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과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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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뭐였냐면, ‘이 그림을 오른쪽으로 90도 회전하면, 바뀌어진 그림의 모양은?’ 이었습니다. (오른쪽 그림 위에 있는 두 개의 삼각형에 문제와 답이 다 들어 있습니다.) 제가 문제삼은 부분은 ‘오른쪽으로 회전’입니다. 흔히 오른쪽으로 회전이라면 시계방향으로 돌리는 것을 말합니다. 지금 오른쪽 그림 아래에 있는 배의 조타핸들 앞에 섰다고 생각해봅시다 시계방향으로 돌린다면 핸들 윗부분은 오른쪽으로 회전하겠지만, 아랫부분은 왼쪽으로 돕니다. 그리고 오른쪽 부분 (3시 방향 가장자리)은 아래로, 왼쪽 부분(9시 방향 가장자리)은 위로 움직입니다. 회전은 왼쪽-오른쪽도 없고 위-아래도 없는 운동인 것이죠. 회전운동이란 어떤 중심을 기준으로, 나아가지도 않고 멀어지지도 않으면서 그 주위를 도는 움직임입니다. 아마도 오른쪽으로 돌린다는 말은 배나 자동차 운전에서 나온 표현인 것 같습니다. 핸들을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차가 오른쪽으로 가니까요. 핸들 윗부분의 운동과 차의 꺽이는 방향이 동일하니까요. 하지만 회전운동은 방향을 돌릴 때만 사용하지 않고, 나사를 이용한 잠금장치에도 많이 사용합니다. 시계방향은 나사 또는 볼트가 들어가는 방향, 반시계 방향은 나오는 방향인데, 수학의 회전벡터 정의에도 이렇게 사용됩니다.
제가 이 말에 지나치게 예민한 이유는 어릴 때 겪은 ‘잔혹사’가 떠올라서 입니다. 6학년 때 중학교 배정 추첨을 했는데, 선생님이 추첨방법을 설명하면서 추첨용 원통을 오른쪽으로 두 번 돌리고 나서, 왼쪽으로 다시 한 번 돌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제 키에는 통이 좀 높아서 통 위가 아니라 아래쪽이 더 가까워 보였습니다. 어른인 선생님이 보면 윗부분이 보여 시계방향으로 돌리는 것이 오른쪽이겠지만, 저에게는 반시계방향이 오른쪽이었습니다. 몇 번을 틀린 저를 더 이상 참지 못한 선생님으로부터 바보취급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추첨결과는 좋아서, 주변에서는 나혼자만 모두들 가고싶어하던 중학교에 배정받았습니다. ‘바보의 인간승리’라며 친구들의 축하를 받았습니다. 이런 사소한 단어사용 때문에 불편함을 느낄 때가 또 있습니다. 파란불일 때 건너야 한다고 끊임 없이 교육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뿔싸! 아무리 신호등을 뚫어지게 봐도 파란불이 없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빨간불-노란불-녹색불만 있었습니다. 셋중 하나를 고른다면 그래도 녹색이 가장 파랑에 가깝다는 판단으로 건넜지만, 한동안 색맹인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일전에 한 번 했던 이야기의 재탕입니다.) 파랑의 공포는 국어시간에 더욱 더 커졌습니다. ‘파란 하늘, 푸른 바다…’그 다음 ‘파란 새싹!’이라는 부분을 소리내어 읽으면서 숨이 목에 턱 걸렸습니다. 머리털 나고 파란 새싹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요. 나만 모르는 새싹이 있는 것인지, 내가 정말 색맹인 것인지… 그후 어른이 되어 일본에 가보았더니, 파란 새싹은 없었지만 파란불이 있더군요. 신호등이 정말 녹색이 아니고 파란색이었습니다. 지금은 일본에서는적록색맹들을 위해서 녹색에 청색을 가미한 신호등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위키피디아를 찾아보았더니, 한국-중국-일본은 초-파-남-보까지 구분없이 모두 ‘청’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녹음이 우거진 산은 청산이고, 녹색이 짙은 국광까지 포함해서 청과물이고, 시인 육사도 당신의 고향에 열리는 녹색포도를 청포도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학은 정확성이 가장 중요하고 그 나머지는 필요없습니다. 굳이 다른 것이 필요하다면 재현성이 있어야겠지요. 그러나 재현성도 정확성을 설명하기 위한 보조수단입니다. 과학과는 대조적으로 언어는 정확성과 경제성 간의 타협으로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려면 너무 길어지니까 줄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 줄이면 혼동되니까 그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여 소통합니다. 즉 정확할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표현이 쉬운 방향으로 언어가 진화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확성은 공부로 해결이 되는데, 경제성 때문에 원어민이 아니고는 도저히 알기 어려운 부분이 언어에 존재합니다. 추운 겨울날, 방문을 열면 이미 아랫목을 차지하고 있던 기득권자로부터, 문닫고 들어오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논리적으로 정확성만 따지면, 투명인간이 아닌 다음에는 문을 닫고나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 상황을 개콘 버전으로 번역하면, “들어오고 말고는 모르겠고, 문은 빨리 닫아야 돼!”가 됩니다. 즉, “문을 재빨리 다시 닫는다면 들어올 수 있어!”라는 조건문이 되는 것이죠. 이 긴 표현 대신, “문 닫고 들어와!”로 짧게 소통합니다. 간혹 저 같은 벽창호가 문을 붙잡고, ‘이 문을 닫으면 못들어가는데, 닫을까 말까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고민하며 열린 문으로 찬바람을 들이며 시간을 보낸다면 정말 징~한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어에는 표현만큼이나 눈치가 차지하는 행간이 넓습니다. 그래도 열쇠를 오른쪽으로 돌리라거나, 파란 새싹이 아름답다는 등의 표현은 어떻게든 좀 고치고 싶군요. 너무 정확성에만 무게를 두려는 언어습관인가요?
메르스가 완전히 박멸되어, 모두가 이전처럼 활기 찬 생활로 돌아오게 되시길 바랍니다.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굉장히 정확한 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 글에서 이상한 점을 하나 발견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투명인간이라도 문이 닫히면 들어갈 수 없습니다. 많은 SF소설에서 정의되어 있듯이 투명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이지 물체를 자유롭게 통과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필자 전창훈입니다. ambidext님이 지적하신대로 투명인간이라도 문을 닫고는 못들어가겠군요^^ 안보이면 질량도 없는 것으로 순간 착각했습니다. 억지 변명을 하자면, 안보이면 문을 먼저 닫고 들어왔는지, 들어와서 문을 닫았는지 상대방이 모른다는 점은 있습니다.
초등학교(정확히는 국민학교) 때 시험지를 받아들고 문제를 읽으며 느꼈던 고민이지만 이제는 제가 그런 부정확한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