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블라인드 채용을 주장하는 국내 단체에서 나에게 자신들의 소개와 관련기사를 자주 보내주고 있다.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보내지는 메일 같아서 인터넷으로 확인해보았더니 유명한 단체였다. 최근 한 여성 국회의원도 블라인드 채용을 독려하여 사회적 공론의 목소리가 커져가는 것을 보았다.
블라인드 채용과 관련하여 첫번째로 짚어봐야 할 부분은 정-반-합이라는 ‘스윙 메카니즘’이다. 오랫동안 굳어진 잘못된 제도를 고치려면 마이너스(잘못된 좌표)에서 제로(합당한 좌표)로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개혁 의지가 너무 크고 이 기회에 완전히 바꿔야 한다는 강박까지 작동하여 대부분 제로점을 한참 지나쳐버린다. 그러면 역풍을 맞아서 개혁은 방향성을 잃게 되니, 소음에 비해 변화는 미미한 빛좋은 개살구 꼴이다. 크게는 정치사에서 이런 ‘오버 스윙’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정의로운 혁명군은 혁명후 즉시 부패한 왕족을 멸하고 사회정의를 세우려고 했다. 하지만 숙정과 숙청의 시간이 길어지면 피로감을 느낀 민중들에 의해 왕정복구가 이루어진다. 이런 과정이 프랑스에도 그리고 영국에도 있었다. 그렇게 수많은 사람들의 피를 제단에 뿌려 겨우 몰아낸 왕정을 불과 몇십년 후 다시 불러들이다니, 미스테리 같은 역설이다. 근대로 접어들어 왕정이 폐지된 나라에서 보수와 진보의 몰락이 반복하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부패가 아이콘이 된 보수를 몰아내고 진보가 득세하면, 그토록 정의에 예민하던 진보는 점점 자신들에게만 관대해져 결국 내로남불의 아이콘이 되고만다.
기득권이 강했던 집단이나 제도를 몰아낸 ‘혁명군’이라면 미래사회의 비전에 천착하여, 과거를 복수하려는 욕구를 절제해야 한다. 이 절제와 균형을 잃어버리면 처음에 미미하던 균열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결국 원조 혁명군이 다시 2차 혁명에 의해 단죄된다. 그래서 혁명은 감성의 영역이 아닌 이성의 영역에서 컨트롤되어야 하며, 과거를 송두리째 부정하는 혁명보다는 수술하듯 정밀하게 썩은 부위만 제거하는 개혁이 답이다. 물론 개혁도 말이 쉽지, 기득권 잔당들의 게릴라적 반발과 늦어터진 속도감이 절망감을 줄 터이지만, 이런 것을 해결하겠다는 의지도 없다면 애시당초 칼을 안빼는 것이 더 이롭다.
