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질랜드 이민 24년차의 평화로움 속, 소소하고 행복한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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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뉴질랜드 이민 24년차인 배성은입니다. 캔터베리대학교 (UC)에서 알고리즘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는 UC에 설립된 정부 출연 지진 연구소 QuakeCoRE의 소프트웨어팀을 이끌며 슈퍼컴퓨터를 이용한 지진 시뮬레이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QuakeCoRE 지진 연구소의 <연구실 탐방> 글에 이어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다시 인사드립니다. 제가 근무하는 대학이나 연구소에 대해서는 지난 글에서 언급한 바가 있어 이공계 렌즈를 잠시 벗어두고 제가 살고 있는 도시에 대해 가볍게 소개해 드리는 기회로 삼을까 합니다.
'QuakeCoRE 지진 연구소' 연구실탐방 보러가기 >
지진으로 피해를 입기 전 CHCH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던 대성당 (Christ Church Cathedral)
Christchurch(이하 CHCH)라는 특정 종교의 향기가 강하게 풍기는 도시 이름은 영국 옥스포드 대학의 Christ Church College에서 비롯합니다. 이 대학 출신들이 초기 도시 계획과 정착에 기여한 바가 크다고 하네요. CHCH는 전통적으로 “영국 바깥에서 가장 잉글랜드의 정서를 잘 살린 도시”, “가든 시티”라고 불리며 아담하지만 나름 뉴질랜드 남섬의 중심 도시로 그 명성을 누려왔습니다. 저는 90년대 후반에 이민을 온 이래로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20여 년째 살고 있습니다.
원래 이곳은 남태평양 한 귀퉁이에 위치한 인구 30만 명 정도의 한적한 도시답게, 세계적인 관심을 끄는 뉴스들보다는 이웃 동네 건널목에서 벌어진 교통사고에 더 관심이 많을 정도로 세상사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곳이었습니다. 90년대 말 가난한 대학생의 시각으로 바라본 이곳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고만고만한 직업을 가지고 크게 부족하지도 풍족하지도 않은 평범한 생활 수준을 영위하고 있었고, 소수의 극빈계층들도 사회보장제도 덕택에 의식주와 어느 정도의 문화생활을 누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천국이었고, 어떻게 보면 너무도 지루한 곳이었지요.
그러던 이곳이 세계적인 유명세를 겪게 되는 몇 가지 사건이 2010년을 기점으로 몇 차례 있었습니다. 제가 지난번 투고했던 글에서 언급한 바 있는 2010년과 2011년 두 차례의 대지진, 그리고 2019년 초 이슬람 사원에서 49명의 목숨을 앗아간 호주 출신의 극단적 인종주의자가 저지른 총기 테러 사건이 그것입니다. 충격적이고 비통한 일이었지만 의외로 정치권과 시민사회가 이를 전화위복과 사회 통합의 기회로 삼으며 재빠르게 일상을 회복해 나가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
도시 한 가운데 해글리 공원을 가로지르는 에이본 강에 운행 중인 관람용 보트
CHCH에는 3~4천명 정도의 한국 교민/유학생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20여년 전만 해도 한국에 대해 관심이 없던 현지인들 사이에서 대한민국의 인지도도 지난 몇 년동안 비약적으로 높아졌습니다. 제 이민 초창기와 비교하면 격세지감이라 할 수 있겠네요. 한편 K-POP 보다도 이곳에서 대한민국의 국위선양을 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대한민국 극지 연구소의 남극 프로그램이 그것입니다. CHCH시 정부는 전통적으로 남극의 관문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찍이 남극점에 최초로 도달하기 위한 아문센과 스코트 간 세기의 대결에도 CHCH가 남극의 관문으로서 역할을 한 바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이곳 남극 센터 (Antarctic Centre)에 미국을 비롯한 과학 선진국들과 함께 사무소를 설치하였으며, 해마다 남극에 여름이 찾아올 때면 쇄빙선 아라온호가 CHCH를 방문해 남극기지 주둔 인력을 위한 각종 물자를 수송해 가고 있습니다. 극지 연구소는 지난 십여 년간 이 같은 연례 행사를 지속해오는 가운데 CHCH 시민들을 위해 아라온호 내부를 공개하는 이벤트를 열기도 하며, CHCH 지역 사회와 시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한국 교민으로서 뿌듯한 경험이었습니다.
