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위와 오류
- 4019
- 8
주요 흐름을 따라오며 시대별로 가장 중요한 과학자들을 꼽아본다면, 아마도 초기 과학자로는 아리스토텔레스(BC 300년 전), 중세에는 갈릴레이(1600년 전후), 근대에는 뉴턴(1700년 전후), 현대에는 아인슈타인(1900년 전후)을 선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 많은 과학자들을 선정한다면 들어갈 사람들은 많겠지만, 더 줄일 경우라면 위의 4명중 어느 누구도 배제하기는 어려워보입니다. 위의 위인들 중 가장 많이 비판받은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일 것입니다. 너무 일찍 많은 주장을 하여 상당히 많이 틀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뒤로 올수록 더 많이 신격화된 위인들입니다. 특히 아인슈타인의 경우는 거의 종교에 이르도록 수많은 어린이들에게 각인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뉴턴 역학의 ‘틀린’ 부분을 바로 잡은 상대성 이론 때문입니다. 필자의 개인적인 의견을 밝힌다면, 필자는 뉴턴이 틀렸다고 보지 않고, 아인슈타인이 (속도가 빠른) 특수한 경우를 위해 뉴턴 방정식을 보정했다고 생각합니다. 엄격한 과학적 마인드를 가진 분들이 흥분하여 필자를 몰아붙인다면, 할 말이 있습니다. “뉴턴이 틀렸다면 왜 학교에서는 아직도 뉴턴 역학을 가르치고 있는가?”라고 말입니다. 좌우간 제 의견이 그렇다는 것이니 괜히 화내지 마시길 바랍니다. 별의별 사람 다 있는 곳이 세상이고, 그래서 재미있는 것이 인생이지 않습니까? 절대적인 것이 없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상대성 이론이니, 너무 절대적 잣대를 들이대지 말자는 이야기입니다.
위에서 뒤로 올수록 더 신에 가까운 권위를 누렸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은 언제나 옳았을까요? 아닙니다. 통일장 이론에 집착하여 한참 후대 학자들까지 고생했지만 아직 오리무중입니다. E=mC2를 만든 장본인이지만, 원자력이 폭탄이 아니라 에너지원으로 이용되는 것은 불가능하리라고 예측했다고 합니다. 그의 사후 겨우 20년만에 원자력은 엄연히 에너지원으로 정착되었습니다. 괜히 신성모독을 하는 듯 하여 아인슈타인 비판은 이 정도만 합니다. 뉴턴은 말년에 연금술로 인생을 다보냈다고 합니다. 일반금속을 어떻게 변화시켜 금을 만들려는 일에 여생을 보낸 것이죠. 물론 금은 대과학자의 실험실에서는 안만들어지고, 무식한 광부들이 괭이로 땅을 파서만 나왔습니다. 파문이 무서워 교황 앞에서 머리를 숙였지만, 지구는 아직도 돌고 있다는 독백을 했다는 갈릴레이는 케플러가 주장한 타원궤도를 끝내 이해하지 못했다고 하는군요. “원운동이지, 썰렁하게 웬 타원 궤도냐?” 라는 생각을 한 것이죠.
글의 목적은 대가들의 명성에 흠집을 내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개인에 대한 지나친 권위가 오히려 과학을 더 우스꽝스럽고 유치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과학만큼 독재적인 분야도 없습니다만, 역설적이게도 민주주의는 과학적 사고에 의한 계몽주의가 불러온 사상입니다. 개인은 언제나 틀릴 수 있습니다. 최고의 톱타자도 타율이 5할을 도저히 넘길 수 없는 것처럼, 개인은 얼마나 많이 틀리느냐, 얼마나 많이 맞느냐로 평가하는 것이지, 언제나 옮은가 아닌가로 평가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연구현장에서의 지나친 권위주의가 과학을 망치고, 조직을 망치고, 개인을 결국 파멸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황우석 교수에게 지나친 학술적 권위를 부여하여 개인을 파산시킨 바 있습니다. 그는 학술적 권위를 가지면서 권력과 금력(연구비), 발언권력(언론 플레이) 등 모든 것을 가지게 되었었습니다. 그리고는 본인도 주체할 수 없이 끌어올려졌다가 자유낙하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를 욕하지만, 아마도 황교수는 과학저변의 돌직구형 또는 올인형 노벨상 목마름의 병리학을, 그래서 한국사회 전체를 욕하고 있을 것입니다.
