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경과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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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경은 위암으로 54세의 젊은 나이에 독일에서 별세한 재독시인입니다. 필자는 시인의 이름과 시를 얼마 전 부고기사를 통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이미 시인으로 생활을 하다가 늦게 독일로 유학가서 고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지도교수로 알게 되었던 독일인 남편과 자녀없이 살았는데, 독일 뮌스터에서 수목장으로 장례를 치루었다고 하는군요.
저는 해마다 신춘문예 당선 시집을 어렵게 구해서 읽었었는데, 요즈음은 한국시들이 너무 난해하여 몇 해전부터는 시읽기를 포기했습니다. 잘모르는 사람들이 뭔가를 다루면 쓸데 없이 어려워진다는 ‘편견’을 가지고 있는 탓이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접한 허수경의 시는 숨을 턱 멎게 하는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런 충격은 저의 개인취향이 촌스러운 서정이나 신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일 수도 있습니다. 판단은 읽으시는 분들이 하도록 아래에 그녀의 시를 무단카피 했습니다. (한겨레 신문에서 발췌했고, 행 넘김은 제가 임의로 했습니다.)
산가시내 되어 독 오른 뱀을 잡고
백정집 칼잽이 되어 개를 잡아
청솔가지 분질러 진국으로만 고아다가 후 후 불며 먹이고 싶었네
저 미친 듯 타오르는 눈빛을 재워
선한 물같이 맛깔 데인 잎차같이 눕히고 싶었네
끝내 일어서게 하고 싶었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폐병쟁이 내 사내’ 중 부분
이 시를 몇 번 반복하여 읽다보니, 불현듯 서정주 시인의 귀촉도가 생각나서 아래에 몇 부분만 인용했습니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불고 가신 임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 삼만리
…
신이나 삼아줄 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날로 이냥 베어서
부질 없는 이 머리털 엮어드릴 걸.
…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임아.
어떤가요? 두 시를 동일하게 관통하는 무엇이 있지 않나요? 그러다가 다시 생각이 다다른 곳은 피에타 상입니다. 십자가에 달렸던 아들 예수의 시신을 내려 자신의 무릎위에 올려두고 하염없이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마리아의 모습 말입니다.
폐병쟁이 사내나 이승을 떠나 서역으로 간 임이나 십자가에 달렸던 아들이나 모두 다 자신의 힘으로 살릴 수는 없었지만, 죽어 떠난 그들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이 여인들의 종교보다 깊은 사랑이었습니다. 그렇게 여인에게, 아내에게, 엄마에게는 생명을 살리는 힘이 있습니다. 비록 물리적인 생명이 떠났을지라도, 사랑의 힘으로 마음속에나마 그들을 영원히 살게 합니다.
오늘날 요원의 들불처럼 일고있는 미투운동과 페미니즘을 마주합니다. 제자신이 피해자가 아니고, 가해자도 아니기에 거리를 두고 쳐다보기만 했습니다. 가끔은 너무 지나치게 가는 것 같은 데도 아무도 말하지 않습니다. 혹시 페미니스트들의 살생부에 제거되어야 할 ‘적’으로 기록될까봐, 오히려 자기검열에 충실합니다. 참 아쉬운 것은 해겔이 말한 것처럼 역사는 정-반-합으로 발전해 나간다는 것입니다. 이상적인 것은 정에서 출발한 후에 반이라는 과도기적 인민재판과 살육의 시기를 건너뛰어서 곧바로 합으로 가면 좋겠지만, 한동안 ‘정’의 시대에 당한 자들의 복수의 칼부림이 있은 한참 후에야 화가 사그러들고 화해가 시작됩니다. 물론 역사적 청산이 없었기에 정의가 언제나 흔들렸다는 우리 과거를 지적할 수 있고, 당신은 가해자이거나 동조적 침묵자이기에 쉽게 말한다고 손가락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원래의 자리로 돌리기 위해서 오히려 훨씬 더 반대편으로 치닫는 과도기를 줄일수 있고 줄여야 합니다. 그 누구도 완벽한 폭력을 행사할 수 없는 ‘문명시대’인데, 역사는 여전히 정에서 합으로 나가기 위해 반드시 반을 필요로 한다면 우리는 그만큼 더 흔들릴 뿐입니다.
사회적으로는 여전히 양성평등의 길이 멀고, 일부 가정에서는 야만적인 남성폭력이 존재하지만,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남성 가장의 지위가 키우는 애완동물보다 아래라는 자조적인 목소리들이 흔합니다. 왜 우리는 서로 수평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밟거나 밟혀야 할까요? 이 시대에 위에서 언급한 생명을 보듬는 세 여인의 죽음까지도 뛰어넘으려는 사랑의 페미니즘을 그리워하는 것은 여전한 남성주의이며, 시대착오적인 생각인가요? 필자 역시도 아내와 딸이 있는 사람인데, 아직까지도 페미니즘의 적정한 위치가 어디인지 말하기 어렵습니다. 남성 사회학자들은 솔직하게 말하기를 두려워하고, 여성학자들은 하루아침에 과거역사를 되돌려 놓으려는듯 과격한 행보를 보입니다. 이 문제는 아마도 상당기간 뜨거운 감자로 남아 끝없이 평행선으로 내달릴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생명을 잉태하고 사람을 키워 만드는 자들이 여성이라는 기본을 다시 생각해본다면 좀 더 본질적으로 페미니즘을 정의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글이 많은 페미니스트들을 설득할 수는 없어도, 페미니스트 운동 방향이 과학기술계에서도 솔직하게 논의되는데 일조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여성을 생명을 잉태하고 사람을 키워 만드는 자로서 생각해주는 남성들이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일반적으로 욕망의 대상이나 신체적 약자로 보지 않을까요?
그나저나 허수경시인의 시는 처음 읽어보는데 표현이 대단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