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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남섬 캐틀린스 여행기


1월1일. 새해 아침이 밝았다. 평소보다 조금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오늘부터 내일까지 이틀간의
데이오프(dayoff)가 주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신정인 셈이다. 갑자기 하이고가 말했다.
“소라, 펭귄 보고 싶지 않아?”
“펭귄? 보고 싶지! 어디 있는데?”
유난히 동물을 좋아하는 포토그래퍼 하이고는 남 섬의 동쪽해안가를 따라 여행했다. 그녀는 그곳에서 바다사자와 펭귄, 돌고래를
만났다고 했다. 남쪽 해안가에 가면 펭귄을 볼 수 있다고? 말도 안 돼. 지금은 한여름이잖아.




구석구석 보물을 품고 있는 캐틀린스. 뉴질랜드의 남동해안을 따라 더니든에서 인버카길까지 가는 길은 국립공원은 아니지만 국립공원 못지않게 아름다운 땅이라고 불렸다. 217km의 해안도로를 따라 달리면 구비마다 변화무쌍한 자연을 만날 수 있어서 드라이브 코스로 인기가 많다. 우리나라 지도와 비교하면 포항에서 여수까지 해안도로인 셈이다.

크롬웰에서 출발한 우리들은 체리 농장의 집결지 알렉산드라에 들러 라면과 식빵, 우유 등 최대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샀다. 뉴질랜드의 야생지역에는 휴게소나 매점이 없기 때문이다. 몇 군데 귀엽고 작은 마을을 통과하니 경치는 점차 초록빛에서 파란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3시간을 달려 미리 예약한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바닷가에 자리한 아담한 게스트하우스 현관에는 조개껍데기로 만든 장식물이 바람에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곳곳에는 독특한 모양의 돌조각이 세워져 있었다. 실내에는 푸른 바다와 하늘이 담긴 창문이 액자처럼 걸려 있었다. 주인아주머니는 친절하게 우리를 맞아주시며 벽에 걸린 지도를 보며 주변의 관광명소를 알려주었다.
“아, 지금 너겟 포인트를 가면 펭귄을 볼 수 있을 거예요.”
우리들은 배낭을 내팽개치고 서둘러 차에 올라탔다. 창밖으로는 바람에 갈대가 휘청거리고, 파도가 거세게 바위에 부딪쳤다. 거친 파도와 바람이 몰아쳐도 차 안은 음소거라도 한 것처럼 조용하다. 자연을 감상할 때는 아무 말도 필요 없다.



우리는 너겟 포인트에 위치한 로링베이(Roaring bay)에 도착했다. 이곳은 일 년 내내 펭귄이 사는 곳이지만, 그들을 볼 수 있는 시간은 펭귄이 바다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저녁 무렵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향해 좁다랗게 난 길을 걸어가니 절벽 위에 조그마한 오두막 하나가 보였다. 사람들이 몰래 펭귄을 볼 수 있도록 마련해둔 관찰소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숨죽이고 해안가를 살폈다.
 


수줍음을 많이 타는 펭귄의 프라이버시를 배려해서 모두들 조용히 훔쳐본다.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웅성 거리기 시작했다.
“펭귄이다!”
“도대체, 어디 있어?”
100m 너머 해안가에는 회색 돌멩이와 하얀 모래뿐이다. 매직아이를 하듯 초점을 모으자 조금씩 움직이는 것들이 보였다. 정말 펭귄이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일단 보이기 시작하니 돌멩이들이 하나둘 펭귄으로 변신했다. 한 펭귄이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다가 부리로 털을 다듬고, 주위를 천천히 두리번거리더니 다시 총총 걸었다. 눈 안에 펭귄을 놓칠세라 뚫어지게 바라본다. 짙은 회색 턱시도를 입은 녀석들은 금세 회색 돌멩이로 위장했다. 펭귄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들을 향한 사랑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귀여운 녀석들은 눈 주위에 노란띠가 있는 노란눈펭귄(Yellow- eyes penguin)이다. 마오리족들은 펭귄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다고 해서 ‘호이호(Hoiho)라고 불렀다. 전 세계 18종의 펭귄 중 가장 희귀한 녀석들로 오직 여기 뉴질랜드의 남부 해안에만 있다.



