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들과 국제관계 - '세계시민'이란 허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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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개국 이상의 국적을 가진 사람들이 모인 국제기구에서 일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재미있는 현상은, 우리 기구에서 동료로 일하는 사람들은 과거 제1-2차 대전 당시 서로 총을 겨눈 ‘주적 국가’들이 많습니다. 일본-독일-이태리 사람들이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 사람들과 같이 일하니까요. 변화가 있다면, 식민지나 열강의 수탈에 시달리던 한국-중국-인도가 이제는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는 정도입니다. 시간이 오래 지나면서, 그들은 ‘외국인’이라는 생각이 점점 ‘나와 비슷한 인간’이라는 쪽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긍정적인 변화입니다만, 한계를 완전히 넘지는 못했습니다. 여권 필요 없이 여행하는 시대가 곧 올 것이라는 전망들이 많지만, 우리 생에는 이런 일 없을 것 같습니다. 시대가 개방되었지만, 국가간의 이기주의는 극복되기 어려운 인간의 고유한 한계입니다. 망나니가 아니라면, 개인은 체면이 있기 때문에 지나친 이기주의를 주위에서 나무랄 수 있고, 본인도 창피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국의 이익만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애국심으로 똘똘 뭉쳐서 비난을 받을수록 더욱 거룩한 순교자처럼 자신을 생각할 것입니다. 그래서 평창올림픽이 열리면, 올림픽은 참가가 중요하다는 이야기는 한쪽으로 흘리고, 우리는 국가별 메달집계에 집중할 것입니다.
이민국가 미국은 이런 한계를 극복해보려고, 이민자들에게 ‘용광로’ 모델을 설파했었습니다. 당신이 어느 나라 출신이든지, 미국시민이나 영주권자로 살면 용광로 안에서 녹아 (원 재료가 사라진) 합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못가서 공허한 메아리라는 것이 증명되자 ‘샐러드바’ 모델로 바꾸었습니다. 섞여서 미국이라는 쏘스가 뿌려지면, 각자가 재료를 그대로 가진 채로 멋진 맛을 낸다는 이론입니다. 그래서 출신국가를 자랑스러워 하는 문화를 인정해주며 오히려 격려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 ‘국가란 공동사회다’라고 배웠습니다. 회사 같은 이익사회와 다르게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고 사표수리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정말 이민을 가서 국적을 이탈한다고 조국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출신국가 사람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이민 2세들 이야기에 따르면, 백인들이 자기에게 영어를 참 잘한다는 칭찬을 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정작 자신은 현지에서 태어나 모국어가 영어이며, 한국어는 서툰데 말입니다. 백인들 눈에 동양인은 언제나 이민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지인들에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조국과 부모를 어떻게 만나느냐로 인생의 90%는 결정된다는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한 사람이 당신 말은 틀렸다고 목소리를 높이더니, 어떻게 90% 밖에 안되냐며 100%라는 것입니다. 흥분한 사람을 달래며, 혹시 그렇더라도 본인 노력분으로 10%는 남겨두어야 하지 않겠냐고 이야기했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유럽에서는 브렉시트 논의가 한참 진행중입니다. 소식을 매일 자세히 전하는BBC는 자주 “Chaos!”라는 말을 하면서도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언론은 ‘보도’를 해야지 ‘주장’을 하면 안된다는 기조인 것 같습니다. 최근의 영국 내 여론조사는 브렉시트 때와는 정반대로 52%가 EU 잔류, 48%가 탈퇴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국민투표를 다시 하자는 의견이 의회에서도 거론되었습니다. 수상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영국의 미래를 모른다는 농담들이 오가고 있습니다. 많은 언론들은 브렉시트가 정말 성사될 지도 의문이라는 견해를 피력합니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10% 향상가능한 이익을 위해서 50% 손해가능한 도박을 하는 것 같습니다. 국가간 경제적 손익은 정치인들이 선거로 평가받겠지만, 브렉시트가 평화를 해치는 방아쇠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 염려스럽습니다. 영국은 자신들의 유럽연합 탈퇴를 결정하고도 스코틀랜드 독립에는 반대하였는데, 이번에는 카탈로니아 독립투표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국가 운영도 인간이 하는 일이라 얇팍한 것인지, 2차 대전 때에는 프랑스와 영국이 한 팀이고 독일과 이태리가 적국이었는데, 지금은 독일과 프랑스, 이태리가 한 팀이고 영국만 따로 살림을 차리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분열을 러시아는 은근히 즐기고 있을 것입니다. 러시아는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 무역을 한 나라입니다. 제2차대전 당시에 러시아와 독일은 자기들끼리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가 뒤통수를 치기도 했습니다. 이런 국제사회에 의리는 있는 것일까요? 이런 사실을 직면하다보니, 예전에 저는 자신을 거창하게 세계시민으로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집 대신 텐트가 더 편한 유목민으로 정체성을 낮추었습니다. 집시라는 다소 낭만적인 단어도 있지만, 춤과 노래에 자신이 없어 그냥 유목민으로 정했습니다. 세계시민이라면 먼저 떠오르는 단어는 ‘바다’였습니다. 그런데 유목민으로 바꾸고나니 떠오르는 단어는 ‘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바다보다 별에 더 정을 붙여보려고 밤하늘을 자주 올려다 봅니다.
그나저나 ‘북핵 위협’이라는 풀리지 않는 방정식 때문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풀 수 없기에 오히려 무관심한 국내 사정이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국가간 이기주의에 근거하여 생각하는 북핵의 위협은 주변국가 모두 다를 것입니다. 중국이 제일 신날 것입니다. 미국-일본-한국을 동시에 견제할 수 있는 마술 지팡이가 북핵이니까요. 미국도 직접적인 위협을 느끼겠지만, 한국-일본 시장에 무기를 잔뜩 팔 수 있지 않을까요? 일본은 이 기회에 국방력을 키우고 평화 헌법을 파기할 명분을 찾을 것입니다. 부드럽게 나가야 할 지, 일전불퇴의 각오로 나서야 할 지 어려운 시국입니다만, 하나 확실한 것은 위기에 대한 국가별 계산법은 전부 다르다는 것을 직시하고 준비하는 것입니다. 개인처럼 국가도 생존 앞에서 늘 외로운 존재입니다. 하지만 뜻이 합해진 국민이 있어 외롭지 않은 국가가 되어야지요. 다 같이 죽고자 하면 다같이 사는 지혜와 용기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작가의 책이 생각납니다. 좌와 우, 남과 북, 동과 서, 소와 대 등으로 나뉘어 당쟁으로... 이념과 사상으로..., 종교의식으로.., 진보와 보수로.. 현재진행형인 분열로 점철되어온 국가라는 이름아래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디로 가야 하나요.. 그저 바람부는 대로 흘러가는 물처럼 묵묵히 살아야 하는 걸까요? 변하는 듯하다가 도로묵이되는 세상이 좀 답답합니다.
우리 모두 확실한 것은 위기에 대한 국가별 계산법은 전부 다르다는 것을 명심하여 사즉생의 지혜와 용기가 필요합니다. 좋은 내용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