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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초일류 기업

 

대학 때 단짝이던 친구가 국내 유수 대기업에서 이사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너무 친한 친구였고, 어려운 집안 형편에서 공부를 마쳤던 친구였기에
전혀 배가 아프지는 않았고, 진심 어린 축하전화를 했습니다.
그 많은 연봉으로 쓸 데가 없으면, 나에게 송금해도 된다는 농담도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친구는 제가 부럽다고 하네요.
세상에! 대기업 임원이 나이 50줄에 외국에서 겨우 선임 연구원으로 사는 제가 부럽다니요?

사실 우리 나라 이공계의 원초적 문제는 인재들이 기업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두 교수만 되고 싶어 하고, 아니면 최소한 정부출연 연구소라도 가고 싶어합니다.
사정이 왜 이럴까요? 유교문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기업 자체에 있습니다.
높은 수준의 인재들이 연구할 여건이 전혀 안되어 있는 곳이 한국기업입니다.
늘상 쫓기는 것은 일정과 매출일뿐, 진정한 연구문화가 없습니다.
그러다가 기술이 필요하면 갑자기 급하다고 난리를 피우며 외국에서 통째로 사오죠.
사실 이 문제는 출연연구소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최소한 출연연구소는 연구의 일관성이라도 있습니다.
기업의 연구분위기는 아주 랜덤하구요, 기간을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세계 초일류 기업"들이 세계시장을 석권하는 제품들도 사실은 다 카피본에 불과하죠.
제가 한국 떠난 지 오래되어서 뭘 모르는 소리를 하고 있다면 정말 다행이겠습니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습니까? 외국 선진기업들의 연구개발 역사는 그야 말로 맨 땅에 박치기한 역사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할 수 있는 능력은 모자라는데, 외국 다니며 눈으로 본 것들은 너무 많아서
웬만하면 양에 안찬다고 생각하구요, 어느 정도 진행될 때까지 내버려두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연구자들은 사실 다 연구관리만 하고 있죠. 저는 이 나이에 아직까지 계산하는 짓거리를 하고 있다고
자조 했었는데, 한국에서 온 연구원들은 오히려 저를 부러워 하더군요. 그들은 정말 큰 줄거리를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큰 그림도 잘 그리고요. 엄청난 액수의 프로젝트 금액을 주무르니, 외국의 동향도 저보다 훨씬 잘 아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막상 실질적인 일을 해보라고 하면 입이 움직이던 것만큼 머리와 손이 움직이는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것과 언제라도 직접 할 줄 아는 것은 다릅니다.
위치 에너지와 운동 에너지가 다른 것 처럼 말입니다. 위치 에너지가 운동 에너지가 되는 데에는 넘어야 할 벽이 있습니다.
말로 할 때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지만, 직접 상황을 해결하려면 여러 가지 사소한 문제들을 잘 정렬해 두어야 합니다.

예전부터 우리의 R&D가 모자라다는 이야기는 많았는데, 이제는 웬만큼 올라갔기에 정말 조금만 시각을 바꾸고
조금만 기다릴 줄 알면 될 일입니다. 왜 미국의 금융위기가 금방 우리나라의 경제위기로 돌아와야 하나요?
하체가 허약한 기술과 의존적 경제구조를 가지다 보니 생기는 문제입니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인재들의 우선 순위는 대학교수가 아닌 일류기업입니다.
왜 그럴까요? 월급은 훨씬 많고 연구분위기는 별 차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유학생들이 졸업 후 현지에서 대학교수가 되는 사람들은 제법 있는데,
외국기업에 못 들어가는 이유는 그만큼 외국 일류기업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진사회에서 주류기업의 간부들은 그야말로 그 사회의 실세들입니다.

좌우간 긴 말은 필요 없고, 언제부터 기업에 최고 인재들이 모일 수 있을까요?
만 명을 먹여 살릴 천재가 그립다는 기업들이, 왜 천재를 배양할 토양은 안 만들려고 하는지요?
노벨상보다 훨씬 더 시급한 문제입니다. 이제 기업들도 연구관리만 할 때가 아니라, 연구자체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가장 시급한 첨단기술은 유유자적하며 늘어지는 '게으른' 연구풍토에서 나온다는 것도 알아야 할 때입니다.
제가 지난번 이야기에서 한 것처럼, "생계형 연구"로는 정상에 서기 어렵습니다. 즐기면서 하는 "풍류형 연구"까지 가야죠.
한가하다구요? 아닙니다. 살기 위해서 입니다. 진짜 잘 살기 위해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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