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의 민주주의와 원전 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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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중국에서는 시진핑 주석이 헌법에 개인 이름을 올리는 결의를 했다는 보도를 접했습니다. 아마 신이나 그 조금 아래에 존재하는 수퍼맨이라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남의 나라 제도를 내부구조에 대한 이해없이 평가하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만, 기본적인 원칙에 입각해서 양보할 수 없는 기준은 필요합니다. 일전에 어느 잡지에서 아시아의 정치평점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서양기준으로 만든 서양언론사의 작품이니 아시아를 과소평가한 부분도 있을 것입니다만, 아랍지역까지 포함한 아시아에서 정치 A 학점을 받은 나라는 이스라엘이 유일했습니다. 일본은 B, 한국은 C 였습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이 우리나라의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그리고 정치는 4류라고 혹평했던 1995년을 한참 지난 후의 평가로 기억합니다. 저는 이스라엘 내부 정치를 모릅니다만, 이웃과 분쟁의 ‘핑계’로 주변국가들이 정치민주화가 되지 않았기에 주변국 지도자들의 대표성이 없어서 협상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자주 해왔습니다. 갈등을 합의하려고 상대지도자가 서명했는데, 돌아가면 내부 강경파의 반대를 넘지못해 합의서가 다시 백지로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고보니 최근 아시아의 정치사정은 상당히 나아지는 듯 하다가 거꾸로 가는 듯 합니다. 지난 제국주의 시대에 한 번도 식민지가 된 적이 없다는 태국은 비리 혐의의 여자총리가 영국으로 망명했고, 필리핀에서는 마약과의 전쟁을 치루느라 경찰이 총으로 현행범들을 즉격처분하는 와중에 경찰들의 비리가 알려지고, 미얀마에서는 아시아 인권의 롤모델인 아웅산 수키 여사가 소수민족 문제에 소극적이고, 등등의 기사가 아시아 정치는 갈 길이 멀다는 인상을 줍니다. 아마도 아시아는 제대로 된 민주혁명을 겪은 적이 없기에 그런 것일까요? 최근에는 경제가 정의에 우선하게되니 결과가 과정보다 중시되는 문화 탓도 클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시아에서 민주주의는 너무 먼 것 같습니다. 절대빈곤 아래에서는 독재자가 통치하더라도, 우선 사람들 밥을 먹이고 애들 학교에 보내고 전염병에서 보호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하지만 절대빈곤만 벗고나면 경제보다는 정의가 앞서야죠. 정의 없는 경제는 사회를 정글로 전락시킬 것입니다. 그래서 가난을 벗고나면 경제개발보다 정치가 더 중요합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정치는 협잡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실체적으로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한 정의실현을 말합니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최근 한국에서의 촛불혁명은 영국의 명예혁명보다 더 보편적이고, 프랑스의 바스티유 혁명보다 더 평화적이었습니다. 여기까지는 바깥에서 전해지는 이 과정을 보는 저에게도 참으로 감격스러운 승리였습니다. 하지만 신파조의 눈물을 씼고 다시 접하게 되는 현실세계 한국은 또 다른 절망감을 줬습니다. 새로운 촛불혁명으로 들어선 정부인사들이 청문회에서 그들의 부패했거나 혹은 깨끗하다고 결코 말할 수 없는 수치스런 모습들을 보면서, 촛불은 무엇이고 이 역설적 현실은 또 무엇인지 답답하더군요. 대통령이 한 번 바뀌었다고 모든 정의가 실현될 것으로 기대한 저도 역시 왕조시대의 전능왕을 대통령으로 생각하는 시대착오적 정치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최근 신고리 5-6호기 건설문제를 두고 비전문가 토론공청회를 통해 내린 결정도 또 한 번 어려운 생각을 하게 해주었습니다. 이런 방식이 민주적 절차인지, 아니면 행정부의 직무유기인지 판단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의적 민주주의 원칙에는 맞지 않다는 것은 확실합니다. 국민이 다 결정할 수 없으니 선출된 권력이 행정부를 구성해서 결정하고, 입법부와 사법부가 행정부를 견제해달라는 것이 대의 민주주의입니다. 원자력 문제는 상식적으로 너무 낙후된 원전은 일단 정지하고 해체 준비, 이미 건설중인 원전은 계속 건설, 신규는 재생에너지의 가능성을 타진하면서 일단보류라는 아주 단순한 공식이 적용가능한 문제이며, 결론도 그렇게 났습니다. 이런 문제를 공론화에 붙이고 합숙토론을 하면 당연히 참여자들은 자신이 대접받는 것 같아서 좋아할 것입니다만, 그 많은 경비와 일정지연은 누가 감당하나요? 그리고 사사건건 공청회를 요구하면 국정결정은 언제 누가 하나요? 만약 이미 내린 결론을 상황이 바뀌어 다시 뒤집어야 한다면 그때는 또 어떤 공청회를 해야 하나요? 지금 영국은 브렉시트를 겨우 2% 차이로 결정하고는 아무도 모르는 행보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최근의 여론조사는 거꾸로 브렉시트가2% 모자라는 것으로 나와 다시 국민투표를 하자는 의견도 나오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혼란입니다. 이 사태는 이전 총리가 불필요한 국민투표를 제안했으며, 국민들이 현 정치권을 갈아엎을 기회로 브렉시트에 찬성표를 던지며 생긴 일입니다. 한국의 경우는 다행히 현실적인 결론이 났지만, 만약 건설중단으로 나왔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이제 핵폭탄을 가져야 할 지, 말지도 공청회를 통해 국민투표로 결정하자는 여론이 촛불처럼 모이면 어떻게 하나요? 예, 잘 알겠습니다.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는 이야기. 하지만 만약 이런 운동이 벌어지면 막을 마땅한 논리가 없어보입니다. 그리고 국민투표로 결정되면 번복은 어렵습니다. 마치 선출된 대통령을 다시 바꾸자는 이야기가 되니까요. 정치학자가 아닌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조심스럽습니다만, 민주주의는 절차에만 머물러야 하고, 결과를 결정하는 곳에까지 영향을 안미쳐야 합니다. 모든 절차는 민주적이어야 하지만, 결정은 그 절차에 따라 책임을 맡은 사람이 내려야죠. 그래야 민주주의가 강한 제도가 될 수 있습니다. 민주주의 앞에 ‘약한’ 이라는 형용사가 붙으면 민주주의는 더 이상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그래서 민주적 지도자는 국민들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면 되지, 눈치마저 살필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정치가 과학기술의 결정을 대신하는 시대로 가고 있으니, 과학기술인들의 소통능력이 무엇보다 더 중요할 것 같습니다. 당장 모든 이공계 학과 교양과목에 ‘미디어와 과학기술’이라는 과목 정도는 넣어야 하지 않을까요? 혹시 저를 ‘원자력 마피아’ 중 한사람이거나 그 주변인으로 생각하실 것 같아서 개인의 의견을 밣힌다면, 저 역시 원전은 안할 수 있으면 안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미디어와 과학기술’이라는 과목을 개강하는 학교가 생기면, 기존의 기자들에 앞서 저를 먼저 불러주시길 바랍니다. 개혁은 내부에서부터 출발할 때 보다 더 강한 힘을 발휘하니까요.
망년회도 많고 반성할 것도 많은 마지막 달이 벌써 왔네요. 지구촌 구석구석의 코세니아님들에게,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꿈과 낭만을 듬뿍 누리는 연말되시길 바랍니다.
좋은 화두를 던져주셨습니다만,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는 이야기라, 어떤 결론을 내리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