한국사회에서 학벌은 취업특권만이 아니라 성인들의 중요한 아이텐터티다. 대학졸업장이 개인의 능력을 평생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니까 말이다. 고졸이라는 불리한 조건을 딛고 사법고시에 합격한 대통령마저 공개적으로 조롱거리로 삼았던 사회다. 아마도 죄명은 ‘서울법대 모욕죄’였을까? 그러니 이제는 그 정반대편 최강수인 ‘브라인드 채용’이 등판한 것같다. 앞에서 언급한 ‘정’과 ‘반’이 극단적으로 표출되었으니 이제는 지혜롭게 ‘합’으로 가는 길을 찾아야 한다. 블라인드 채용이라고 하면서도 대면면접은 봐야 하니까, 수려한 외모와 말잘하는 사람 그리고 외향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하다. 만약 연구직이 필요한 회사라면, 이 경우에 거의 모든 사원들을 연구직이 아닌 영업직 적성자들로 채워질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블라인드 채용을 반박할 수도 없다. 그러면 절충안으로, 현행 대학입시처럼 수시와 정시로 나누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 때는 대학 학과에서 추천해주는 입사원서들이 있었다. 그리고 추천원서로 지원하면 거의 합격되었다. 회사에서 대학별로 분배해주는 추천원서의 갯수는 대학의 네임벨류에 비례했던 것같다. 결국 공부를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간 것이 약간은 가산점이 되는 구조가 자연스럽다. 그리고 학점이 좀 더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재수강 가능한 과목을 제한하거나 재수강 했다는 표시가 기재되거나 재수강 과목은 A 학점을 안준다든지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학점 변별력이 없어지면, 채용기업들은 출신대학간 차이에 더 주목하게 될 것이어서 결국 학벌타파를 더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될 것이다. 이 경우는 미국을 참고할만하다. 미국의 경우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이 많은 아이비 리그 대학들에서는 A 학점이 많고, 좀 못한 대학에서는 A 학점이 많지 않다. 그래서 출신대학을 모른 채 학점만 봐도 어느 정도 구별이 가능하다. 이런 현상은 아마도 학부 졸업후 대학원을 다른 대학으로 많이 지원하기도 하고, 대학간 교수들의 이동도 흔하다보니, 대학간 학력차이가 잘 알려진 덕분으로 추정된다.
좀 무책임하고 위험한 발상이긴 하지만, 나는 기업들이 자기네 채용철학과 기준을 좀 더 솔직하게 공개하고 개성대로 집행해서 사회전체가 교훈을 얻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현대자동차는 “우리 채용기준은 출신대학 60% 학점 20% 면접 20%입니다.” 삼성전자는 “우리는 출신대학 20%, 학점 30% 직무적성테스트 30% 영어 20%입니다.” SK는 “당사는 관련 자격증 취득자 10점 가산, 외국어 특기 가산점 10점, 그리고 출신대학 30%, 필기시험 30% 면접 20%입니다.”라고 공개하는 것이다. 뒤에 숨어서 무슨 기준인지 확실히 공개하지도 않으면서 상위대학 출신들만 선발한다는 루머가 무성한 회사들이 많으면, 취업자들은 정말 혼란스럽다. 물론 공무원이나 공공기관들은 기존의 방식대로 학력차별,학벌차별 없이 시험과 면접으로만 선발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하지만 사기업들은 자기네 사정과 소신에 맞게 뽑으면 된다. 그러나 지원자들을 존중해서 제발 채용기준을 정확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공개하는 예의는 꼭 지켰으면 한다.
취업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코세니아들이 있다면 위로의 말씀을 하나 드리고 마치려 한다. 코센 웹진에 올라오는 포토엣세이를 보면, 전세계적으로 잘나가는 사람들이 도처에 포진해 있다. 이 엣세이들을 읽고나서, ‘나는 왜 이모양일까?’하고 자괴감을 느꼈던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신도 꾸준히 노력하면 당연히 그렇게 될 수 있다. 포토엣세이의 저자들은 그 자랑거리 뒷면에 그보다 훨씬 많은 어려움과 좌절을 딛고 올라왔을 것이다. 나 역시 대학을 졸업하면서 지원했던 IBM사의 불합격통지 편지를 받아들고 마음이 쓰라렸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다. 합격통지일 줄 알고 설레며 열어본 그 편지의 시작은 We regret… 였다. 영어 불합격 편지는 대부분 We regret로 시작하는데, 도대체 후회할 짓을 왜 했는지 그들에게 묻고 싶었다. 그후에 그들은 후회하더라고 나는 후회하지 말자는 각오를 해보았다. 열심히 한다고 짧은 시간안에 성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오래 내공이 쌓이면 당연히 돌파할 압력이 높아진다. 다행히 이제는 평균수명이 많이 늘어났으니 서둘지 말고 꾸준히 정진하여 각자가 추구하는 분야에서 초고수가 되길 기원한다. 좌절 대신 자주 들어본 멘트를 항상 기억하자: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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