노란눈펭귄들은 아침 일찍 바다로 출근해서 먹이 사냥을 하고, 오후가 되면 육지로 퇴근을 한다. 이들의 집은 바닷가에서 떨어진 숲속에 있다.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숲에서 잠자는 펭귄이다. 과거에 천적이 없는 뉴질랜드에서 살면서 터득한 생활방식이나 지금은 이로 인해 멸종위기에 처해있다. 영국 식민지 시절, 유럽 사람들이 들여 온 고양이, 포섬(쥐주머니), 고슴도치 등 외래 동물들은 이들의 천적이 되었다. 육지에서 사는 펭귄들은 갑자기 이민 온 동물들에게 서식지를 빼앗겨 지금은 개체 수가 많이 줄어 5~6,000마리 정도 밖에 남지 않았다. 육지에서 잠을 자는 습성만 고쳐도 덜 위험할 텐데.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약 8,500백만 년 전 백악기 때부터 다른 대륙과 격리된 이 땅에는 독자적인 진화의 길을 걸어온 특이한 생물이 많았다. 뉴질랜드에 뱀이 없다는 사실이 격리된 대륙이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먹이가 풍부하고 새들의 천적이 없어 약 250여종이 사는 새의 천국이었다. 그 이후 태평양을 건너 온 마오리족이 정착하고, 유럽인들이 이주해왔다. 가죽을 위해 들여온 포섬은 천적이 없고 번식력이 좋아 급속도로 늘어갔다. 포섬의 개체수가 증가하면서 뉴질랜드의 희귀 새는 급격하게 사라지고 생태계의 균형이 흔들렸다. 그것이 생태계와 경제를 위협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뉴질랜드 사람들은 환경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피해를 주는 동식물의 유입을 막기 위해 검역을 철저히 하고, 희귀동물의 보금자리는 원상태를 유지하게 보살피고 있다. 최대한 자연 상태로 그대로 보존하려는 그들의 섬세함은 감탄을 자아낸다. 약1,000년 전부터 이 땅에 살았지만 이제는 멸종위기에 처한 동식물을 지키려는 노력은 공존을 원하는 인간의 양심에서 비롯된다. 나 또한 지구의 세입자로서 내가 살던 나라의 반대편 나라에서 이런 노력을 해주고 있다는 것이 어쩐지 고마웠다.

모든 생명체가 끊임없이 진화하지만 환경도 빠르게 바뀌기 때문에 진보가 둔화한다는 진화생물학 이론이 붉은 여왕의 법칙이다. 자연계의 진화경쟁에서는 어느 한쪽이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다. 하지만 인간의 개발아래 세상은 갈수록 빠르게 발전하고 있다. 그 변화에 어떤 생명체는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도태된다. 사라져가는 생명체는 사람들의 보호 아래 간신히 살아가고 있지만 빠른 세상의 변화 속에 언제까지 제자리걸음을 할 수만은 없다. 붉은 여왕의 법칙이 적용되는 세상에 사는 이상 피해갈 수 없다. 우리가 속도를 늦추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들은 사라져 버릴 것이다. 나라도 조금 천천히 걷고 싶다.
하이고는 조심조심 숲으로 숨어들어가 카메라에 녀석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을 담으려고 열심이다. 해변에 있던 펭귄들이 모두 숲으로 돌아간 후에도 하이고의 표정은 흥분이 사라지지 않는다.
“사실 타이완의 동물원에서도 펭귄을 볼 수 있지만, 진짜 야생 펭귄을 보는 행운은 아무나 없으니까. 그저 펭귄들을 보고 있으면 이유 없이 행복해져. 매번 그들을 찾을 때마다 진짜 여행 중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거든.”
어두워지기 전 우리는 가까이에 있는 너겟 포인트 등대로 향했다. 짙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뾰족한 바위섬, 그 위에 하얗고 단아하게 서있는 등대 하나, 가파른 절벽 위에서 바다를 보니 마음이 먹먹해진다. 등대는 망망대해를 향해 서 있었다. 모호한 검푸른 바다와 하늘 경계 너머에는 남극이 있다. 남극. 남극에 가서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하얀 얼음 대륙을 밟아 보고 싶다. 남극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직접 맞고 있자니 빨갛게 달아올랐던 마음이 한결 식는다. 사막의 숨은 오아시스처럼 내 눈 앞의 바다 수평선에는 남극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둘째 날 아침, 너무 곤히 잔 탓에 일출을 놓치고 아쉬운 마음에 앞마당처럼 펼쳐진 숙소 앞바다로 나갔다. 바다에 나가보니 넓은 백사장에 검은 물체 하나가 보였다.
‘바..바다사자라니, 말도 안 돼! 동네 개도 아니고, 이렇게 해변에 널브러져 있어도 되는 거냐? 너!?’
거짓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만 우와! 소리를 질러버렸다. 바다사자는 내 비명을 듣고 힐끔 보더니 뭐가 신기하냐는 듯이 하품을 한다. 나보다 먼저 바다사자를 발견한 동네 아주머니가 말했다.





