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상자가 폭력상자가 된 TV이야기
- 3034
- 3
여기 웹진에 릴레이북 코너가 따로 있는데, 책 이야기로 시작함에, 이번 달 배턴 주자에게 먼저 양해를 구해야겠습니다. 몇 년 전에 나온 ‘괴짜 경제학’이라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으신지요? 영어 원제는 Freakonomics이고 스티븐 레빗(Levitt, 교수)이라는 젊은 경제학자와 뉴욕타임스 기자 스티븐 더브너가 공저한 책입니다. 비전공책을 원서로 읽어본 몇 안 되는 책 중 한 권입니다만, 내용에 깊이 빠져서 헤어나지를 못했었습니다. 책 제목 번역을 ‘괴짜 경제학’이라고 했지만, 노골적으로 번역한다면 ‘변태 경제학’이 좋습니다. 변태라는 말에는 비정상에 집요함도 곁들어 있으니까요. 이 책은 미국사회에서의 여러 잡다한 통계들을 집요하게 모아 중요한 사회현상들을 진단한 책입니다. 우리가 경제학자들에게 배워야 하는 것은 그들은 직접적으로 돈에 관련되는 것뿐 아니라, 전방위적으로 경제학적 가치와 판단을 동원하여 자신들의 영역을 거의 무한대로 확장시킨다는 것입니다. 과학기술도 무한대의 영역으로 확대 가능한데, 우리 스스로 좁은 범위로 제한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통섭이나 융합을 들고 나왔는데, 이것 역시 과학기술계보다 예술이나 인문학계에서 오히려 더 많이 거론되는 실정입니다. 밥그릇의 범위를 넓히면 더 많은 사람과 나누어 먹느라고 우리 밥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나오는 ‘오병이어의 기적’처럼, 나눌수록 더 많아진다는 것을 확신하고 넓은 과학기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책으로 돌아갑시다. 괴짜 경제학은 Super Freakonomics란 이름으로 후편도 나왔습니다. ‘더 심한 변태 경제학’인 것이죠. 후편에 나오는 논제 하나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미국에서 1960년대에 갑자기 범죄율이 엄청나게 증가했다고 합니다. 사회학자들은 전쟁 후 베이비붐 시대를 맞아 인구가 늘어나면서 생긴 현상으로 판단했지만, 저자는 미국사회에 TV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시대라는 점에 주목합니다. 인문사회과학에서 어려운 점은 이런 현상들을 진단하기 위해 실험을 해야 하는데, 조건을 동일하게 맞추기 어렵고 시간도 너무 걸리고 통계처리나 심리적 영향등의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실험 데이터 없는 결론은 주장에 불과하니 설득력이 떨어지고… 어쨌든 여러 학자의 실험을 통해서, TV의 영향이 크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문제는 그다음 스텝인데, 왜 TV가 범죄율을 올렸느냐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입니다. TV가 폭력적인 프로그램을 많이 방송한 탓이라는 고전적인 결론을 저자는 부정합니다. 그보다는 TV를 보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우선 과거에 친구들과 놀던 아이들이 TV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면서 남들과 교감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인간으로 성장할 확률이 높다는 것입니다. 우리 이야기로 돌아가 생각해보면, TV 없던 시대에는 주로 밖에서 친구들과 노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는데, TV 보급 후에는 방콕시간이 많아졌습니다. 요즘 애들은 집이 아니라 학원에 갇힌 신세입니다만…
두 번째는 TV에 나오는 무수한 상품이나 서비스 광고를 보면서, 원래 없던 소유욕도 생기고 자기 자신의 경제적 형편에 맞지 않는 고가의 물건에 대한 구매 욕구도 커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들과 관계를 잘 맺는 사회성이 덜 개발된 부분은 폭력범죄를 키우는 결과를 낳았고, 사치품 광고는 절도-강도 범죄를 키우는데 일조했을 것이라고 저자는 결론 짓습니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작위적인 판단입니다만, 저는 상당히 공감이 갔습니다. 좀 더 생각해보니, TV를 보면 발생하는 현상의 특징은 내가 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TV 프로그램이나 광고와 비교하면 현실은 훨씬 칙칙하고 지질하니까요. 우리 앞에 있는 (혹시 좀 못난) 부모나 배우자, (덜 똑똑한) 자녀가 우리와 함께 세상을 살아가는 동지들인데, 그들과의 인연이나 그들의 수고보다 그들의 능력이나 위치로 판단하려는 경향이 더 커지지 않을까 합니다. 그래서 현실과 가상의 차이 때문에 스트레스가 추가되고, 심한 경우에는 범죄로도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떻게 좀 동의가 되는지요?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자연스럽게 한국의 드라마 문화와 연결이 되었습니다. 부잣집 딸과 야심 찬 남자와의 사이에 제삼자가 끼어들어 이야기가 꼬이는 불륜드라마는 화려한 집과 차들로 대리만족을 시켜주는 부분이 있겠지만, 내가 처한 경제적 여건이 더욱 지질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근거가 충분히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시대의 영웅들이 등장하는 수많은 사극이나 영화는 현실 정치를 잠시 잊고 백마 타고 나타날 정도전이나 이순신을 기다리느라, 칙칙한 현실정치를 더 외면하게 만들 확률도 있습니다. 더욱이 북한과 일본, 중국에 둘러싸인 우리 여건을 활용하여 지나치게 민족주의를 부추길 확률도 있습니다. 현실과 가상을 충분히 구별하여 오락으로만 즐길 뿐이라고, 과민반응하지 말라고 저에게 충고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몇 십년동안 이런 드라마들을 접한다면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만약 가상설정으로부터 영향을 상당히 받을 수 있겠다고 생각되시면 그쪽과는 거리를 좀 더 벌리고, 어떻게든 당면한 칙칙한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더 웃고, 한 뼘이라도 더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노력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어떻게 칙칙해 보이는 현실과 주위를 사랑할 것인가?’ 요즘 제가 고민하는 주제입니다. 모자란 (모자라 보이는) 주변을 좀 더 포용하면 내 모자람도 더 많이 이해받고, 종국에는 더 쿨해지고 더 커질 것 같아서 말입니다. 주변과 잘 화합하고 화해하는 큰 한가위 되시길 바라며…
요즘은 초등학생이나 대학생이나 똑같은 프로그램들을 보며 살고있다는게 걱정입니다.. 런닝맨이나 마녀사냥을 보고 배우는 초등학생들과 그렇게 살아가는 대학생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