리텔튼항에 정박 중인 극지연구소 소속 쇄빙선 아라온호
이곳 사람들이 흔히들 하는 푸념 중에 CHCH에는 일자리가 없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정부 관계 부처나 외국계 기업은 주로 제1의 대도시 오클랜드나 수도인 웰링턴에 뉴질랜드 지사를 세우는 까닭에, 한국적인 정서로 말하는 “좋은 일자리”가 CHCH에는 눈에 잘 띄지 않고 모두가 알만한 큰 회사와는 큰 인연을 맺기가 힘든 것이 현실입니다.
하지만 간판도 제대로 없는 허름한 건물에 알고 보면 세계시장을 상대하고 있는 기술 기업, 스타트업 회사들이 입주해 있는 의외의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겉으로 드러내는 것에 무심한 문화적 토양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어차피 인구 30만 소도시 시민들이 그 타겟 시장이 아닌 까닭에 굳이 광고하고 으스댈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핵물리학의 초창기에 큰 족적을 남기고 노벨 화학상을 수상한UC의 동문 어니스트 러더포드를 기리기 위해 건축한 이과대학 연구소. 붉은 X자 구조물은 지진을 대비한 내진 설계의 결과.
20세기 세계 철학계의 거두 칼 포퍼가 UC 철학과에서 10년 가까이 가르쳤던 것을 기념하기 위해 철학과가 입주한 인문대학 건물이 통채로 칼 포퍼 기념관으로 명명되었다.
현지 사정에 밝지 않은 유학생이나 교민들에게는 어떻게 그러한 기회를 잡을 수 있을지 막막한 것이 사실입니다. 다행스럽게도 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이주해온 한국 교민들의 자녀들이 하나 둘 이곳의 취업 시장에 잘 진입하고 있고, 지진 복구를 위한 건설업의 호황 덕으로 뉴질랜드의 경제가 타 OECD 국가들에 비해 꾸준한 성장세를 계속하고 있어 일자리 부족에 대한 불만은 어느 정도 해소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향후 AI와 로봇이 빼앗아 갈 일자리가 폭과 깊이가 큰 논란거리가 될 것으로 짐작되는데, 제 관찰로는 이곳에서 아직까지는 큰 이슈가 되진 않고 있는 것으로 보이네요.
CHCH에 자리한 기업들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대체로 특수한 틈새시장을 타겟으로 한 부가 가치가 높은 제품들을 생산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 요직에 지역의 캔터베리 대학 (이하 UC) 출신들이 포진하고 있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습니다. UC는 영국 옥스포드와 캠브리지 출신들이 주축이 되어 영국적인 전통을 살린 대학을 모토로 1873년 설립하였는데 대체로 평준화되어 있는 뉴질랜드의 8개 대학들 중에서도 이공계가 특히 유명한 학교입니다. “반지의 제왕”으로 세계적 거장의 반열에 오른 피터 잭슨 감독이 “타이타닉”으로 유명한 케이트 윈슬렛 주연으로 제작한 “천상의 피조물 (Heavenly Creatures)”이라는 영화를 UC캠퍼스에서 찍었던 적도 있습니다.
피터 잭슨 덕택으로 많은 헐리우드 영화들이 아름다운 자연 풍경을 찾아 뉴질랜드에서 촬영되었습니다. 특히 남섬에는 문명의 손이 미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 많다고들 합니다.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진 퀸즈타운을 비롯한 다양한 관광지들을 방문하려면 거쳐갈 수 밖에 없는 곳이 CHCH입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인생 최고의 여행이 될 수도 있는 곳을 주말 여행 코스로 두고 있는 셈이네요.