“바다사자는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아요.”
바다사자는 모래를 자기 등에 뿌리더니 푸다닥 털고, 꿈틀꿈틀 모래사장 위를 뒹굴다가 미역처럼 늘어져버렸다. 평온한 표정으로 가만히 있기에 사진을 찍으려고 한 걸음 다가갔다. 갑자기 녀석이 마치 기다렸던 것처럼 나를 향해 펄쩍 뛰어 올랐다. 쪼그려 앉아 있던 나는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찧었다. 바다사자는 만족한 표정으로 모래에 턱을 비비더니 그대로 눈을 감는다.

 




 



나는 지금 어디에 와 있는 것일까. 펭귄이 바다로 출퇴근하고, 바다사자가 모래찜질을 하는 야생의 한복판에 서있다. 여기 사람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일상일 뿐이다. 그들을 개의치 않고 산책을 즐기는 무심함이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배려다. 자연은 그대로 두었을 때 진짜 자연스럽다.





농장으로 돌아가기 길에 블러프에 들리기로 했다. 해안도로를 따라 한참을 달리는데, 갑자기 나타난 이십여 마리의 소떼들이 우리를 가로막았다. 개중 몇 마리는 느릿느릿 차 옆으로 다가와 차 안을 들여다본다. 그 안에 멀뚱히 앉아있던 나와 긴 속눈썹을 끔뻑이는 소는 눈을 마주쳤다. 나는 갈 길이 멀었으니, 눈빛으로 양보를 구한다. 하이고는 가만히 소떼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블러프의 땅 끝에는 노란 이정표가 있다. 거기에 동경은 있었지만 서울은 없었다. 나 굉장히 멀리 왔구나. 흘러 온 시간에 얹혀있는 기나긴 여정이 떠올랐다. 회사를 그만두고, 뉴질랜드 워킹홀리데이를 결정하고, 한국을 떠나 지금 나는 뉴질랜드의 땅 끝에 서있다. 그래. 모든 끝은 또 다른 시작이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살아있는 야생을 만났다. 지형이 그대로 느껴지는 고불고불한 길, 거센 바람과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 속눈썹이 긴 소, 게으른 바다사자와 숲에 사는 노란눈펭귄까지. 이 모든 것들이 내 눈앞에서 살아 움직였다.

크롬웰로 돌아가는 길에서 지구는 내게 이제껏 보아 왔던 것보다 더 멋진 선물을 주었다. 이틀 동안 여행한 야생의 세계도 모자라 우리가 향하는 길 끝에 두 겹의 무지개가 반신을 드러냈다. 나머지는 반쪽은 내가 살던 나라에 닿아 있을 것만 같다. 세상은 경이로움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이 여정을 멈출 수 없다.


 



 


세상은 경이로움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나는 이 여정을 멈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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