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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과 애국심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소위 말하는 정체성입니다. 정체성은 손익은 물론이고 선악을 평가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제가 생각해본 정체성의 우선순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성별-나이-가족-국가-언어-직업-종교 순입니다. 아마도 신앙생활에 열심인 사람은 종교가 맨 앞에, 일에 몰두하는 사람은 직업이 좀 더 앞으로 순위가 바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그리고 나이가 제일 중요한 정체성이 아닌가 합니다. 남녀의 정체성 속에는 결혼유무가 포함될 것이고, 나이에는 시대에 따른 사고방식이 들어있습니다. 화성에서 왔다는 남자들과 금성이 고향이라는 여자들은 결혼 후 2년정도 지나면 서로가 다른 별 출신인 것을 매일 확인합니다. 한편, 이집트 돌비석을 해독해봐도 “요즘 아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문구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대간의 불통은 동서고금을 관통합니다. 일전에 한창 인기 있던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는 직업에 대한 정체성의 선언입니다. 하지만 이런 여러가지 정체성을 밖으로 들어낸다고 별다른 인센티브가 없어 부지불식간에 은연중 작동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자주 보이며, 드러내면 인센티브가 분명한 정체성이 ‘국가와 민족’입니다. 식민통치를 거쳤고 남북분단과 전쟁을 치룬 한반도에서 특히 강렬한 외연적 정체성이 국가입니다. 국수주의자들에게 균형을 잡아주기도 어려운 것은 인센티브 때문일 것입니다. 성별과 나이에 따른 정체성을 아무리 부르짖어도 특별한 이익이 생기지 않습니다만, 국가와 종교에 대한 충성은 부르짖으면 상이 따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권력이나 인기와 돈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애국이나 ‘믿습니다!’를 크게 외치는 사람들 중 진정한 애국자나 신앙인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남들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까지 세뇌시켜 국수주의자와 광신도가 됩니다.

“과학에는 조국이 없지만, 과학자에게는 조국이 있다.”는 말을 황우석 교수가 한 적이 있지만, 원래는 프랑스가 독일제국에 점령당한 때에 독일에 협력을 거부한 파스퇴르(Pasteur: 1822-1895)가 한 말이라고 합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이라는 단편소설과 시대가 동일한1870년 보불전쟁 당시입니다. 파리코뮌이 결성되었고 독일제국의 황제 빌헬름 1세가 베르사이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대관식을 치른, 아주 복잡한 시대였습니다. ‘마지막 수업’은 필자가 고등학교 다닐 때 영어교과서에 나왔는데, 놀랍게도 일본교과서에도 있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이 훌륭한 이야기를 정작 프랑스 사람들은 잘 모릅니다. 한 20명쯤 물어봤는데, 그들이 한결 같이 도데의 다른 작품들에는 친숙했지만, 마지막 수업을 아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아마도 유럽통합을 거치면서 국가간 적개심을 유발할만한 내용들은 교육과정에서 배제된 것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교토의정서에서 파리협약에 이르기까지 앞으로는 국경을 넘어 세계인이 같이 일해야 할 프로젝트가 많습니다. 그리고 우리 것만 팔고 너네 것은 안산다는 논리로 무역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정치환경상 정도가 지나칠 수 밖에 없는 한국에서의 국수주의라는 벽을 이제부터는 조금씩 헐어내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우리의 역량은 그 정도의 자신감과 포용력을 가져도 될 시대입니다. 그런데 지식인들은 극우파들의 손가락질이 두려운 지, 이 문제에 너무 소극적입니다. 신은 그들만의 편이라는 유대교 신앙을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면 얼마나 유치한 일인가요? 우리는 어느 국가에 속하기 이전에 지구인입니다. 앞에서 말한 모든 화성인과 금성인도 이미 귀화한 지 오래된 지구인입니다. 물론 세계시민주의가 지나치면 무정부주의와 통하여 무질서한 세상이 될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느 것에나 균형이 필요한 법이죠. 그래서 필자는 여권 없는 세상까지 꿈꾸지는 않고, 여권은 소지하되 비자는 필요 없는 세상을 지지합니다.

다소 황당한 주제를 선택한 이유는 ‘기우’라고 할만한 엉뚱한 고민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만약 혜성 하나가 지구로 접근해오고 있고, 그 궤적으로 볼 때 3년 후 지구와 충돌할 확률은 50% 이상이라는 정보를 우리가 알게 되었을 때, 지구인들은 국가간에 효율적으로 협력하여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아마 확률을 다시 계산해보고, 충돌 장소가 자기 나라에서 가까울 지 멀 지를 계산하느라, 그리고 누가 얼마를 내며, 누가 헤게모니를 쥘 지 갑론을박하느라 최소한 1년은 보내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환경-에너지와 생명과학 등 여러 분야에서 혜성충돌과 유사한 상황이 앞으로 자주 생길 것입니다. 겨우 지구 무게의 백분의 일만한 혜성의 충돌에도 우리는 아마 다 사라질 것입니다. 현충일을 맞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많은 분들을 생각해보는 시절입니다. 호국영령들이 궁극적으로 지켜야 했던 것은 우리도 마땅히 지구인으로서 누려야 할 자유와 평화였기에, 목숨까지 내어준 그분들은 애국자이면서 동시에 진정한 지구인이요, 휴머니스트들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우리 과학기술의 철학이 국가를 넘어 세계로 더 많이 경계를 넓힐 수 있길 바랍니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물리학을 깨우치면서 우리에게 국경이 장벽일 수 없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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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지구인을 위해 존재하여 지구를 파괴해왔으니 이젠 과학의 힘으로 지구를 지켜야 할 때까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독수리 오형제에게 미루고만 있기엔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