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격한 과학, 느슨한 공학 [전창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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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격한데 공학은 느슨하다니, 제목이 좀 이상하죠? 공차(Tolerance)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기계를 만들 때 허용되는 작은 오차를 공차라고 합니다. 작을수록 좋지만, 전혀 없을 수 없기에 허용해야 하는 것이 공차입니다. 동일한 단어를 사회나 윤리에 적용하면 ‘관용’이라는 뜻으로 바뀝니다. 법을 엄격히 적용하고 지킬수록 좋은 사회지만, 완벽할 수 없어 약간씩 봐주는 것, 남의 실수나 방해를 조금 받아들이고 이해해주는 것이 관용입니다. ‘빠리의 택시 운전사’였던 홍세화씨가 프랑스 사회의 똘레랑스를 논하여 한국사회에서도 이슈가 되었던 단어입니다.
‘알다’는 뜻에서 만들어진 단어라고 합니다. 인간이 어떤 사실을 알려면 통째로 알 수 없기에 주로 분석적 기법을 사용합니다. 쪼개놓고 보는 것이죠. 내부를 볼 수 없는 육체를 연구할 때, 해부를 합니다. 여러 변수가 동시에 작용해서 각각의 역할을 알기 어려울 때에는 변수를 하나씩 작용시켜 결과를 보는 분리적 방법을 사용합니다. 그래서 과학에 들어가는 sci- 라는 철자는 나누거나 자르는 역할을 하는 단어에 많이 들어갑니다. scissors, scission, scissure 같은 단어들이 다 자르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즉, 안다는 것은 제대로 자를 줄 안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겠습니다. 석공이 돌의 결에 따라 정을 대고 해머로 때리면, 바위가 한 번에 쩍 벌어지는 것처럼, 어떤 방법으로 자를까 하는 것이 과학적 마인드의 기본이겠죠.
과학은 나누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관념적이고 엄격합니다. 현대과학은 이론과 실험으로 나뉘지만, 출발당시에 실험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과학은 사물을 인식하는 철학, 즉 관념론에서 출발한 것이죠. 이 전통이 이어져, 오늘날까지 박사학위 타이틀이 Doctor of Philosophy입니다. 플라톤의 이상주의라는 것이 이런 과학의 출발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다 허상이고 보이지 않는 이상을 이야기했습니다.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이상주의를 배격하고 실질세계(물질세계)에 대한 가치를 부여했다는군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 과학은 철학, 즉 사물을 보는 관념이나 가치였을 뿐이지, 실험을 통한 인식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래가 물에 살지만 포유류라는 점을 지적하는 놀라운 통찰력을 보였지만, 반면 무거운 물체가 더 빨리 낙하할 것이라는 생각만 하고 실험을 정밀하게 해보지는 않았던 것이죠. 과거의 과학 어디에도 공차의 개념은 없습니다. 실험이 없었으니 공차가 끼어들 공간이 없었던 것이죠. 과학은 완벽하게 짜맞추어지는 논리이며,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일 뿐이지 거기에 어떤 오차가 있는지, 또는 있어야 하는지, 있다면 얼마까지 관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인식은 안보입니다. 오늘날까지도 과학자들에게는 자연의 완벽한 조화에 대한 경외가 주를 이루며 공차에 대한 개념은 상당히 비루하거나 지엽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처음 출발점은 뉴턴과 라이프니츠에 의해 처음으로 개발된 미분학이 출발점이 아닌가 합니다. 작은 수를 개발했고 그것이 아주 작아지면 그냥 제로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수학에 도입한 것이죠. 과학에서의 공차개념이 그 때 처음 만들어진 탓인지, 1700년경 미분학이 만들어진 후 1800년까지 백년 사이에 유럽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때 인류는 처음으로 관념이던 과학을 실물세계인 엔지니어링과 결합하게 된 것이죠. 그 중매쟁이는 수학이었던 것입니다. 과학적 이상에 따라 설계된 도면과 동일하게 만들어지는 물건은 없습니다만, 약간의 관용을 허락하면 완벽하지는 않지만, 꽤 쓸만한 물건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너무 많이 관용하면 싸구려 제품이나 위험한 제품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관용의 허용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이 관용해도 되는 부분과 더 엄격하게 이상적 설계가 지켜져야 하는 부분이 있으며, 이런 구별을 잘하는 정도에 따라 엔지니어의 실력이나 등급이 정해지는 것이죠.
