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ESSAY
스위스 연방 재료과학기술연구소 (Empa) 에서의 연구원 생활
윤송학 (myworld)
저는 현재 독일슈투트가르트 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재직중인 윤송학이라고 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7년전, 2009년 12월 크리스마스를 1주일 앞둔 금요일 늦은 저녁, 율리히연구센터에 있는 작은 연구실에서 전화 한 통을 받음으로써 저의 스위스 연방 재료과학기술연구소(Empa)에서의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2010년 2월부터 2015년 10월까지, 5년 9개월 간 스위스 연방 재료과학기술연구소(Empa) 에서 연구원 생활을 하며 느꼈던 점들을 생각나는 대로 자유롭게 써 보려고 합니다.
먼저 스위스라고 하면 많은 분들이 알프스의 빼어난 자연 경관을 생각하실 겁니다. 스위스 시계나 스위스 은행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지요. 아, 물가가 엄청 비싸다는 것도 빼놓을 순 없겠군요. 학생인 분들은 취리히 연방공과대학 (ETHZ) 이나 로잔 연방공과대학 (EPFL)를 떠올리실지도 모르겠어요.
[ 융프라우요흐가 보이는 풍경 (Beatenberg) ]
[ 어느 호숫가 (Zürichsee) ]
스위스에는4개의 국립연구소가 있습니다. 파울 슈어러 연구소(PSI), 스위스 연방 산림•눈•지형 연구소(WSL), 스위스 연방 재료과학기술연구소(Empa), 스위스 연방 수생과학기술연구소(Eawag) (www.ethrat.ch/ko). 그 중에서 Empa는 재료과학 및 기술에 특화된 연구소입니다. (www.empa.ch). 부연 설명을 좀 더 하자면 Empa는 3곳 (Dübendorf, St. Gallen, Thun)에 위치하고, 2015년 연간 보고서에 따르면, Scientific staff 는 501명, Technical and administrative staff는 441명이 된다고 하네요.
[ (좌)Empa Dübendorf 전경 / (중)Empa St. Gallen / (우)Empa Thun ]
Empa Dübendorf 캠퍼스는 Zürich 근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스위스 연방 수생과학기술연구소(Eawag)가 옆에 있어서 공동 연구 진행에 많은 기회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연구소 식당이 2개가 있어 선택의 폭이 넓고 다른 어느 연구소 식당보다 우수한 질의 식사가 보장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자료들을 비치해둔 도서관도 빼놓을 수 없는 제 기억 속 공간이 되겠네요.
[ Empa 식당 ]
[ Empa 도서관 ]
Empa에서의 연구자로서 삶을 돌아보면, 공동 연구가 일상화되어 있던 곳이라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동료와 더불어 만들어 나가던 다이나믹스, 함께 고민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 가던 그 과정들, 도움을 주고, 또 받던 기억들이 많지요. 특히, 제가 속해 있던 연구실은 박사후 연구원 개개인이 한 분야에 특화된 분들이 모여 있었는데, 예를 들면 이런 일들이 일상적이었습니다. 어떤 박사 과정 학생이 자신의 연구 주제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 하는 자리가 마련되면, 최소 3-4명의 박사후 연구원이 그 한 학생의 연구 주제에 대해 자신의 분야에서 어떻게 접근할 수 있을지 각자의 의견을 이야기하면서 토론을 합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논문의 주제가 좀 더 명확해지고, 각자가 논문에 어떻게 contribution할 수 있을지가 정해지곤 했지요. 그래서 제가 있던 연구실에서는 internal/external 공동연구가 아주 활성화 되어 있었고, 고무적인 일로 여겨 졌습니다. 기본적으로 Empa는 연구실간 공동 연구가 장려되었어요. 돌아보면 한국의 정부출연 연구소들에서는 연구실간 공동연구가 어려운 것 같이 보여 아쉬운 부분이기도 합니다.
많은 분들이 그렇듯 저도 하루의 시작은 사무실에서 컴퓨터를 켜고, e-메일을 체크하면서 시작하곤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연구에 관련된 core activity(논문읽고/논문쓰고/실험하고)를 하다가, 보통 아침9시 반에 연구실coffee 룸(커피머신, 냉장고, 주방시설이 붙어 있어요)에 가서, coffee/tea break을 가지며 담소를 나누곤 했지요. 처음 저는 이 coffee chat 이 너무 부담스러웠습니다. 소심한 성격에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이야기를 나누는 거 같았기 때문이지요. 영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도 아니었고요. 하지만 점차 이 곳 문화에 익숙해 지면서, small chat 이 기가막힌 research idea로 변모하는 과정을 여러 번 지켜 보았고, 또 경험했습니다. 연구자로서 사무실에 틀어박혀 골몰해야 하는 일정량의 시간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만큼이나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과 함께 어울려, 자신이 특화한 연구 지식을 바탕으로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토론하고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배웠어요.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의 긍정적 측면으로, 함께 결과물을 쌓아가는 그 과정이 중요하다는 것을요. 첨언하자면 이상과는 달리, 매일의 break이 늘 긍정적이고, 효과적이었다는 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coffee break 이 잡담하는 시간 그 이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한국에서도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조심스럽게 바래봅니다. 덧붙여, 때때로 마련된 환송회 자리에서는 동료들끼리 못다한 마음을 전하기도 했네요.
