공연구 이외에 하고 싶으신 일이나 계획을 좀 이야기해주세요.
‘나는 공돌이’라는 책을 낸 다음에도 여전히 이공계의 문제를 생각해왔습니다. 한참 뒷북이죠? 의사, 변호사보다 수입이 적은 것은 제가 어떻게 할 수 없고, 그 외에 다른 문제는 없나 하는 것을 고민해 봤어요. 미국에서 나온 여러 권의 과학기술 쪽 책을 보다가 들게 된 소감이 있었습니다. 과학기술에도 엄청나게 많은 역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로 들리시죠? 하지만 우리가 아는 역사는 연대기 정도에 불과합니다. 하나를 탄생시키기 위해 있었던 어처구니 없는 몰이해와 오해, 그리고 천재들의 좌절과 우연의 연속 등등의 연속극보다 더 진한 사연들이 있었더군요. 하지만 우리는 과장된 이야기를 좋아하다 보니, 뉴턴은 사과만 보고 만류인력을 알았고, 아인슈타인은 하루 저녁에 상대성 이론을 풀어냈다는 등으로 쉽게 생각합니다. 그러니 그런 사람들이 될 수 없는 우리는 좌절하는 것이죠. 하지만 그들도 어렵게 진리와 사실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재의 영감만 부러워하고, 천재의 눈물 어린 노력에는 집중하지 않는 경향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저는 앞으로 이런 과학기술의 ‘과거사 규명’에 나서고 싶습니다. 학문으로서의 과학기술사가 아니라, 우리들이 다 누릴 수 있는, 과거 천재들의 좌충우돌과 눈물을 조명해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그들도 우리 같은 사람이고 우리도 종국에는 그 사람들이 되지 말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복잡하게 쓰여진 A4 용지 위에 있는 그 많은 글씨와 그림이, 그 짧은 시간에 원본과 동일하게 복사해 나오는 과정을 보면서 저 기계 속에는 어떤 이야기들이 숨어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셨던가요? 어떤 이론이나 기계도 원시적 모습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본질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후대에 첨가된 많은 기능들, 팬시한 방정식들은 본질을 가리는 ‘화장발’이죠. 그것을 다 걷어낸 1세대 아이디어를 음미해보는 것이 과학기술의 역사의 의미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행위는 우리에게도 자신감을 주죠. ‘저 정도 간단한 아이디어라면 나도 생각했을 터인데……’ 이공계에게 재미와 자신감 그리고 우리의 뿌리를 더듬어보게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나저나 먹고 살면서 언제 이 많은 일들을 다 할 수 있을 지, 괜히 무책임한 말만 무성하게 늘어놓은 것은 아닌지 걱정되는군요. 너무 이야기가 길어져서 여기에서 마무리해야겠습니다. 영광스런 인터뷰 기회를 주신 ‘본부 언니’들께 감사 드립니다. 코센회원 여러분! 언제나 즐겁고 건강하시고, 하시는 일에 같이 웃고 누릴만한 진보가 넘치시길 바랍니다. 미국에서 전창훈 씀.
박사님~ 르네상스 공돌이를 한번 읽어 봐야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