아직도 과학이 ‘오십보-백보’ 논리에 머물렀다면, 조금 차이나는 값이나 많이 차이나는 값이나 어차피 답은 아니기에 어느 것도 과학적 진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면, 과학은 학자들의 영역에만 갇혀 있느라 현대문명을 탄생시키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엄격해야 할 과학에 공차개념이 들어가면서, 과학은 현대문명을 이끄는 공학을 만들어냈습니다.
법이 아주 엄격해야 하지만, 약간의 관용이 첨가되어야만 활력이 생기고 제대로 돌아갑니다. 아주 엄격한 법을 주장하는 집권자들 대부분은, 사회의 정의실현이 아니라 정적들에게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그러다가 종국에는 자기가 그 법에 의해 심판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영향력이 강한 문화 탓인지, 한국의 이공계 전문가들 중에도 과학적 완벽성에 매료되어 공차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공차를 과학적 타락이나 타협으로까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중간이나 중용을 인정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혹시 이런 숭고한 분들이 주위에 계시다면 다음과 같이 말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언제나 완벽하게 알지 못하며, 완벽하게 무지하지도 않은 상태라는 것. 이런 중간적 입지는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과정이라는 것. 그리고 이런 불확실성(Uncertainty)이 결국 우리 삶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실험데이타에 용기가 생기는 글이었요. 가끔 완벽한 예상으로 나오지 않으면 접어야 하나...좀 더 희망을 가지고 고민할 수 있게 될 거 같아요~ㅋㅋㅋ
필자 전창훈입니다. 댓글에 답하는 것은 처음입니다만, 내친 김에 댓글도 열심히 달도록 하겠습니다.^^
xfingers님, 칭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기계공학 쪽입니다.
다음에 만날 기회가 있길 바랍니다.
parkwonji87님은 좋은 이야기를 해주셨네요. 공차 개념이 없으면 실험은 불가하겠죠?
데이터가 너무 정확해보이는 실험은 가짜라고 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실험에 많은 진전있으시길 바랍니다.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읽고 똘레랑스가 사회에만 적용되는 개념인줄 알았는데 공학에도 적용되는 개념이군요. 전산학에는 그런 개념이 없어서 몰랐습니다. 전박사님 글을 읽다보면 엄청난 시공간을 넘나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제발 읽은 걸 까묵지 말아야 할텐데...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맨처음 제목을 보았을땐 hard computing / soft computing을 이야기하는 줄 알았습니다. 예를 들어, 미분방정식의 원함수를 해석적으로 찾기 힘들때, 수치해석적 방법을 쓰게 되며 이때 어느정도 공차가 필요하긴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현상을 미분방정식의 틀에 맞추다보면 이 수학적 방법론의 한계에 부딪힙니다. 그래서 요즘은 수학적으로 딱 떨어지는 방법대신 좀 말랑말랑한 방법을 찾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fuzzy가 있을 수 있고 소위 meta-heuristic 혹은 evolutionary한 방법이 soft computing의 family인데 엄밀한 해를 찾지는 못하지만 높은 확률로 좋은 해를 찾아가는 것이지요. 실제 문제에 엄밀성을 요구하다보면 조금만 문제가 커져도 계산용량의 한계에 부딪히는데, 이런 측면에서 soft computing이 빛을 발합니다.
과학과 관용..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과학에도 '공차'라는 관용적 개념이 있다는게 신기하고 재미있네요 왠지 멀게만 느껴졌던 과학이 조금은 인간적(?)으로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항상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내가 연구에 활용하는 데이터, 연구 방법론의 한계를 논문에 정확히 기술하기가 꺼려질 때가 많은데요(비판의 소지가 될까봐), 기술하신대로 공학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나의 한계(limitation)을 제대로 밝히는 것이 연구를 제대로 하는 방법인 것 같습니다. 공차의 중요성. 불확실성이 나의 정체성. 오늘도 좋은 말씀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창훈 연구원님! 오늘 처음가입해서 읽은 글인데요. 참 글을 잘 쓰시네요.
저는 기계공학을 전공했어요. 요즘 본의 아니게 과학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는데
생각이 이렇게 다를 수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
좋은 분 만나게 되어 기쁘네요. 천천히 알아가도록 해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