[ (좌)Coffee break / (우) 어느 환송회 ]
스위스에서의 삶을 돌아볼게요. 제 생각에 스위스에서의 삶은 비교하자면 한국과 독일 중간 어디쯤 되는 거 같아요. 연구 분위기나 환경은 독일에 가깝게 느껴지지만, 연구원들의 업무량이나 업무 시간은 독일보다는 한국 쪽으로 향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스위스에 있을 때는 독일에 있을 때와 비교해서, 좀 더 많은 일을 늦게까지 했던 것 같습니다. 일반화하기 어렵다는 걸 충분히 감안하더라도 말이지요. 스위스는 비싼 물가만큼이나, 급여를 많이 주기 때문에, 실제 생활하는 데는 큰 부담이 없었던 거 같아요. 취리히라는 도시에서의 생활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 짧게 한 문장으로 말씀드리자면, 다양성이 평화롭게 공존하는 도시라고 말하고 싶네요. 부자는 부자 나름대로, 빈자는 빈자 나름의 생활이 가능한 곳. 남여노소, 장삼이사 누구에게나 허락된 시간과 공간이 있는 도시라고요. 그리고 그럴 수 있는 데에는 두 가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첫째는 앞서 말씀 드렸던 기본 소득이 높은 것, 둘째는 (제 개인적으로는) 인구 밀도가 낮은 것이 중요한 요소라고 봅니다. 스위스 인구 밀도:181명/km², 대한민국 인구 밀도: 517명/km² (ko.wikipedia.org/wiki/인구_밀도순_나라_목록). 지나친 말일지 몰라도, 스위스와 비교해 우리나라는 어릴 때부터 경쟁하면서 자라고 비교하면서 살아가는 게 일상인 것이, 인구밀도가 지나치게 높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어요. 어딜가나 사람이 많은 우리나라.
[ 취리히 ]
유럽에 살면서 좋은 점 하나는, 다들 알다시피 각종 휴가가 법적으로 잘 보장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법정 공휴일을 제외하고 5주 (주말제외 25일) 이상의 개인 휴가가 보장되고, 자신이 진행하는 연구, 프로젝트에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언제든 자유롭게 휴가를 쓸 수 있는 여건이 보장되지요. 아시다시피, 휴가는 삶의 쉼표 같은 거잖아요. 저는 휴가 기간을 보통 가족과 함께 유럽의 여러 다른 나라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경험했습니다. 뻔한 이야기지만, 일상에서 벗어나 확보한 일정한 거리가 내가 하는 연구,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시선을 허락해 주는 계기가 되는 거 같아요. 짧지만, 새로운 삶의 경험은 삶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하고, 스스로에게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던 거 같습니다. (“뭣이 중헌디 뭐시 중허냐고”). 더불어 때때로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불현듯 하게 되는 계기도 되었던 거 같아요. 한국에 돌아가야 할지, 유럽에서 계속 살아야 할지 등등. 사실을 말하자면, 올해 여름 휴가때는 특별한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휴가 다녀오는 길 위에서 다가올 일상이 더 버겁고 무겁게 느껴졌었죠.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일상 생활을 숨쉬듯 가볍게 살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일상으로 돌아가 이 글을 쓰다보니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비워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네요. 연구원의 삶과는 조금 동 떨어진 주제인지는 몰라도, 마지막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대체적으로 독일어권 국가들에서는 7월 말부터 9월 중순까지 길게는 한 달 반 정도가 학교의 방학 기간입니다. 아이들은 얼핏 보기에 정말 무용(無用, useless)한 것들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걸 왕왕 볼 수 있어요. 정말 소박한 것들에서 즐거움을 느끼면서 시간을 보낸다고나 할까. 동네 수영장에 가서 하루 종일 수영하고, 하루 종일 축구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면서 소일(消日) 하는 거 같습니다. 어느 날, 야외 수영장에서 이곳 아이들이 노는 것을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런 생각을 했어요. 어릴 때는 많이 놀아야 하는구나. 많이 놀아봐야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스스로 알게 되겠구나. Useless 한 것 같아 보이는 것들이 useful하구나. 무용지용 (無用之用).
[유럽의 시골동네 야외 수영장]
인간의 기본적인 가치를 알고, 그 가치를 추구하면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려면 휴가가 있는 삶, 저녁이 있는 삶, 비우면서 채우는 삶, 이런 것들이 가능해야 할거라 생각하는데, 유럽에서만큼 한국에서 그게 가능하겠냐고요? 언제가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가능해야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