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적 기술, 이타적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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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웹사이트에서 뭔가를 주문하거나 행정 서비스를 받으려면 설치하라는 프로그램들이 많습니다. 설치를 시작하면 문제가 있다며 안내가 나오는데, 제 컴퓨터가 한글 윈도우가 아닌 탓에 글자가 깨져서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 내 지인들에게 부탁해야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인증을 위해 휴대전화 번호를 사용하는지 이해가 안 갑니다. 이렇게 되면 휴대전화 소유는 마치 주민등록증을 지참해야 하는 것처럼, 강제규정이 됩니다. 공급자의 편리성만 생각한 이기적 기술입니다. 인터넷은 국경 제약 없이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 가장 매력적인 부분인데, 일부러 장벽을 설치했다니 참 아이러니입니다. 그렇게 복잡한 설치를 요구하면서도 여전히 해킹을 막지 못합니다. 인증용 프로그램을 없앤다고 들었습니다만, 하세월이네요. (자기가 불편하다고 지나친 불만을 제기하는 속 좁음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사이트마다 자주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요구합니다. 한때는 이전 비밀번호로 갔다가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했는데, 이제는 옛날 번호를 사이트가 기억했다가 퇴짜를 놓네요. 그렇게 몇 개 사이트를 돌다 보면, 비밀번호 바꾸는 시기가 다 다르다 보니 기억은 엉망이 되어 결국 퇴출당하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관심 있는 네이버 카페들을 오래전부터 못 들어가고 있습니다. 비밀번호는 메일로 보내거나 어디에 적어두지 말라고 친절하게 겁박하는 사이트들도 있습니다. 이러다가 본인이 죽기라도 하면 가족들이 은행에서 돈을 찾지도 못할 것 같습니다. 실제로 외국에서는 본인 사망 후에 상속이 정해지기 전까지 가족들이 돈을 못 찾습니다. 비밀번호를 가족들이 안다면, 그냥 현금지급기에서 빼면 되는데, 비밀번호를 몰라서 법원까지 가야 합니다. 아마존닷컴 고객이 된 지 10년은 확실히 넘은 것 같은데, 아마존은 비밀번호를 바꾸라고 한 번도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배송처를 요구하거나 결제카드가 바뀔 때만 재차 인적사항을 확인할 뿐이지, 비밀번호 변경을 요구하지 않더군요.
컴퓨터 관련 기술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화장실 변기 한 번 보실래요. 변기 뒤의 물 탱크 뚜껑은 먼지 앉지 말라고 둥글게 디자인된 것들이 많습니다. 그 뚜껑 부분을 평편하게 디자인하고 모서리를 약간만 높으면 그 위에 비누도 놓을 수 있고, 공동 화장실이라면 들고 있는 가방도 올릴 수 있습니다만, 아무짝에도 쓸 수 없게 해놓았습니다. 둥글게 만들었다고 먼지가 앉지 않는 것도 아닌데… 요즘 TV가 얇아져서 벽걸이용이 많이 나오잖아요? 그런데 여전히 매우 무겁더군요. 그런 기계를 벽에 달려면 구멍을 뚫고 제대로 설치해야지, 안 그러면 떨어져서 안전사고 날 지경입니다. 기관이나 업소가 아닌 다음에는 집에서 혼자 설치하기가 어려워 보이더군요. TV를 올려둘 두께가 얇고 키가 큰 가구를 만들어서 그 위에 올리면 훨씬 안전해 보이는데 말입니다. 그 가구 아래 서랍에는 리모컨이며 연결선들을 넣어두면 될 터이고… 실제 사람들이 사용해야 하는 환경은 고려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화질이 아무리 좋아도 설치가 편하고 안전해야 좋은 TV가 되는 것이죠.
