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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d Delusion (이달의 주자 : 이상훈) 리처드 도킨스 저

  제가 소개할 책은, 국내에서도 꽤 유명해졌고 번역본도 출간된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의 ‘The God Delusion’입니다. 저는 영어 원서로 읽었지만 ‘만들어진 신’이라는 제목으로 된 한국어 번역본도 나와 있습니다. 금기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표현은 저자가 이 책을 쓴 자세를 뜻하기도 하고, 이 책을 과감하게 소개하는 저의 자세이기도 합니다. 인류애를 갖고 종교 활동을 하고 있는 전세계의 수많은 사람들, 그리고 어쩌면 개인적으로는 더 껄끄러울 수도 있는 부분인, 친한 친구, 동료, 지인들 중 종교 활동이 크든 작든 인생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 앞에서 소위 무신론자로서의 ‘커밍아웃’을 과감하게 하는 느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부담 때문에 이러한 귀한 기회가 왔을 때 이 책을 선택하지 않기에는, 이 책을 과감하게 세상에 내놓은 저자의 메시지에 크게 감화가 된 독자로서의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책이 쓰여진 역사를 살펴보는 것 자체가 이 책이 말하고 싶어하는 면을 잘 나타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책은 어느날 갑자기 저자가 어떤 초자연적인 계시를 받아서 써내려갔거나, 절대자의 말씀을 받아적은 것이 아닙니다. 거슬러 올라가서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The Origin of Species’(번역본 제목 ‘종의 기원’)도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다윈은 그 당시까지 차곡차곡 쌓인 진화의 많은 증거들에 본인이 스스로 관찰한 것들을 종합하여, 자연선택과 적자생존만으로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 현재 겉보기로는 이렇게나 다양한 생물종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제안했습니다. 다윈이 그렇게 증거들이 쌓이고 내용이 차서 진화론으로 발표되는 딱 그 순간에 있었던 사람이라고 하면 자칫 그를 폄하하는 것처럼 들릴수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비슷한 맥락으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의 ‘거인의 어깨에 서서(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조금 더 볼 수 있었다는 말을 그냥 겸손의 표현이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거인의 어깨에 설 수라도 있었던 위대한 그를 존경하는 것이 맞는 것이죠. 진화론의 핵심이 사실은 이렇게 과학의 발전 과정에서도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난 위대한 천재들의 발견들을 칭송하지만, 그들이 그러한 발견을 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된, 오랜 세월에 걸쳐 쌓여 온 중간 과정들을 다 알지는 못합니다. 다윈과 거의 같은 시기에 거의 같은 이론을 제시했지만 대중적으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의 존재도 과학 발전이 그렇게 점진적이고 확률적인 것임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쓰여진 종의 기원이, 문장 하나하나, 글자 하나하나가 완전무결한 진리라 믿으며 계속 떠받드는 정상적인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비정상이라 보는 것이 과학적 사고의 핵심입니다). 다윈 이후에 엄청나게 발전한 유전학과 분자생물학은 진화가 아니라면 도저히 확률적으로 불가능해보이는 발견들을 마구 쏟아냈습니다. 그리고 도킨스의 이 책은, 이런 것들을 옆에서 보고 있다가 ‘그렇게 확률적으로 불가능해보이는 그런 것들을 가능하게 하시는 것이 우리가 믿는 신이십니다’라고, 반박 불가능한 정신승리를 시전하곤 하는 종교에 더 이상 굴복하지 않겠다는 선언문입니다. 신을 부정하는 것이 어떤 거대한 패러다임 변화가 아니라, 우리 일상 생활 대부분의 근간이 되는 논리적, 과학적 사고가 피로해질 때 마다 ‘포기하면 편해’ 느낌으로 ‘신의 섭리’로 도피하는 지적 게으름만 딱 제거하자는 것이죠.

