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과 언어
- 1894
- 5
- 1
현대인은 언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말도 진화하지만, 수입되는 영어-프랑스어-스페인어에 중국어-일본어까지 마구 섞이고 있고, 영어약자 쓰나미는 이러저리 부유하는 개념들끼리 좌충우돌시키고 있습니다. 회의중에 무한 반복되는 약자를 혼자만 모르는 것같아 스트레스 받았던 기억이 다 한 번쯤 있었을 것입니다. 잘 알아듣는 것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사람들도 그 약자를 모르면서 아는 체 ‘연기’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는 씁쓸했던 적도 있었나요? 실제로 제가 당한 경험입니다. 아파트 단지 이름을 외국어로 어렵게 짓는 이유는 시부모의 방문을 싫어하는 며느리들 때문이라는 블랙코메디는 이제 아재개그가 되었습니다. 요즈음은 외국어를 알파벳 철자 없이 한국어로만 표기합니다. 옛날부터 일본이 해오던 방식인데, 원음과 발음이 너무 다르다며 흉보던 것을 이제는 우리가 따라하고 있습니다. 물론 일본어보다는 한글이 훨씬 원음에 가깝기는 합니다. 한글의 세계화 또는 세계의 한글화는 과학기술을 위해서도 아주 중요한 주제입니다. 자연현상이나 응용을 언어를 통해 사람들에게 알리는 행위가 과학기술이니까요. 여러가지 이유로 어쩔 수 없이 갈지자 행보를 해온 한글화 문제에 완벽한 해답을 제시하기 어렵지만, 우선 두 가지만 제안을 해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외국어의 한글식 표기, 둘째는 외국어의 약자표시입니다.
외국어와 외래어의 한글표기를 살펴봅시다. 조선일보에는 미국수도에 사시는 한 영어고수요, 옛날 조선일보기자분이 가끔씩 영어의 한글표기를 비판하는 글을 올립니다. 여러가지 고민과 연구 끝에 쓴 글들이겠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민망한 주장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는 원발음이 로오즈벨트인데 왜 루스벨트라고 쓰냐고 하고, 요즘 시끄러운 싸드(사드)는 ‘때애드’ 또는 ‘때앳’이라고 써야한다고 주장합니다. 미국에서는 그렇게 발음하는데 왜 영어를 한글식으로 쓰냐는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미국사람 앞에서 “로.오.즈.벨.트”라고 또박또박 발음한다고 해도 잘 못알아듣습니다. ‘이 사람이 왜 갑자기 허리띠 (벨트) 이야기를 하지?’ 라고 생각할 지도 모릅니다. 영어는 높낮이와 장단이 있는 언어입니다. 표기를 한다고 그대로 읽어서 해결이 안됩니다. 그리고 한글로 그대로 적어보라고 전문가들을 불러모아 실험을 해보아도 로오즈벨트가 다수일 지 확실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외국어이니까요. ‘원음에 가깝게’ 만이 아니라, ‘간단하게’라는 원칙도 같이 적용하여 발음을 표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실제 언어도 경제성과 엄밀성이라는 두 배반조건의 타협으로 진화되어 갑니다. 혼동을 최소화해야 하는 언어는 엄밀해야 하지만, 그 엄밀성을 유지하기에 시간과 노력이 지나치면 사람들이 따르지 않습니다. 저도 오래전에 불어 문법책을 출판한 적이 있는데, 한글표기를 문제삼는 사람들이 많았었습니다. ‘앙상블’은 ‘엉썽블’이 다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프랑스 사람들에게 엉.썽.블이라고 발음하면 알아듣는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엉썽~블(르)”처럼 중간에 살짝 꺾어지게 발음하고 뒤는 여운을 남기니까요. 이 엄밀성을 맞추기 위해, ‘중간에 한 번 꺾고, 뒤는 여운을 살짝 남길 것’이라고 다 적어줄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동일 언어인 영국식 영어를 미국인들은 다르게 발음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언어가 전혀 다른 우리는 미국식에 맞추어야 한다구요? 동일언어도 방언이 있고 지역적 차이가 있는데, 다른 언어인 우리가 그 모든 것을 초월해서 원음을 따르라구요? 불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표기하다가는 잘 사용하지 않는 기묘한 모음들까지 동원하여 괴상한 한글이 만들어집니다. 한글표기는 보통의 사용범위에 한정되는 한글 안에 다 들어와야 합니다. 그리고 언어에서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최상입니다. 예를들면 ‘금언’과 ‘금연’은 발음이 다르지만, ‘비전’을 원음에 더 가깝게 ‘비젼’으로 적어도 발음에는 차이가 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차이나게 발음하려면 잠시 멈춰야 합니다만, ‘비젼’을 발음할 때마다 잠시 멈출수는 없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경제성에 맞지 않는것입니다. 그냥 모두가 쉽게 읽고 쓸 수 있는 방식이 좋습니다. 그래서 ‘오랜지’를 ‘어린쥐’로 발음하여, 과일이 쥐새끼(어린 쥐)가 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다만 추천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a를 ‘아’가 아닌 ‘애’로 적을 경우에는 ‘에’가 아니라 ‘애’로 통일합시다. 즉, 오랜지(orange), 애플(apple)로 적는 것입니다. 그리고 e를 ‘이’가 아닌 ‘에’로 표기할 경우, ‘애’가 아닌 ‘에’로 통일합시다. 즉, 레몬(lemon), 데모(demo)로 적는 것입니다. 지금도 은연중에 행해지고 있는 표기법입니다만, 모르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예전에도 이 코너에서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 한국어에서 ‘에’와 ‘애’의 발음차이는 없습니다만, 고유명사를 구분하여 규칙적으로 표기하면 원 철자가 무엇인지 특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영어약자 문제로 넘어가 봅시다. 이 문제는 아주 심각합니다. 너무 많은 약자들이 난무하고 있어서 정보를 전달하려는지, 숨기려는 의도인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논문이나 보고서에는 약어표라는 것을 넣어두지만, 항상 빠지는 약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번 본 약어의 기억이 안나 다시 한 번 앞으로 왔다갔다 하다보면 뭐를 읽고 있는지를 잊어버립니다. 이 문제는 비교적 간단하게 해결가능할 것 같습니다. 모든 페이지에서 약자 (전부 대문자로 쓰여진 단어)는 자동으로 페이지 아래에 각주를 만들어주는 앱을 워드 프로그램에 장착하면 될 것 같습니다. 미리 등록해둔 약자들은 자동으로 각주를 달아주고, 등록이 안된 약자는 약자만 알려주면 다시 저자가 등록하면 됩니다.
외국어의 한글표기는 사용자나 소비자들의 여론을 반영하며 진화해가야 합니다. 국내의 모든 학회의 시작에는 해당분야 몇몇 전문용어들의 한글표기가 논의되거나 발표되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요? 마치 행사시작과 더불어 항상 있던 ‘국민의례’처럼 말입니다. 그럴만한 가치있는 일입니다. 과학기술에서 용어는 개념이라는 추상을 구상의 세계로 끌고 오는 말고삐 같은 것이니까요.
(여적: 신문마다 ‘휴식을 취했다’는 표현을 사용하는데, 성격이 모난 탓인지 정말 눈에 거슬리는군요. 휴식하려고 뭘 ‘취’한다니 여전히 일하는 것 같습니다. 그냥 ‘쉬었다’ 또는 ‘휴식했다’라고 쓰면 어떨지요? )
훌륭한 말씀 항상 감사드립니다. 특히 어린쥐는 MB정권 최대의 코메디였죠. 어린쥐, 쥐새끼는 그분을 향한 전박사님의 오마쥬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