차를 잠깐 볼까요? 버스 기사, 택시기사들은 차 내부가 사무실이고 집입니다. 하지만 차들은 잠깐 몰고 가다 내리는 것처럼 설계가 되어 있습니다. 내부를 전부 둥글게 설계하여 수납공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기다리는 동안 차안에서 잠을 자기도 힘듭니다. 차는 움직이는 집이라는 개념이 필요한데, 그냥 교통수단으로만 생각하고 가속력이 얼마인지, 연료소비량이 얼마인지만 따집니다. 요즈음은 혼자서 운전하거나 옆자리에만 누가 같이 타는 경우가 절대적으로 많은데, 승용차는 여전히 뒷자리가 휑하게 비어있고 운전석은 여러가지 장치들로 공간이 좁아터집니다. 앞의 대쉬보드는 아무것도 올릴 수 없어서 먼지만 자욱합니다. 언제까지 이런 디자인이 계속될 지 모르겠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다 서서 샤워하는데, 아직도 대다수의 집은 욕조가 있는 것처럼 흔적기관으로만 상당히 오래 갈 것 같습니다.
재미있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한참 전에 일본 소니사가 아프리카에 오디오를 수출했는데, 리콜이 많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대부분의 기기가 부서진 채 말입니다. 그래서 고객들에게 물었더니, 높은 곳에 짐을 내리려고 올라섰더니 오디오가 깨졌다는 것입니다. 일본상사 직원이, 음악을 듣는 기계를 사다리처럼 사용하면 당연히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고 했습니다. 고객들의 답변이 약간 개그 같지만,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미제 오디오는 끄떡없었다는 것입니다. 일제 오디오가 약해빠져서 생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요즘 갑과 을로 나누어 사회를 보는 시선이 유행인데, 생산자와 사용자 입장에서 문제를 보는 시각도 필요합니다. 생산자 시각에서만 제품을 보면 고객들 눈에는 설계가 이기적이고 관용이 없습니다. 소비자는 제품을 가능하면 다양하게 사용하고 싶어 합니다. 때로는 디테일을 희생해서라도 튼튼한 제품을 원하고, 집에 설치된 다른 제품들과 쉽게 어울리기를 원합니다. 자기 제품만 생각하는 생산자 입장에서는 아무리 다르게 생각해도 창의성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사용자 관점에서 그리고 비전문가 관점에서 생각해봐야 하며, 어떤 환경에서 사용될 지도 여러모로 고민해봐야 합니다.
기억에 남는 설계를 하나 소개하고 마치겠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어느 개인이 경영하는 햄버거집에서 봤습니다. 화장실 변기 물통 위에 수도와 작은 세면대가 있었습니다. 손을 화장실 ‘개인 방’ 내부에서 씻을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수도를 틀어 손을 씻으면 세면대에 떨어진 물이 변기통으로 흘러들어 가게 되어 있더군요. 물을 내린 후에 손을 씻으면 비워진 변기 물통으로 손 씻은 물이 다시 채워지는 구조였습니다. 물도 아끼고 디자인도 깜찍했습니다. 현장을 빨리 벗어나고 싶은 범인들 심리처럼, 화장실 사용 후 바깥 세면대에서 사람들과 나란히 서서 손을 씻는 것은 그렇게 유쾌한 상황이 아닙니다. 이 화장실은 물도 아끼고 사람들을 마주치는 시간도 최소화한 훌륭한 디자인이었습니다. 물건은 넘쳐나는 세상이니, 마구 찍어대기보다는 한 번 더 생각해본 제품들이 필요합니다. 뭔가 고민한 흔적이 고객들에게 느껴져야 감동이 있지 않을까요? 그래야만 고객들이 지갑을 쉽게 열 것입니다.
우리의 IT기술과 인터넷속도가 세계최고라면서도 북한 애들에게 번번히 뚫려버리는 인터넷보안에
큰 실망을 느끼는 보통사람으로서 전적으로 찬성합니다 의견에요.감사합니다
기업에서 특히 해외 수출업체는 현지 마케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한국적인 사고 방식(물론 한국적인 사고방식이 나쁘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예를들면 봉건적이고 군문화적인 사고방식에 입각한 상품/서비스를 마케팅하는 것은 많은 실수가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부분을 다름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좋은 글이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