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바른 생각을 넘어 유연한 생각으로
- 1280
- 3
융합형 지식인이 되고 싶어 요즈음 새로운 분야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가니, 전반전은 끝났고 후반전에 만회골을 넣어야만 하는 축구 선수처럼 시간에 쫓깁니다. 최소한 비겨야 연장전이나마 넘볼 수 있기에 마음이 급합니다. “그냥 지고말지 뭐!” 하는 약한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승부야 관계 없고, 자신을 극복하려는 노력마저 안할 수 없기에 마음을 다잡습니다. 그런데 상당히 어렵네요. 무뎌진 기억력이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 때가 많습니다. 밑줄이 그어진 것으로 봐서 이미 공부한 용어인데 여전히 새롭습니다. 금방 통성명을 하고도 돌아서자마자 다시 또 이름을 묻는 실례를 범하는 느낌입니다. 기억력만이 ‘내부의 적’은 아닙니다. 논리가 체계적이지 않거나 서로 상반된 설명을 하는 부분에서는 진도가 안나갑니다. 다른 자료들을 찾아보면 될 터인데, 무책임한 저자들을 성토하느라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우리가 배우는 교재들이 완전한 경전이 아니라, 각자의 주장이라는 것을 점점 알아가고 있습니다. 서양책들은 너무 쓸데 없는 말이 많아서, 요점만 꼭꼭 찝어주던 한국의 입시책들이 그립습니다. 인간은 진리를 한방에 파노라믹하게 볼 수 없으니 여러 각도의 진실을 보여주려는 저자들의 노력일 것입니다만, 엑기스(extract) 섭취에 익숙해진 학습자에게는 죄다 사족일 뿐입니다.
결혼을 하고 첫 애도 태어난 후 늦게 유학을 갔을 때 만난, 어떤 도사같은 한국인 선배 유학생의 일갈을 잊을 수 없습니다. “엄마 밥 먹고 다닐 때 공부를 다 마쳤어야죠!” 늦깎이 유학생이 내부와 외부에 수많은 적들을 뚫고 가야하는 현실을 잘 표현한 말입니다. 그런데 공부를 안하다가 늦게 시작한 것도 아니고, 계속 해오던 공부를 하는데도 진도가 더딘 이유가 뭘까요? 약해진 기억력 때문에 불리하다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경험과 다른 지식이 많아서 이해도는 훨씬 빨라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면 약해진 기억력은 강해진 이해력과 상쇄되어 최소한 학습진도는 비슷해야 합니다. 하지만 고령자들이 외국어나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속도가 젊은이들에 비해 아주 느립니다. 일전에 글을 쓰면서, 경험이 오히려 독이 될 경우가 있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자기 지식과 비슷한 분야를 배운다면 경험과 선지식은 아주 유용합니다만, 새로운 분야를 배우면 이전의 지식과 경험이 편견으로 둔갑하여 오히려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이 유연하지 않아서 상상력이 제한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목에서 사용된 ‘올바른 생각’은 정의로운 생각이나 틀리지 않은 생각, 즉 진리에 더 가까운 생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올바른 생각은 시간상 현재와 공간상 문화가 비슷한 우리 주위에서만 틀리지 않은 생각이라는, 한정적 의미를 포함합니다. ‘올바른 생각’을 가지는 순간, 다른 아이디어들은 전부 틀린 생각으로 분류 가능합니다. 그래서 나이 들어가며 가져야 하는 생각은, 선악이나 진위에 좀 더 중립적인 ‘유연한 생각’입니다. 선과 악이 뒤섞이거나 진실과 허위가 범벅이 되어도 좋다는 말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살아오며 지나치게 편가르기를 해왔기에 ‘올바른 생각’은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연한 생각에 익숙한 젊은 세대들은, 오히려 반대로 올바른 생각에 더 집중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정리가 되는군요. 젊을 때 올바른 생각에서 출발하고 나이와 더불어 점점 유연한 생각으로 두뇌 소프트웨어를 바꾸어가는 것입니다. 미지를 탐구하는 과학도 우리에게는, 세대와 관계없이 유연한 생각이 정말 중요합니다. 새로운 과학적 사실을 처음으로 맞닥뜨린다면, 올바른 생각만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으니까요.
제 스스로가 만든 학습이론이 있습니다. 이름하여 도자기론입니다. 좋은 도자기를 만들려면 우선 좋은 흙을 체로 잘 걸러야 합니다. 흙을 고르는 것은, 사람으로 말하면 좋은 유전자를 타고나야 하는 부분입니다. 그 다음은 물을 부어 반죽을 만들고 회전판에 올려 형상을 만듭니다. 좋은 반죽과 형태는 좋은 성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어느 정도 굳어지면 끌로 글씨를 새기거나 붓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집중적으로 교육받는 청소년 기간입니다. 이제 가마에 넣어 초벌구이를 하고 다시 유약을 바르고 재벌구이를 합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아름다운 도자기는 방수처리까지 됩니다만, 형태가 다 굳어지고 유약까지 바르고나면 이미 용도가 정해지고 업그레이드는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올바름은 관습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연함은 자기성찰과 공부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부를 많이 할수록 끌로 새기기 쉬운 표면을 유지해야 합니다. 반질반질한 유약은 관에 들어가기 직전에 발라도 늦지 않을 것 같습니다. 스스로 부러지기도 쉽고 남들에게 상처주기도 쉬운 ‘올바른 생각’을 넘어서, 흡수력이 좋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유연한 생각으로 가득 찬 과학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공부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이 존경스럽습니다. 저도 나이를 먹어갈수록 유연한 사고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고가 유연하지 못한 사람과는 일하기도 참 힘이 듭니다. 끊임없이 생각하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이 중요하겠지요
유연한 생각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볼 수 있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