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도와 화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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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을 판단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요? 비록 그것이 동전을 던져서 앞면 아니면 뒷면이 나오는 아주 단순한 이분법적인 문제일지라도… 그렇게 지나온 세월동안 한국사회에서는 정말 소설보다 더 허구적이고도 허무 개그같은 사건들이 많았습니다. 간첩도 조작하던 그 숱한 정치적 사건들 말고도 말입니다. 예를 들면 이태원 살인사건을 봅시다. 솔로몬의 재판을 기대하진 않았어도, 둘 중 하나가 범인은 틀림 없는데 특정할 순 없으니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는 논리로 둘 다 살인죄로 판결하지 못했습니다. 뒷북도 그런 뒷북이 없게, 18년이나 지난 다음 다시 ‘용의자’를 미국에서 불러들여 감옥에 넣었습니다. 다른 예를 들어본다면, 괜히 힘을 다 잃은 이전 정권을 또 까는 것같아 좀 비겁해보이긴 하지만, 사실 최순실 사건의 경우 가장 반성해야 할 집단은 소설가들이며 그들은 상상력 부재로 가슴을 쳐야 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마치 대칭적 구조를 가진 두 개의 사건, 우리가 다 들어본 황당무개한 미술작품 시비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천경자 화백의 미인도라는 그림은 우연하게도 작가에게 알려졌고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간혹 다작 화가들 중 자기 작품을 못알아보고 위작이라고 말한 사례들도 있어 작가의 말만 믿고 판정하기는 어려운 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문제는 프랑스 그림 전문 감정그룹이 투입되어서 과학적 분석을 해보고는 진품일 확률은 2ppm에 불과하다고 판정했는데도 결론은 진짜라고 났습니다. 더욱이 검찰은, 프랑스측의 방법으로 다른 진품을 확인해보았더니 진품일 확률은 4%에 불과했다며 감정팀의 결론을 배제합니다. 문제는 프랑스팀이 돌려본 결과가 아니고 자기네들이 발표한 결과인데, 여러가지 하드웨어들을 통해 데이터를 받고 엄청나게 복잡한 소프트웨어로 처리한 결과일 터인데, 그들의 도움없이도 결과도출이 가능했다니 그 천재성에 입이 떡 벌어집니다. 이런 꼴을 당하는 작가나 유족들은 정말 환장할 노릇일 것입니다. 유일한 방법은 그냥 별일 아닌 것으로 넘어가는 것이죠. 진실이니 거짓이니 하는 것이 죽고사는 문제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그 한참후에는 반대 사건이 생겼습니다. 화투를 그린 조영남 ‘화백’이 뉴욕시 한복판에서 전시회를 한다는 뉴스는 일찍 본 바 있습니다. 소재도 독특하고 재주도 많은 사람에 대한 칭찬과 질시가 범벅이 되고 있던 차에 ‘사실은 대작’이라는 것이 알려졌습니다. 1차 재판에서는 유죄, 2심에서는 무죄였습니다. 협업을 위주로 작품을 하는 것이 현대미술의 경향이랍니다. 그런데 협업이란 것은, 구조물에 준하는 크기를 가진 조각물이나 옛날 미켈란젤로가 그렸던, 작업양이 엄청나게 많은 성당천정화 같은 것들에나 어울리는 이야기입니다. 사람 키보다 작은 2차원 그림을 조수들을 시켜서 그렸다면, 그것은 예술이라기보다 공장에서 생산한 제품에 더 가깝습니다. 모나리자를 다빈치가 아닌 대타가 그렸다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화투를 치기 전의 상태, 화투장들이 대충 흥크러진 모습을 한 번 그려봐요! 팔광은 가운데로 넣고…” 이런 주문이 아이디어가 될 수 있을까요? 미국에서는 특허에 대해서는 아이디어를 보장해주지만, 저작권에 대해서는 아이디어만으로는 안되고 표현 방식에 대해서만 저작권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시한부 인생의 사랑을 처음 다룬 소설있었고, 그 후 동일한 주제나 소재를 다룬 소설이 나와도 저작권 침해를 주장할 수 없습니다. 구체적인 표현이 같아야 저작권 침해로 인정합니다. 다시 말해서 구체적인 작품활동에 대해서만 저작권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해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속사정은 훨씬 더 복잡할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마광수의 ‘즐거운 사라’ 사건에서도 그랬지만, 이런 문화 예술계 문제나 심지어 대형교회나 불교종단 내의 종교문제들까지도 검찰에 기소하고 법원에 판단을 맡긴다는 것입니다. 문화예술계 사건들은 문단이나 화단에서 결론을 내고, 그 결론을 바탕으로 법적으로는 민사소송만 진행하는 정도가 되어야 할 터인데, 비전문가들에게 전문가들의 창작을 판단해달라니 스스로가 자기 정체성과 자존감을 부정하는 처사입니다. 남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아 자신의 예술적 체면마저도 포기하는 짓이죠. 과학기술계에서도 논문표절 문제가 나오면 학계에 의견을 묻기보다 법원이 판단해줍니다. 학자들은 그저 지지편이나 반대편의 증인으로나 불려갈 뿐이죠. 왜? 학자들의 양심을 믿기도 어렵고, 양심있는 학자라면 그들간에 엮여있는 인맥구조로부터 학자들을 보호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학계에서 먼저 잘못 이야기했다가 왕따당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나저나 두 개의 상반된 위작사건을 보니 우리쪽 사정과 닮은데가 보입니다. 대학원의 경우, 천경자 화백처럼 아주 철저히 본인이 스스로를 통제하며 연구하기에 대학원생들이 곁에 가기가 편치 않은 교수도 있고, 조영남 화백처럼 아이디어만 주고 나머지는 대학원생들에게 시키고, 제1 저자는 본인으로 등재하는 교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연구물이나 창작물인지에 대한 학계의 기준이 필요합니다. 물론 기준이전에 양심이 더 중요한데, 과학으로 양심을 계량할 수 없으니… 결론을 맺으려 합니다. 이분법적으로 간단하게 진리와 허구를 나누고 싶어도 어려운 것이 지금 세상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접하는 소식은 다 간접적으로 알게되는 일인데, 보도하는 미디어의 각도를 믿을 수 없고, 제3자라고 증언하는 사람들도 사실은 교묘하게 서로의 이익이 얽혀있기 때문입니다. 미인도 위작건만 해도, 사법부는 해당사건과 이해충돌이 전혀 없어보이지만, 소장자가 대통령 암살범이었기 때문에 종국에는 정치와 만나는 접점이 있습니다. 그러니 순진하게 생각했다가는 낭패를 당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놓을 필자의 궁색한 논리는 이렇습니다. 어쩌면 요즘 동전 던지기는 디스크보다, 실린더 모양에 더 가까운 것을 던지는 게임일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무리 상황이 동전 던지기 같이 단순해보여도, 동전이 옆구리 테두리 면으로도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제3의 성별도 존재할뿐더러, 성전환 수술도 가능하다고 하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