쫄지 마! (성지순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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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되었던 한 학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저는 미국동부에서 10년간이나 살았지만 서부를 방문할 기회가 없었던지라, 이번에는 좀 먼 길이지만 가기로 했습니다. 유럽에서 서비스가 단출한 미국 비행기로 가려니 비행시간이 상당히 지루하더군요. 하지만 꼭 비행기를 타려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실리콘밸리를 방문해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후기 자본주의를 꽃피우게 했고, 우리 이공계의 성지라고 할 애플사와 구글 본사를 방문해보는 계획에 마음이 들떴습니다. 혹시 주위에서, “학회 가는 사람이 염불보다 잿밥에 관심이 있다면, 도덕적 해이가 심한 것 아니냐?”고 공격할 수 있지만, 저는 떳떳했습니다. “신자가 성지를 방문하고 싶어 하는 것은 우리 종교의 가장 중요한 신앙심이다. 여행 경비의 일부를 헌금해도 시원찮을 판에 딴지를 걸다니, 진짜 신자 맞냐?”라고 따질 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앙심이 모자란 신자들도 많은지라, 소문나지 않도록 도둑고양이처럼 조용히 움직인 것은 사실입니다.
방문한 곳은 애플사였습니다. 고속도로를 나와 잠시 운전했더니, 한 입 베어 먹은 사과로고가 앞에 나오더군요. 글을 모르지는 않을 터인데, 가까이 가기 전에는 APPLE Company등으로 글자를 써둔 곳은 거의 없었습니다. 자기들 로고도 모르면 외계인이라는 자신감이겠죠? 주변은 직교형으로 이루어진 길들인데, 애플 본사 자리는 둥글게 외곽에 길을 낸 대지였으며 그 둥근 외곽길은 Infinite Loop란 이름을 붙여두었습니다. 프로그래밍을 해보신 분들은 당연히 아시겠지만, Infinite Loop(무한루프)란 프로그램이 잘못되었을 때 발생하는 가장 치명적인 에러입니다. 논리에 문제가 있어 계산이 안 끝나고 계속 돌게 되는 것이죠. 마치 애플을 이끌어 온 거장 Steve Jobs가 프로그래밍은 잘 몰랐다는 자기반성으로 길 이름을 지은 것이 아닌가 하는 재미있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연히 건물 안에는 외부인이 들어갈 수 없지만, 주위에 담이 없는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건물은 5~6층 규모의 흔한 미국식 오피스 빌딩이 몇 개 모인 형상이었습니다. 빌딩 안에 진입은 실패했지만, 입구에는 방문자들이 애플 상품을 살 수 있는 상점이 있습니다. 기념으로 애플로고가 새겨진 옷가지나 모자 등을 사려고 들어갔지만, 허접한 품질과 높은 가격에 경악하여 아무 것도 안사고 나왔습니다. 점심시간 근방이라 쏟아져 나오는 직원들의 관상을 볼 기회도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평균연령은 30세 미만이고, 동양계가 20% 정도는 되어보였습니다. 젊은 사람들, 외국용병들 데려다가 앵벌이 시켜 키운 회사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잠시 들더군요.
약간 떨어진 곳에 있는 구글을 찾아 떠났습니다. 서로 떨어진 거리는, 애플사 직원과 구글사 직원이 점심약속을 한다고 해도 크게 부담 없을 정도였습니다. 구글의 분위기는 애플과 별 다를 것은 없었지만, 훨씬 더 많은 건물을 보유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구글은 생산하는 하드웨어가 없다보니 거의 모든 일을 그 동네에서 처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습니다. 직원들의 평균나이와 동양계 비율이 두 회사가 다 비슷해 보이는데, 상대적으로 주변 분위기는 구글이 더 활기차고 자유롭게 보였습니다. 구글도 역시 회사를 경계 짓는 담벼락이 없었습니다. 주변은 이 회사들 밖에 없어 굳이 담이 필요 없어 보였습니다.
방문해보고 느낀 첫 번째 생각은, 회사주변에 문화공간이나 식당, 상가가 너무 없다는 것입니다. 직원들에게는 출근하고 일하고 퇴근하기를 반복하는 전형적인 미국식 생활이 반복될 터인데, 아마도 내부는 다른 회사보다 훨씬 자유롭고, 여유 공간도 많지 않나 생각됩니다. 그럼에도, 회사 내부의 공간은 여전히 회사이기에 충분히 자유롭다고 할 수 없겠죠.
안 봤기에 너무 과장되어 신격화되는 경우는 인생에서 참 흔한 일입니다. 이번 방문은 이런 신의 경지에 있는 성지를 방문해보고, 그곳도 똑같은 땅에 비슷한 사람들이 일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이 가장 큰 소득이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오는 길에 든 생각은, 한 때 유행하던 키워드, “쫄지마!”였습니다. 게으르기에 쫄고, 고민을 덜하기에 쫄고, 내 것도 소중하다는 생각보다 남의 것이 더 좋아 보여 쫄고, 실체에 접근하기보다 허황된 꿈을 꾸기에 쫄던 습성들을 이제는 버리자는 생각을 한 것이죠. 쫄지 말고 열심히 합시다. 괜히 부풀려졌을 뿐, 별 것 아닌 것들을 다 물리치고 우리들의 신화를 이루는 날까지 말입니다. 그래서 이번 성지순례는 신앙심을 키우기보다는 과학기술계의 종교를 다시 과학과 현실의 자리로 낮추는 ‘신성모독’의 여행이 되어버렸습니다. 현장감을 주기 위해 겁도 없이 올린 개인 사진을 포용해주시길 바라며...
ㅎㅎㅎ.. 결국 겉만 보고 오신거쟎아요? 아라파트 만나러갔다가 아라파트 집 담벼락 앞에서 사진만 찍고 돌아왔다는 김어준총수의 얘기가 생각나는 군요. 그 회사에 계신 코센회원이라도 검색해서 만나보시고 내부도 구경하셨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구글은 사무실 분위기도 혁신적이라던데요. 애플은 잘 모르겠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