인류애를 실천하고 있는 수많은 긍정적인 종교 활동에 대해 감히 ‘게으름’ 따위의 말을 쓰다니 정말 이 책의 저자만큼이나 오만 방자한 녀석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 듯 하여, 바로 그 도덕, 윤리의 문제를 언급하려 합니다. 사실은 이 책을 읽기 이전에는 저도 종교가 가진 가장 중요한 기능이 그러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바로 이 부분을 정면으로 지적합니다. 인간의 도덕과 윤리 역시 진화와 같은 원리로, 어떻게 하면 보다 많은 인류를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문제의식으로, 때로는 수많은 시행착오도 거치며 (선거로 뽑힌 나치즘 같은 것들이 그 예가 되겠죠) 덜컹거리며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러한 시행착오와 도전의 결과 발전하는 것이 문명이지, ‘신의 말씀’을 따라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현대의 바람직한 종교활동이라 생각되는 것들은, 기본적으로 너무 오래되어 현대 문명의 실정에 맞지 않는 경전들에 쓰여진 ‘신의 말씀’을 그대로 따를 수는 없으니, 현대 문명의 기준에서 인간을 이롭게 하는 것들을 취사 선택(“cherry-picking”)해서 실천하고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그 현대 문명의 도덕 기준이 이미 있는 것이고, 종교 경전 중에 그것들만 골라내서 적절하게 인용하면서 그것이 종교의 역할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앞뒤가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동성애를 죄악으로 보는 종교가 있을 때,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다음과 같은 진화론적 설명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이 책 저자의 조금 더 유명한 이전 저서인 ‘The Selfish Gene’(번역본 제목 ‘이기적 유전자’) 방식의 설명을 차용해 보겠습니다. 유전자를 다음 세대로 전달하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는 동성애는, 유전자 풀 입장에서는 “자원의 낭비” 일 수 있습니다. 식량 자원이 부족했고 문명이 발달하기 전 한 명의 개체라도 번식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매우 큰 “낭비”이던 시절에는, 과학적으로 설명할수는 없지만 왠지 거부감이 느껴지는 그러한 행동을 종교와 같은 권위로 눌러서 금기시하고 억지로라도 번식 활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 진화적으로 유리한 선택이었을 수 있겠죠. 하지만, 과학 문명이 발전하고 비록 유전자 명령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본성이 있더라도 (‘-더라도’가 중요합니다. 본성이 있으므로 그러한 행동이 옳다는 것이 전혀 아님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자의 그 전작을 비롯한 많은 인간에 대한 생물학적 연구가 안타깝게도 이러한 오해를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개별 인간이 그저 유전자를 전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며 자체로서 존엄함을 인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사실을 인류가 깨달은 지금은 동성애를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볼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낡은 종교 경전의 “말씀”에 따라 동성애를 아직도 죄라고 거리낌없이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답답하고 슬플 뿐입니다.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번역본 제목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라는 책이 문명 발전에 의한 윤리 발전을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고 알고 있는데, 그 책도 구입했지만 부끄럽게도 방대한 양에 압도되어 아직 다 읽지 못했습니다. 언젠가는 다 읽어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떤 종교의 가르침보다도 직접적이고 본질적인,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갈 이유가 등장합니다. 지금 우리가 가진 이 삶이 전부이고, 그것 외에 어떤 다른 영적인 세계 또는 내세의 삶 따위는 없다는 걸 깨닫는 순간 우리가 가진 유일한 바로 이것을 가장 가치있게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죠. 책을 직접 인용하자면, “… the knowledge that we have only one life should make it all the more precious. The atheist view is correspondingly life-affirming and life-enhancing, while at the same time never being tainted with self-delusion, wishful thinking, or the whingeing self-pity of those who feel that life owes them something. (우리에게 하나의 삶만 있다는 사실이 삶을 더 소중하게 만든다. 따라서 무신론자의 그런 관점은 삶을 긍정하고 삶을 향상시킨다. 그것과 동시에, 그 관점은 자기 망상, 비합리적인 희망, 또는 삶이 그들에게 무엇인가를 빚지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느끼는 자아 연민으로 절대로 더럽혀지지 않는다.)”입니다. 요즘 유행하는 YOLO(You Only Live Once)라는 말과는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다른 결론을 도출한다는 것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같은 방향인 것 같기도 합니다.

훈련병 시절 논산 육군훈련소에 위치한 교회를 호기심에 가 보았을 때, 원숭이와 인간의 사진이 담긴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어떻게 원숭이가 인간이 되냐고 훈련병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이 왜 ‘어떻게 언니가 동생이 되냐’고 묻는 것과 본질적으로는 같은 급의 질문이라는 사실이 대중적으로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을까요? 딱 그 정도 수준의 과학적 토양을 가진 문화권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신의 섭리로 도피하고 싶어하는 유혹이 좀 더 크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단순히 사이비 종교 때문에 생겨나는 사회문제 같은 걸 떠나서 (그런 것들은 ‘그것이 알고싶다’ 같은 TV 프로그램에서 잘 다루고 있죠), 논리적/과학적 사고가 어떻게 신이라는 가정 내지는 신이라는 망상(영어 원제를 그대로 번역하면 이렇게 될 텐데, ‘만들어진 신’이라는 순화된 번역본의 이름조차 종교계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결과물이라 여겨져서 안타까웠습니다)을 자연스럽게 몰아내게 되는지를 소개하고 싶었습니다.

물론, 저자의 특유의 도발적인 표현법으로 본인 딴에는 재치있게 표현하려고 했던 것들이, 불필요한 공격이라 여겨지는 것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서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가 예수를 사형시키려 했던 도구라는 점을 다소 고약하게 이용하여 예수가 현대에 사형당했다면 상징을 전기의자로 했을거냐는 부분은 질 낮은 빈정거림으로 느껴집니다. 고대 사회와 현대 사회의 인권에 대한 감수성이 달랐고, 그것이 종교와 관계없이 발전한 인류의 윤리 발전이라는 점을 누구보다 강조했던 저자가 그런 비유의 부적절함을 모를리가 없을텐데 말이죠. 책의 이러한 문제점도 분명히 지적을 해야겠기에 마지막에 이렇게 소개드리며 글을 맺으려 합니다.

제가 이런 큰 주제에 대한 이야기를 주제넘게 할 만한 자격이 있을만큼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는 사람은 아니지만, 굳이 목 아프게 하늘을 우러르기 보다는 고개를 주변으로 돌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계기가 된 것이 이 책입니다. 유일하기에 소중한 남은 이 인생을 어떻게 하면 더 가치 있게 살아갈지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 번 해 봅니다.

  한양대 응용물리학과 손승우 교수님은 스미기 상전이(percolation transition), 동기화(synchronization), 복잡계 연결망(complex network), 게임이론(game theory) 등의 다양한 분야를 연구하고 계시며, 한국물리학회, 복잡계 학회에서 물리학의 대중화 활동도 열심히 하고 계십니다. 뵐 때 마다, 무심한 저와는 달리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어서 늘 본받고 싶은 손교수님께서 어떤 책을 소개해 주실지 많이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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