피터 잭슨 감독 “Heavenly Creatures” 중 (1994)
UC Staff Club의 현재 모습
퀸즈타운의 호수에 운항 중인 증기 유람선
뉴질랜드 남섬 CHCH는 남위 43도에 위치해 있습니다. 평양은 북위 39도, 일본 삿포로가 북위 43도 정도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 기후가 어느 정도 짐작이 가지 않을까 합니다. 한국과는 달리 여름은 건조하고 겨울은 습합니다. 한국의 여름이 한증막이라면 여기 여름은 핀란드식 건식 사우나 같다고 할 수 있겠네요. 이곳 겨울은 기온이 한국만큼 떨어지진 않지만 습한 까닭에 체감 온도가 낮은 편입니다. 찬 물에 젖은 담요를 덮어 쓰고 있으면 더 춥게 느껴지는 원리라고 할까요. 그래서 겨울이면 한국 가정에서 흔히 보던 가습기와는 정반대의 기능을 하는 제습기가 가정에서 널리 이용됩니다. 대부분 독립된 주택에 거주하는 까닭에 겨울이면 효율이 좋은 한국 아파트의 중앙 집중식 난방이 그리워질 때도 있습니다.
취업비자나 영주권을 가진 이들의 가족에게는 입국 후 약간의 유예기간을 지나고 나서 뉴질랜드의 사회보장제도를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집니다. 공공 교육과 공공 의료의 두 축이 완벽하지는 않지만 사회 구성원에게 차별없이 제공되고 있고, 위에서 조금 언급했듯이 실업자나 장애인처럼 사회의 손길이 필요한 이들이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고 생활할 수 있게 해주는 시스템이 일찍이 정착되어 작동하고 있습니다. 어린이들과 노인들, 그리고 여성들에 대한 제도적 배려가 잘 되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소득세율이 한국에 비해 조금은 높은 것이 사실입니다.
2019년 3.1운동 100주년 기념 한국문화 축제를 성황리에 이끈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한 필자.
CHCH는 객관적으로 재미없는 곳입니다. 수도 웰링턴이나 최대 도시 오클랜드에 비해 뭔가 모자란 부분이 많은 곳이지요. 뉴질랜드 인구가 5백만밖에 되지 않는 작은 시장이다 보니 이곳에 진출하지 않은 브랜드들도 많아 쇼핑하는 재미조차 없다고들 합니다. 한국에 비해 아주 저렴하게 골프를 즐길 수 있다는 점을 이곳의 장점으로 드는 분들도 있지만, 어디 사람이 골프만 치고 사나요.
저는 어느 정도 전원의 느낌이 살아 있고 출퇴근때문에 낭비하는 시간이 적은 만큼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살 수 있는 곳이라는 점을 이 곳 생활의 최대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도시 전역에 펼쳐져 있는 공원과 그 곳의 야생동물들을 보며 기뻐하는 아이들을 보면 이 곳에 정착하길 잘했구나 하는 마음이 들 때가 많습니다.
농장의 “미니”말 (miniature horse)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필자의 큰 아이
코로나 19라는 전세계적 전대미문의 사태로 당연하게 만 여기던 “일상”이 중단된 경험은 거꾸로 소소한 일상이 주는 행복을 다시 한번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준 것 같습니다. 요즘 “소확행”이라는 신조어가 간간히 들려오더군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이야 말로 CHCH 생활의 매력포인트가 아닌가 합니다.
뉴질랜드에 20년 사셨다는데, 글을 어쩜 이리 잘 쓰시는지요. 책을 내셔도 좋겠어요.^^ CHCH는 지진으로 유명해서 이름을 들어보긴 했으나, 이렇게 자세한 이야기는 처음 들어봅니다. 남극에 가까운지도 몰랐어요. 언젠가 CHCH를 방문하게 된다면 한번 뵙고싶네요. 재미난 글 감사합니다.^^
윤정선/김보람/손지훈 회원님, 부족한 글에 친절한 댓글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댓글 알림이 되어 있지 않아 일년이 지나서야 확인하게 되었네요. 다들 행복하시길 빕니다.
다른 회원님 들은 연구원 자격으로 해외에 계시다 연구/연수 후 돌아오시는데 배 성은 회원님은 뉴질랜드 가신지
20여 년이 넘는 이민자시네요! 컴퓨터나 휴대폰 영상 통화 등으로 예전 이민자 분들처럼 고립감이나 외로움과는
거리 머시죠? 독감으로 굳어버릴 올해 말까지는 코로나에 조심에 조심하시고요 홧팅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