를 해서 송구합니다만,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받기 불과 한주일 전에는 이스라엘 국민들의 메시아로 추앙받았습니다만, 바로 다음 주 정세가 급변하여 사면 없는 십자가형에 처해집니다. 요즘 말로 하면, 여론몰이를 당한 것입니다. 살인강도 대신 예수를 사면하면 안되겠느냐는 로마 총독의 중재안까지 민중들은 거부하며 십자가에 매달라고 부르짖습니다. 이렇게 드라마틱해보이는 마녀사냥이나 포퓰리즘이 아직도 우리 주위에, 아니 과학계에도 존재한다는 것이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가장 이성적이어야 할 과학의 눈이 너무 쉽게 멀어버린다면, 그것은 우리의 수치입니다. 특히 요즈음 소셜네트웍의 팽창으로 포퓰리즘은 이미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스타 과학자를 그리워하는 풍토가 제2, 제3의 황우석 교수건을 다시 만들까봐 걱정스럽습니다. 주변 연구현장에서 직위나 학위 등으로 지나친 권위를 행사하시는 분들, 또 그런 분들을 신격화 하는 추종자들은 결국 과학의 적입니다. 인기 없고 재미없는 과학기술을 선망의 대상으로 만들고 싶은 충정에 하는 일일지라도, 기본적-철학적 하자가 존재하면 싸구려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검증된 이론과 실험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지, 어느 개인을 숭배하는 미신을 과학으로 만들 수는 없습니다. 연구 현장과 대학에서 이런 철학이 지켜질 때만, 직위에 의한 의사결정이 아니라 진정한 소통이 살아날 것입니다. 유교적 상하관계가 엄격한 우리 사회에서 과학의 진정한 권위, 그리고 오류를 범할 수 밖에 없는 개인의 한계를 잘 정리하는 팀웍을 실현하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하지만 진리는 그 안에 자유와 평등을 당연히, 그리고 언제나 포함해야 한다는 말을 기억합시다. 우리는 누구도 신이 아니지만, 우리는 누구나 독재 왕정을 부수고 인민의 자유를 쟁취한 프랑스 혁명 속의 주인공, 민중입니다. 우리 속에 신을 거부하지만, 우리 스스로가 최소한의 민중 역할을 잘 감당하는 과학계를 만듭시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과학의 성과는 어느 유명한 과학자 몇 명이 이루어 낸 결과가 아니라 수 많은 과학자들의 노력이 밑거름이 되어 서서히 기존의 관념이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생각듭니다. 과학계에서조차도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기존 기성 과학자들의 가치관에 쉽사리 도전하지 못하는 풍토가 은근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완벽할순 없지요. 그래서 누구든 신격화하는 건 위험하구요.
스스로 평범하다고 느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번글은 위안이 많이 되네요.^^
브라보입니다요~~
과학계 뿐만 아니라 정치,사회, 작게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동네의 그 누구와의 대화에서도 한편에서는 권위로 부터의 오류와 무언가 왜곡된 결론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그 부작용을 만들고 있는 권위를 은근히 부러워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는 것이 현실인것 같습니다. 풍토가 변하려면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변해야 하는데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을 하루 아침에 바꿀 수 없는 노릇이니 답답한 마음입니다. 어찌 보면 이런 변화가 내가 살아가는 인생속에 아주 짧은 시간동안 무언가 특별한 정책이나 계기가 되어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마음을 버리고 해결의 출발점에서 긴 시각을 갖고 바라봐야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철학의 정립! 올바른 교육! 너무 막연하지만 이게 답이 아닐까합니다. 베르너하이젠베르크가 쓴 '부분과 전체'라는 책으로부터 유럽 선진국에서는 하나의 과학적 사실이 이론으로 정립될 때, 얼마나 많은 토론과 철학적 고뇌가 담겨있는지 알고나서 그 긴 역사동안 차분하고 면면히 정립되어온 그 나라의 그런 풍토가 참으로 부럽게 느껴졌습니다
필자 전창훈입니다. 지나친 권위를 경계하는 것은, 수직화를 좋아하는 한국사회에 특히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민주주의는 새의 두 날개처럼 서로 보완관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의 의견이, 진실보다 자리의 높낮이에 의해 평가된다면 과학도 민주주의도 다 없어지겠죠. 여러분들께서 격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는 누구나 신은 아니지만 혁명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 무척이나 와닿습니다. 제 아무리 훌륭한 발견을 하더라도 결국 과학자도 실수할 수 있는 인간이기때문에 지나친 권위와 신격화는 정말 조심해야겠지요. 훌륭한 글 감사합니다^^
저는 유럽에서 학부부터 공부한 후 귀국해 대학에서 일한 지 20여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우리 과학계의 모순적인 행태에 적응이 안되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과학계의 구성원인 개인이 변해야 조직이 변하고 더 나아가 우리 사회도 언젠가는 변하지 않겠나'하는 희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