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안정성versus 직업의 유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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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젊은이들에게는 일자리 찾기가 아주 골치아픈 문제인 모양이다. 경제가 성장기에 있을 때는 일자리가 늘어나지만, 자본주의가 성숙기로 접어들면 일자리가 없어지고 빈부차가 심화된다. 사람으로 치면 활발한 청춘을 보내고, 관절이 시끈거리는 중년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처럼 고속성장을 해 온 사회는 성숙 현상이 골고루 나타나기 보다는 편향된 노화가 진행될 수 있다. 아직 그렇게 늙지는 않았는데, 심하게 약한 부분이 생기는 것이다. 고용이 여기에 속하는 부분인 것 같다.
복잡한 이야기는 치우고 본론으로 바로 가자. 젊은이들은 졸업하고 일단 바로 취직하고 싶다. 그래서 내 손으로 내 인생을 꾸려보고 싶다. 이해된다. 나도 그랬고, 젊은이들이 보는 늙수구리 아저씨들 전부 젊을 때 그랬다. 그렇게 시작하여, 친구들과 당구 칠 때 게임에 져도, 밥먹을 때 한 번 거하게 쏴도 부담없으니 정말 행복했다. 어른이 다 된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 후 인생이 마냥 행복했을까? 아니다.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이 크다. 다른 길로 갔더라면 더 잘되었을 보장은 없지만, 아쉽다. 중늙은이 아저씨들 문제만이 아니다. 그 엄청난 스펙을 쌓아서 대기업에 취직하고, 신의 직장이라는 금융기관이나 공사에 취직한 “배부른 인간들”도 만나면 한 숨 쉬고, 이직을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너무 당연한 일이다. 내 적성이 무엇인지는 무시하고 남들이 알아주는 자리에 오르려고 청춘을 보냈기 때문이다. 내가 정작 무엇을 원하는지는 생각을 적게 해보고 살아왔다. 이런 사회-문화적 강요를 그 누구도 쉽게 피할 수는 없다.
그래서 시행착오를 몇 번 해보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약간의 경험을 통해 좌충우돌해보면, 무엇이 거품이고 무엇이 진짜인 지 알게 된다. 그리고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면, 남이 우습게 봐도 괘념치 않을 용기와 지혜도 생긴다. 그래서 일을 더 열심히 하게 되고, 주관적 자기 만족과 객관적 성취까지 얻을 확률이 높아진다. 그러나 여기에서 직업의 유연성이 주어지지 않으면, 이론적인 가설로 끝난다. 우리 사회가 아직 이렇다고 생각한다. 너무 직업의 유연성이 없다. 그래서 카이스트에서 정년심사를 까다롭게 했을 때, 쫓겨난 교수라면 지금 어디에 있는 지 추적은 아마 어려울 것이다. 외국으로 다시 나갔거나 아니면 그 치욕을 영영 지울 수 없어 늘 울분을 가지고 살고 있을 지 모른다. 한 번 정해지면 바꾸기 어려운 곳에서 밀린 탓이다.
몇 가지 습관이나 증거들을 보자. 한국 대학생들이 요즈음은 영어공부만 한다지만, 옛날에는 전과목을 포함하여 진짜 공부를 안했다. 데모 때문이다. 당시에 공부를 접고 데모한 것을 탓할 수는 없다. 정치판이 엉망이면 아무리 잘해봐야 소용없는 사회가 될 터이니까. 그런데 그 시절에 대학을 나와도 꼭 전공을 물었다. 취업에서, 결혼에서, 술자리에서도… 워낙 학벌이 민감한 사회이니, 출신대학을 묻기는 조심스러워 전공을 묻는다. 하지만 고정관념이 더 크다. 기계공학을 전공한 사람은 반드시 기계관련 업무를 해야 한다는 공식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기계공학 졸업자는 기계가 되는 것이다. 재미있는 현상은 문과출신을 이런 제한된 전공으로 얽어매지는 않는다. 교양이 풍부해서인지… 그런데 이공계는 공부를 안했든 열심히 했든, 학사든, 석사든 인사파일에서 전공별로 분류된다.
사회의 중요한 자리들은 여러 관련경험을 해보다가 늦게 시작할 수 없다. 가장 큰 부분이 나이와 자리의 연계문제인 것 같다. 그래서 언론사 기자는 젊을 때 되지 않으면 거의 어렵다. 그리고 그렇게 기자가 된 사람은 그렇게 몇 십년을 기자만 한다. (그래서 식당에서 밥먹고는 돈을 내야 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기자들도 많다고 한다.) 교수는 어떤가? 30대 적정 나이에 임용되지 않으면딴 길을 가야 한다. 그래서 공과대학에는 기름 한 번 손에 안묻혀본, 회로 납땜 한 번 안해보고, 엄청 일찍 학위를 딴 수많은 ‘천재 교수’들이 있다. 그들에게 배운 학생들은 당연히 손으로 직접 제조하는 기술자들을 천하게 보는 눈이 생긴다. 공무원은 어떤가? 어려서 고시붙거나, 아니면 늙어서 거물교수가 되어야 공직이 가능하다. 나이들어서 장관으로 들어간 교수들도 사실, 실세는 아니다. 물장사들 하는 용어를 사용하면, 공직사회에서 ‘바지 사장’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다. 다른 분야까지 다 이야기하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아 이정도만 하자. 언론, 학계, 공직이 다 젊어서 시작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문을 열지 않는 ‘그 들만의 리그’로 갇혀 있다. 그리고 자기들이 제일 잘난 줄 안다. 다행히 요즘 인터넷에 댓글 기능이 있어 그들을 공개적으로 조롱하는 것만, 겨우 가능한 세상이 되어 그나마 위로가 된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대기 만성’이라는 말은 거짓말이거나, 예외다.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빨리, 남보다 먼저 고지를 점령해야 한다는 논리로 전 사회가 바쁘게 움직인다. (평균수명은 계속 늘어간다는데…) 그래서 진짜 명품, 명장이 아직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처음부터 그 업계에 있었던 사람들 절반에, 주변 관련분야를 오랫동안 해 온 사람들 절반이 섞여야 제대로 된 융합연구가 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공대 교수들 최소한 삼분의 일은 대우조선 설계부장 출신, 삼성전자 공장장 출신 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제대로 된 공학교육이 된다고 생각한다. 공학교육은 더 좋은 논문을 쓰는 학자를 배출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가 아니라, 에펠탑이나 자동차, 컴퓨터, 복사기, 구글, 휴대전화 같은 명품을 만들어 낼 엔지니어를 키워내는 것이다. (천재 교수들이 많은 우리나라에서 레일 위를 달리는 그 뻔한 고속열차를 좌석까지 배껴와서, 한국형 고속 열차로 재개발했다고 자랑하다가, 고장으로 자주 선다는 기사들을 접하면 정말 코메디라는 생각이 든다.)
학문이나 산업이나, 가장 기본적인 토양은 ‘서로 분리’가 ‘상호 교류’로 바뀌는 것이다. 언제 이런, 주변을 뒤섞는 객토작업이 이루어질 지를 알 수가 없어 간혹 답답하다. 정부정책이 아니라, 우리 문화의 문제이니 시간이 너무 오랠 것 같다. 대책은 없이 비판만 풀어놓고나니 마음이 오히려 더 불편하지만, 나같은 외부인의 역할이 ‘새로운 시선 공급하기’라고 자위해본다.
항상 직관적이며, 예리한 논조에 가슴이 시원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