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과 문화 그리고 건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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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학은 과학인가?’ 에 대해 자주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의학이 미신이나 신앙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미 과학적으로 검증된 사실만 적용한다는 면에서 과학보다는 기술에 가깝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다양한 체질을 가진 사람들에게 처방하는지라 의사소통도 엄청 중요합니다. 소통이 중요하다는 것은 감정노동이 포함된다는 말입니다. 문제를 명확히 알고 있을 때는 치료나 처방이 간단하지만 원인이 확실하지 않은 때가 많으니 상당히 종합적인 판단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이런 부분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의학에는 문화적 요소도 강합니다. 한국에서 산모가 출산 후 미역국을 먹는 것은 마치 기독교의 성찬식 같이 뭔가 거룩한 의식에 해당됩니다. 사람의 감정이 건강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를 아는 의사라면 미역국 같은 것 안먹어도 상관 없다고 말하진 않을 것입니다.
언어와 문화가 다른 외국에 나왔다가 건강에 문제가 생겨 치료를 받게 되면 뼈가 뿌러진 것 같은 명확한 상황이 아닌 한, 의료진을 신뢰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나라에서는 의사가 뭔가 횡설수설하는 것 같고 약이나 시설도 형편없다는 방문자들의 불평을 들을 기회가 있습니다. 환자로서는 의사의 사정을 역지사지 하기 어렵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봐도 소통이 시원스럽지 않은 외국인과 마주하게 되는 의사는 얼마나 마음이 불편할까요? 환자의 반응과 대답을 정확히 이해할 수 없으니 오진에 대한 공포도 클 것입니다. 그래서 실험실이나 연구소가 아닌 병원 현장의 의학은 기술-소통-문화의 복합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사건이나 일전의 물대포 사건처럼 의학은 정치의 한복판에 설 때도 있습니다.
저는 한국을 오래전에 떠났지만, 마지막으로 받은 정기검진에서 목구멍을 넘어간 엄청난 굵기의 내시경 파이프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상당합니다. 그런데 프랑스에서는 종합건강진단이라는 말을 들을 기회가 없습니다. 나이 든 사람들 중에도 내시경을 해 본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의료 시스템과 서비스가 좋은 나라이지만 개인병원들이 거의 창고에 가까우리만큼 허접한 곳이 많은 나라가 또한 프랑스입니다. 일차 진료기관인 일반의나 치과의사는 간호사 도움 없이 혼자서 병원을 운용합니다. 그리고 주사는 당장 죽을 병이 아니면 절대로 처방하는 일이 없습니다. 무시무시한 주사바늘이 일단 살을 파고 들어가기만 해도 병이 반은 치료된 것같은 플래시보 효과를 여기에서는 전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런 다른 점들 때문에 한국인들의 눈에 이곳의 의료는 상당히 ‘미개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큰 사고를 당해본 사람들은 프랑스의 훌륭한 의료시스템을 칭찬하는 완전히 상반된 견해를 보입니다.
중고생 시절부터 담배를 피워대는 프랑스 사람들이 많고 술도 자주 마시는데 폐암 발병률은 낮고 평균수명도 아주 깁니다. 자연환경이 좋고 휴가는 많고 그리고 스트레스가 적은 직장문화도 한몫 하리라 생각됩니다. 주당 노동시간 35시간이며 간부들을 제외하고는 퇴근시간 종소리와 함께 전부 사라집니다. 시골구석구석까지 잘 구성된 사회체육도 시민건강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퇴근을 일찍하고 저녁에는 운동하러갈만한 클럽들이 많습니다. 부러운 것은 이런 클럽들이 너무 자연스럽게 굴러간다는 것이다. 저는 작년 중간에 우연히 배구클럽에 들어갔습니다. 늙수구리에다 키까지 작아서 주로 수비에 치중해야 함에도 젊은이들이 저에게 공격가담을 부축입니다. 가끔씩 스파이크로 득점할 때나 어려운 공을 다이빙으로 건져올렸을 때는 그 기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클럽의 구성원들 나이는 70에서 낮게는 20세까지 남녀비율은 6:4 정도입니다. 운동 이외에 직업 또는 나이에 관한 질문은 없습니다. 배구장에 서면 누구나 운동복 입고 나뒹구는 선수들입니다.
가끔씩 한국에서 행해지는 정밀한 종합검진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마도 의료 서비스 가성비가 가장 높은 곳이 한국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병원은 안갈 수 있으면 최대한 안가야 하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의학의 최종 목표는 예방이나 치료가 아니고 건강이기 때문입니다. 지나친 예방으로 생활이 너무 제약을 받으면 안됩니다. 즐겁게 열심히 사는 것을 최대한 도울 수 있는 의학이 최고의 의학입니다. 마치 정치 선진국에서는 정치 체감도가 희미하듯이 의학 선진국이라면 병원의 존재감이 적어야 합니다. 그래야 물 같고 공기 같이 자연스럽게 건강을 누릴 수 있으니까요. 그나저나 이제부터는 오래산다는데 몸건강 뿐만 아니라 정신건강도 잘 챙겨야 하는 시절이다. 하루에도 엄청나게 쏟아지는 의학정보를 전부 믿지도 말고 무시하지도 말면서 내몸에 맞는 것을 잘 골라내야 합니다. 그리고 현대문명을 누리면서도 삶이 무거워지지 않게 욕심은 조금씩 줄이는 것이 장수시대의 지혜일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의학이 문화 그리고 철학과도 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철학은 고사하고 추석연휴 때 너무 먹어서 살만 쪘다구요? 모처럼 많은 가족들과 함께 한 행복한 시간이었다면 과식이 오히려 건강에 기여했을 것으로 확신해도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