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이 되면 멋진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는 기대와 일일신하자는 격려로 채워진 새해 장식용 칼럼들을 접해왔다. 하지만 이제는 한가한 글을 쓸만한 여건이 아니기에 그동안 우리가 ‘코로나 압제’하에 살아온 중요한 이슈들을 생각해보았다. 우선은 백신이 겨우 10개월이라는 짧은 기간만에 개발될 수 있도록 오랜기간 연구에 매진해왔던 사힌-튀레지 의사부부에게 경의를 표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터키 이민2세로 독일에서 살아온 이 부부의 연구결과 덕분에 백신이 상당히 빨리 개발되었기에 이슈의 중대함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망자 수는 적었다.
첫번째로 필자가 괴이하게 생각한 부분은 마스크다. 서양국가들은 한동안 마스크 사용을 거부하다가 나중에야 받아들였다. 아마도 히잡을 쓴 이슬람에 대한 혐오와 범죄자들에게 익명성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글을 쓰기 위해 자료들을 찼던 와중에 위키피디아에서 본 여러 사진들에는,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창궐하던 시기에 미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당시의 세계적 표준이었다고 한다. 같은 해 미국 시에틀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의 전차탑승이 거부되었다고 한다. 스페인 독감이나 코로나가 동일하게 호흡기 계통의 질환인데, 서양사회가 100년전의 자기들 기준을 잊어버리고 한동안 마스크 사용을 거부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이번 팬데믹은 거의 정확하게 스페인 독감의 100년 뒤에 찾아왔다. 그런데 그동안 마스크의 기능이나 형태는 전혀 향상되지 않았다. 훨씬 뒤에 시작된 IT는 지금 AI시대까지 눈앞에 왔다고 난리들인데, 마스크는 여전히 귀에 거는 천조각 모양이니 참 신기한 일이다. 이러다 코로나가 조용해지고 몇십년 뒤에 비슷한 호흡기 질환이 다시 창궐하면 그때도 여전히 귀걸이 천조각 마스크를 쓰게 될 것인가? 요즘 유아들의 언어발달속도가 느려졌다고 한다. 유치원이나 보육원에서 교사들의 입모양을 흉내내며 아동들이 언어를 배우는데, 교사들의 입이 마스크로 가려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인간은 서로의 얼굴을 보고 살아야 한다. 대화할 때 눈과 주위의 근육이 만들어내는 표정은 소리보다 훨씬 더 많은 말을 하기 때문이다. 바이러스를 옮긴다는 비말은 막고 표정과 발음은 가감 없이 전달되는 마스크, 그러나 착용자가 덜 불편한 마스크를 개발하는 것이 AI 개발보다 훨씬 시급하다. 현재도 이마에 스폰지를 댄 투명한 플라스틱 (용접용 보호대 같은) 마스크가 시중에 나왔지만, 디자인과 기능을 많이 보완해야 한다. 땀이 나거나 화장을 한 얼굴에 직접 닿지 않는 투명한 마스크, 덜 답답하고 덜 거추장스러운 마스크를 연구해야 하지 않을까? 오징어 게임 진행자들의 헬멧 앞면을 철망 대신 유리로 대체한 것같은 마스크라면 어떨까? 헤어 스타일이 가려져 미장원 원장님들이 반대하려나?
두번째는 정치와 언론 그리고 의학계의 셈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과학지식이 가장 뒤떨어진 전문가 집단이 정치권이다. 정치현안에서 과학이 중요변수인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에 생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정치인들에게 과학적 이슈에 대한 판단은 익숙하지 않고, 전문가들의 조언은 몇 다리 건너서 전달된다. 의학계는 가장 안전한 조치를 요구할 것이다. 즉, 공항을 전부 패쇄하고 상가는 대부분 문을 닫는 록다운으로 가자는 조언이 가장 쉽다. 어차피 의학계도 본질을 깊이 알지못하기는 마찬가지다. 새로운 변이가 나오고나서야, “거 봐 내말이 맞지?”라고 뒷북을 칠 뿐, 사전에 예언을 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래서 잘 모르는 사태에서는 상식에 따라 일관된 조치를 밀고나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판단이다. 그런데 일관성 있는 정책을 추진하기 어렵게 만드는 존재가 요즘의 언론이다. 유튜브 개인방송들까지 포함한다면, 거의 무한대 갯수의 입을 가진 언론은 그 어느 때보다 자기들끼리 치열한 생존경쟁을 치르는 중이다. 그래서 우선 자극적인 내용을 내질러서 관심끌기에 성공하는 것이 이들의 지고한 목표다. 하지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으니, 저급한 필살기를 사용한다. 아주 예외적 사건의 일반화, 그리고 최악의 시나리오로 공포조장하기 등이다. 매체가 많기 때문에 사건마다 그들 중 하나는 정답을 맞춘다. 그래서 그들에게 쉽게 눈과 귀를 맡기지만 매체들이 사안을 다루는 지적수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심하게 저급하다. 거기에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끌어다주는 비슷한 종류의 정보만 접하는 시민들이라면 이해수준은 더 위태위태해진다.
위 둘의 문제는 과학이라는 팩트에 대한 이해와 그 팩트를 해석하고 적용하는 집단의 행동양식이다. 이것이 현대를 지배하는 큰 두가지 틀이라고 할 수 있다.이미 이론과 실험을 거쳐 확고해진 과학의 영역이라면, 그냥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으로만 나뉜다. 하지만 확실하게 알지 못하지만 판단해야 하는 이슈에 대해서는 팩트의 합리적 추정과 해석을 위한 ‘전문적 상식’이 필요하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심은데 팥나는’ 기본 상식에 합리적 판단이 추가된 것을 전문적 상식이라고 말해보았다. 미래를 개척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하고 잘 알려진 과학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우리에게 과학은 끝이 아니라, 언제나 통과하는 노정에 놓여있기 때문에 우리가 알아가는 만큼 모르는 것들도 쌓여간다. 그런데 미지의 세계로 한걸음씩 나가는 지혜는 부풀려진 공포나 터무니 없는 낙관론이 아니라, 현재까지 우리가 노력해서 쌓아온 과학적 상식을 근간으로 한 합리적 판단력에서 나올 것이다. 근거없는 희망이나 과장된 공포를 팔아먹는 장사치들에게 마음을 빼았기지 않을 상식의 근력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이제 새해부터 수많은 공포를 조장하는 기사들과 행복한 미래를 약속하는 달달한 뉴스들이 선거판 전후로 우리의 일상을 지배할 것이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도박사나 무엇이든 맞출 수 있다고 과신하는 무속인을 배제하고 ‘전문적 상식’으로 신발끈을 동여매는 코세니안들이 되자.
끝으로 한가지 더 괴상한 일은, 14세기 흑사병이 돌던 유럽에서는 중세교회들이 죄를 회개하는 운동을 벌였다는 기록들을 보았다. 그런데 지금의 불교나 기독교에서 이런 회개운동이 일어난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정부의 격리조치가 행정력의 과잉행사라는 불만은 들어보았지만, 종교의 타락이 코로나를 초래했을 지도 모른다는 자성의 목소리는 미미했다. 아마도 지금의 종교는 중세 유럽교회보다 더 의롭거나 아니면 더 타락해서 이제는 부끄러움도 모르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새해부터는 종교계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커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지식과 지혜를 모아, 새해에도 여전히 앞으로 나가자. 20세기 최고의 수학자중 한명이었던 힐베르트가 고별 강연(1930년 )에서 남겼다는 독일어 경구를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 Wir müssen wissen! Wir werden Wissen! (We must know! We will know!)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마침내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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