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에서 국민, 국민에서 시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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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국사교과서로 많이 소란스러운 것같습니다. 그렇다고 사학자도 아닌 필자까지 나서려는 것은 아니고, 관련되어 다른 생각들을 해보았습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지난 달 마지막에 잠깐 언급한 ‘시민의식’이야기입니다. 자 그럼, 우선 사극 분위기로 가봅시다. 한 목민관이 토로했을 법한, “백성들의 눈물을 어찌 닦아줄꼬?” 라는 대사를 봅시다. 옛날에는 국민을 백성이라고 불렸습니다. 백성(百姓)의 어원은 ‘백가지 성을 가진 사람들’, 즉 다양한 사람들(=people)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흰 백(‘백의종군’처럼 없다는 뜻도 있습니다.)을 적용하여 ‘성이 없는 사람들’(白姓)이었지 않을까 합니다. 성이 없다는 말은 집안도 없고 인맥도 없고, 돈(땅)도 없는 그야말로 힘없는 백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글도 못읽고 참정권도 없습니다. 유일한 능력은 농사와 막노동입니다. 조금 사정이 나은 중인계급 사람들은 기술이 있었겠죠.
이런 세월을 동양과 비슷하게 보냈던 유럽에서는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생깁니다. 초기 공화정은 귀족들이 왕에 준하는 대표를 선출하는 것입니다. 통령-집정관(Consul)을 거쳐 수상이나 대통령으로 이름이 바뀌지만, 중요한 것은 최고지도자는 법에 기초하여 국사를 결정한다는 것, 그리고 지도자는 혈통이 아니라 선출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대로 된 공화정은 한참 세월이 지나 20세기 중엽에 겨우 자리 잡습니다. 이때부터 백성 대신 국민이라는 말이 통용됩니다. 투표권은 귀족에서 모든 자유민 남자까지 확장되지만, 여자들 투표권은 제2차대전이 끝난 후 생깁니다. 18세기 말에 기초된 미국 헌법 전문은 “We, the people…”이라고 시작됩니다. 그래서 현대판 공화정은 미국에서 출발했습니다. 하지만 흑인들은 팔푼이보다 못한 육푼이로 낮추어서, 지역구 인구통계에 흑인 한사람을 3/5으로만 계산했던 공화정이었습니다. 이런 굴곡을 거쳐온 나라마다의 공화정 역사는 그 나라 국력과도 비례합니다. 왜냐하면 힘은 모든 국민들이 모여질 때 커지니까요. 단합은 핵융합 반응을 만듭니다. 하지만 융합반응 속에서도 다양성이 질식하지 않을 생태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융합 압력이 너무 커지면 나치나 일제 같은 공룡 국가가 됩니다.
시민 이야기를 해봅시다. 지방자치단체 시민도 시민입니다만, 옛날 시민을 찾아가봅시다. 우선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아테네의 시민’입니다. 현대국가와의 차이는 직접 민주정치라는 것입니다. 즉, 대표를 뽑아 국가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이 국사에 직접 투표했습니다. 인구가 적었기에 가능한 일이죠. 로마시대에도 시민은 자유민이고 참정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로마가 쇠락 후 절대왕정으로 넘어가면서, 시민은 없어지고 귀족과 백성으로 이분되는 사회로 다시 후퇴합니다. 본격적인 시민계급은 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이탈리아반도 근방의 도시국가들에서 생겨났습니다. 그들이 사는 도시는 국왕의 통치에서 벗어나 자유가 보장된, 말하자면 얼마전 중국의 경제특별구 같은 지위를 누립니다. 그리고 그 도시 내에서 부르주아라고 불리는 시민계층은 기술과 돈을 장악합니다. 귀족들도 시민계층이 지불한 세금을 향유했기에, 시민계층은 마침내 귀족을 몰아내고 권력을 쥡니다. 여기까지는 계급투쟁 같습니다만, 시민이 귀족과 다른 차이점이 있습니다. 첫째 그들은 실제적 능력을 가진 집단이라는 것, 둘째 그들은 충분한 대표성을 가질만큼 숫자가 많았다는 점, 셋째 그들은 사회에 적극 참여했다는 점입니다.
프랑스에 사는 한국사람들은 프랑스 사람들의 게으름을 자주 성토하는데, 필자도 동의하는 부분이 많습니다. 조상 잘 만난 덕에 지금껏 잘 산다고 우리끼리 비웃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일요일에 있는 대통령 선거 투표율이 80%가 넘는다는 사실입니다. 부침이 많은 역사를 지나왔으니, 게으르다가도 한 번쯤은 꼭 부지런해야 할 때를 아는 것입니다. 이런 시민의식만으로도 국가가 훨씬 잘 살게 됩니다. 그리고 국민들의 정치참여도가 높을 때 보수-진보의 충돌도 적어집니다. 표로 말하지 않은 다수가 자기 편이라고 서로 우기느라 정쟁이 심화되니까요. 국민들의 정치 참여율이 높아지면, 정치인들은 우기는 대신 국민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래서 정치성향을 가진 수많은 시민단체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은, 자신들의 주장만 앞세우지말고 시민들의 정치참여를 높이는 일에 더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표의 결과대로 현재를 인정하고 천천히 개선해나가는 것입니다. 침묵하는 다수는 반드시 자기 편이라는 맹신을 내려놓고, 그들이 의견을 표시하게 독려하는 것이 시민단체들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 있냐고 성악가들에게 물어보았더니, 먼저 큰 소리를 내고 그 다음부터 소리를 다듬으라고 하더군요. 먼저 아름다운 소리부터 내고 그 다음에 성량을 키워나가는 방법으로는 좋은 소리를 내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훈련을 통해 상당히 좋은 소리를 낼 수 있다고 합니다. 사회도 비슷해보입니다. 식견이 높은 사람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많이 참여한 다음 참여의 질을 높이는 것, 이 방향이 높은 시민의식을 가진 사회들이 걸어온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