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정량적 분석에 관하여: 오십보, 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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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보-백보라는 말은 맹자가 처음으로 한 말이라고 합니다. 맹자가 혜왕이라는 위나라 왕을 만난 자리에서, 정치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주변 나라보다 약간 잘하는 정도로는 큰 의미가 없다는 설명을 하면서 비유로, “전장에서 무기를 버리고 50보 도망간 병사가, 자기보다 약간 더 멀리 100보 도망간 병사를 비웃어서야 되겠습니까?” 라고 한데서 나온 말이라고 하네요. 둘 다 동일하게 찌질한 탈영병이라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이 있는 경우 그래도 남보다 덜 잘못했다며 엉뚱한 도덕적 우위를 주장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작은 도둑이 큰 도둑을 야단칠 권리나 자격이 없다는 의미.
그런데 많은 경우에 큰 도둑이 물귀신 작전으로 작은 도둑을 걸고 넘어질 때 사용됩니다. “너도 나와 동일한 도둑일 뿐이야!”라고 주장하는 경우죠. 이 상황은 절반 정도의 적반하장(도둑이 오히려 매를 든다)에 해당됩니다. 일상에서의 가상 상황을 보면 쉽습니다. 끝내야 할 업무가 있는데, 한사람은 자기 역할의 절반도 안하고 약속이 있다며 퇴근했고, 다른 한사람은 붙들고 씨름하다가 90% 정도를 끝냈지만 완전히 종결을 짓지는 못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출근하면, 이 경우에 종종 ‘절반남’은 ‘90%남’에게 “어차피 다 못끝내기는 마찬가지 아니야?”라며 농담반 진담반으로 동료의 수고를 폄하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개인관계에서야 자기들끼리의 문제이니 관계없겠지만, 정치나 사회문제에 있어서 이 말이 남용되면 균형을 잃고 진실은 왜곡됩니다. 그래서 양비론에 입각한 신문컬럼은 의미가 없습니다. “보수도 잘못했지만, 진보도 잘한 것 없어!” 또는 “진보가 죽을 썼다고 보수도 반사이익만 챙기면 안돼!” 같은 논조 말입니다. 회초리를 맞아야 할 대상을 가려낼 수 있는데도, 싸잡아 단체기합을 주면 토론문화가 없어지고 정의도 실종됩니다. 개인이나 인간사회는 완벽하지 않기에 지나치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거나, 너무 헐렁한 기준을 갖다대면 모두 동일해집니다. 변호인이 형사재판장에서 성경을 인용하여, “누구든 죄없는 자만 돌로 치라”는 엄격한 도덕적 경구를 들이대면 안되겠죠. 그 반대로 너무 허술하게, 세계육상대회 100미터 결승경기 기록을 일반 손목시계로 재면 엉터리가 됩니다. 보통 초침만으로 0.01초를 다투는 그들의 우열을 가릴 수는 없습니다. 사회나 조직에서 적절한 엄격성을 적용한다는 것은 중요한 정책입니다. 엄격성은 공학에서 말하는 Resolution과 상통합니다. 디지털 카메라의 픽셀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픽셀이 너무 낮으면 사진이 선명하지 않고, 너무 높으면 선명도 차이는 별로인데 가격만 엄청 높고, 메모리만 많이 차지합니다. 어느 정도의 Resolution을 얼마나 일관성 있게 적용하느냐가 그 나라의 수준이고, 민주화의 역량이겠죠. (어떤 특정 정당이나 사건을 염두에 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강도질을 한 번 하나 두 번 하나, 다 유죄라는 면에서는 오십보-백보이지만, 당연히 형량에서는 엄청난 차이가 나야겠죠. 유무죄만 가리자고 판사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배심원 제도가 있는 미국에서는 유무죄 여부는 시민 배심원단이 가리고, 유죄로 결정되면 형량은 판사가 정합니다. 과학기술을 전공으로 삼는 우리 내부에서만이라도 오십보-백보라는 말을 가려서 사용하면 좋겠습니다. 이 말은 과학적이지도 않고 수학적이지도 않습니다. 백보는 오십보와 동일하지 않고, 그 두 배나 되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사용할 수 있는 예외를 하나만 인정한다면, 작은 잘못을 한 사람이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당당하게 비웃지 말자는 조언을 줄 때입니다. 즉 겸허한 자세를 강조할 때만 예외가 가능하겠습니다. 그러니 큰 도적이 작은 도적에게, “너랑 나랑은 그래봐야 동일체”라는 억지는, 맹자의 유교적 가치로도 그리고 우리가 지켜야 할 과학적 합리성으로도 가당치 않은 억지입니다. 유교적 가치의 엉뚱한 적용이 사회를 망친다는 주장을 담은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오래 전에 베스트 셀러가 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오십보-백보라는 말의 폐해를 잘 아셨는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이라고 설파했습니다. 피타고라스에게나 아인슈타인, 그리고 우리에게도 백보는 정확하게 오십보의 두 배 입니다. 과학은 우리 직업의 토대만이 아니라, 생활이요 철학이어야 합니다. 정량화가 느슨해진 지나친 반올림은 과학도 아니고 진실도 아닙니다.
과학분야에서 훈련받은 가치관을 일상생활에서도 토대로 삼자라는 얘기를 고사를 통해 풀어나가셨네요. 느슨한 정량화의 폐혜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가 된 것 같습니다.
좋은 의견이십니다.
특히나 과학과 공학분야는 더더욱 정량적 평가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래전 대기업에서 경진대회를 했는데 막판에 점수 순위가 아닌 사업부 별로 나눠주기식으로 시상을 하는 것을 보고 허탈한 적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IMF 직전에 외국기업에 팔리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