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십보 백보’ versus ‘시작이 반’
2009-06-01
전창훈 : cjun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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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은 숫자를 공급하고 평가하는 학문이다!’라는 것이 제가 정의하는 과학기술입니다. 숫자 없는 (좀 더 멋있게 말한다면 ‘정량적 분석 없는’) 과학기술 연구는 팥 없는 찐 빵이요, 속 없는 만두 정도 되겠죠? 이런 생각을 하다가 우연히 숫자가 들어간 속담이나 격언이 생각났습니다. 해학으로 마음을 풍요롭게 해주는 속담, 격언들에도 숫자가 많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모두들 쉽게 몇 개 씩 말할 수 있겠지만,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분들을 위해 예를 든다면, ‘수염이 석 자(90.9cm)라도 먹어야 양반’이라든지, ‘말 한마디로 천 냥(10억?) 빚을 갚는다’든지 하는 것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오십보 백보는 맹자가 ‘그 나물에 그 밥’을 설명하기 위하여 한 예화라고 하죠? “전쟁터에서 50보 도망 간 군사가 100보 도망 친 군사를 보고 겁쟁이라고 놀릴 수 있느냐?”고 맹자가 말했다고 합니다. ‘대동소이’를 말하는 이 속담이, 주로 많은 잘못을 한 사람이 상대적으로 덜 잘못한 사람까지 싸잡아서 자신의 잘못을 가리려고 물타기 할 때 사용되는 것을 자주 보았기에 저는 이 경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50*2=100이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정확히 두 배 차이가 나는 것이죠. 위의 글에서 도망을 쳤다고 했으니, 마이너스 개념을 가지고 와봐도 -50*2 = -100 입니다. 전진(플러스) 했든지, 도망(마이너스) 했든지 정확히 두 배 차이입니다. 만약 잘못이 있다면 동일하게 처벌이 되겠지만, 그 것은 정성적인 면에서만 동일할 뿐입니다. 즉, 둘 다 감옥에 간다는 것이죠. 하지만 정량적인 면에서는 두 배 차이가 나야 합니다. 예컨대 형량이 5년 대 10년으로 두 배 차이가 나야만 하는 것이죠.
현실세계에서 과학을 하면서도 완벽하지 않으면 다 틀린 것이다라는 플라톤의 이상주의 개념을 머리 깊숙이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내가 틀린 것 처럼 너도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이죠. 다른 사람의 답이 오차를 2배로 줄였다면, 그것을 2배 더 훌륭한 답으로 봐줘야 하는 것이 과학기술적 사고라고 생각합니다. 아참! 그런데 요즘 세대들은 4지 선다에 익숙해 있어서 맞든지 아니면 틀리든지 둘 중 하나로 생각할 확률이 높겠군요.
그러면 이제 ‘시작이 반’이라는 속담으로 가 볼까요? 이 말의 출처는 아마도 서양인 것 같습니다만, 유래를 모르겠습니다. 이 말도 비과학적, 비수학적이죠?
시작은 제로이거나 아니면 겨우 델타(아주 적은 양)에 불과하겠죠? 그러므로 도저히 (시작)=0.5*(전체)라는 방정식이 성립될 수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수식이 철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맞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어째서 저는 ‘시작이 반’에다가는 ‘50보 100보’와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일까요? 물론 뒷받침할만한 논리적 근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가 통닭집을 차렸다고 합시다. 그는 분명 통닭집을 시작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개업잔치에 온 손님들 눈에 보이는 시작일 뿐이고, 그는 훨씬 그 이전부터 많은 고민과 준비를 해왔습니다. 보쌈집도 아니고, 김밥집도 아니고 왜 하필 통닭집이어야만 하는지를 놓고 수도 없는 조사와 고민, 상담을 해온 결과로 개업을 하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가 더 무거운 빙산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다른 사람들은 겨우 시작일 뿐이라고 판단하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는 벌써 반 이상을 온 것이죠. 과학기술도 이렇게 보이지 않는 부분, 보기 어려운 부분들까지 계량해서 숫자를 공급하고 평가하려고 노력해야겠죠?
시작은 제로이거나 아니면 겨우 델타(아주 적은 양)에 불과하겠죠? 그러므로 도저히 (시작)=0.5*(전체)라는 방정식이 성립될 수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수식이 철학적으로 뿐만 아니라, 과학적으로도 맞다고 생각합니다. 도대체 어째서 저는 ‘시작이 반’에다가는 ‘50보 100보’와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것일까요? 물론 뒷받침할만한 논리적 근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누가 통닭집을 차렸다고 합시다. 그는 분명 통닭집을 시작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시작은 개업잔치에 온 손님들 눈에 보이는 시작일 뿐이고, 그는 훨씬 그 이전부터 많은 고민과 준비를 해왔습니다. 보쌈집도 아니고, 김밥집도 아니고 왜 하필 통닭집이어야만 하는지를 놓고 수도 없는 조사와 고민, 상담을 해온 결과로 개업을 하게 된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보이지 않는 수면 아래가 더 무거운 빙산처럼, 눈에 보이는 것만 보고 다른 사람들은 겨우 시작일 뿐이라고 판단하지만,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는 벌써 반 이상을 온 것이죠. 과학기술도 이렇게 보이지 않는 부분, 보기 어려운 부분들까지 계량해서 숫자를 공급하고 평가하려고 노력해야겠죠?
제 시각에 좀 공감이 가시는지요? 아니면 너무 억지춘향 아니면 아전인수격 해석인가요? 어쨌든, 혹시 중요한 일의 시작이 두려워서 차일피일 미루시며 시간만 보내시는 분들 있으시면 용기를 가지고 우선 저질러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벌써 반은 끝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반도 ‘운칠기삼’의 겸손하고도 결연한 마음으로 밀어부치시면 잘 끝나실 것입니다. 건투를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