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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감염, 집단 면역

역병이 중세의 페스트처럼 창궐하고 있는데도 개인의 자유를 내세워 격리조치를 취소하라며 데모하던 유럽이나 미국에서의 움직임이 정말 이해가 안되었다. 서구는 지난 몇 세기 동안의 성공에 도취되어 이성을 잃은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고대시대에 피라밋을 건설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당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을 운영했다는 이집트가 이제는 아주 초라해진 것처럼, 명품 패션계를 쥐락펴락하는 유럽이 손바닥만한 마스크 하나 재때 공급하지 못했으니 서구의 종말도 멀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2차 유행까지 오면서, 언제까지 계속 이대로 살아야 할까 고민이 되어 통계자료를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속에서 아주 놀라운 사실들을 발견하였는데, 한국 상황은 겨우 이 정도인데 그 엄청난 난리와 진통을 겪었나 싶었다. 숫자부터 간단하게 점검해보자. 2020년 1월 초부터 9월 15일까지 한국내에서 총 검사자는 2백만이 약간 넘고 확진자는 2만명이 좀 넘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검사자 대비 1% 가 확진자다. 사망자는 외우기 쉬운 숫자를 사용한다면 총 365명 정도인데 9개월 동안 하루에 한 명이나 두명 정도가 코로나로 사망했다는 이야기이며, 확진자 대비 사망자는 2%가 못된다. 한편, 한국내 평상시 연간 사망자는 (질병과 노환을 모두 포함하여) 2018년 기준 약 30만명이었다. 코로나가 기승을 떨치던9개월 동안으로 환산해보면 22만5천명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총 22만 5천명이 사망하는 평상시에 비해 365명이 더 사망했다는 것이다. 22만 5천 대비 365명이라니 퍼센트로 말하기도 민망한데, 재택근무 덕택에 교통사고 사망자 숫자가 줄어 총 사망자숫자는 예년보다 오히려 약간 더 작아졌을 것같다. 비교적 초기인 2020년 3월까지 집계된 코로나 총사망자 66명을 연령대 별로 살펴보면, 0세부터 29세까지 0명, 30대 1명, 40대 1명이다. 그 후 한 달 지나 4월초에 나온 기사에 따르면, 당시까지 한국내 코로나로 인한 총사망자 169명 중, 기저질환이 없었던 사람은 단 1명이었다고 한다. 사정을 살펴보고나니, 지나치게 호들갑을 떤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한국에서는 해마다 교통사고 사망자가 3천명이 넘는다고 한다. (2018년 3781명, 2019년 3349 명이었다고 한다.) 코로나 사망자의 10배다. 보행자 사망만 해도 1천명이 넘는다. 그러니까 차도 안타고 걸어다니다가 자동차에 치어 사망할 확률이 코로나로 인한 사망확률의 3배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모든 자동차를 자가격리시키자거나, 보행자 도로에 콘크리트 벽을 설치하자는 입법발의는 아직 없다. 물론 코로나는 감염병이어서 자칫 관리에 실패하면 고삐 풀린 망아지꼴이 될 수 있으니 교통사고와 단순비교는 확실히 무리가 있다. 하지만 현재 사망자 숫자의 패턴을 보면, 날뛰던 망아지도 이제는 기운이 빠져 상당히 고분고분해진 것이 확실하다.

유럽국가들 중 상태가 최악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경우, 사망자 최고치를 보인 4월달에 하루에만 1천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날들이 많았지만, 지금은 하루 평균 사망자가 1백명이 넘는 날들이 거의 없다. 여전히 하루하루 확인되는 감염자 숫자는 1만명에 이르는데 말이다. 2018년 프랑스의 연간사망자 숫자는 60만명 정도였다. 2020년 코로나로 인한 사망자는 3만명을 조금 넘는다. 평상시에도 하루 사망자가 1,600명 이상인 프랑스에서 현재는 코로나로 인해 사망자 숫자가 100명 정도 더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쯤해서 결론이 어느 정도 나오지 않는가? 1차 유행시에는 얼마나 퍼질 지, 얼마나 치명적일 지 정보가 없었으니, 재빨리 방역수위를 높이고 이동통제를 하는 것은 당연해보인다. 그러나 그 후에는 통계 추이에 따라 국민들의 마음을 진정시켜가며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줘야 하는데, 언론과 정치의 메카니즘은 이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특별히, 공포가 또 다른 공포를 증폭시키는 호들갑스러운 세상이 되어야 장사가 되는 사업이 언론이니, 언론사들은 아주 신이 났을 것이다. 유튜브 개미매체들에게 밀려 체면이 형편 없이 깎인 대형언론사들에게 코로나는 (본의 아니게) 정말 호재였을 것이다.

보수는 여태껏 지속되던 것을,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그대로 지키자고 주장한다. 반면 진보는 좀 더 나아 보인다면 약간의 위험부담이 있더라도 그 길로 가보자고 주장한다. 둘 다 나름의 논리로 설득력을 가지지만, 큰 일에 대해서는 실패하면 결과가 참혹할 것이기 때문에 항상 보수적인 결정을 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결정적 기로에서 지혜를 모아 결국 올바른 길을 택한다면 사회는 도약할 것이고, 국민들의 자신감도 높아질 것이다. 스웨덴이 초기에 집단면역에 도전했지만, 갑자기 늘어난 확진자 숫자에 깜짝 놀라 한발짝 물러섰다. 아마도 확실하게 집단면역을 고수했더라면 좋은 표본을 제시했겠지만, 계속 밀어부치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실험대상이 되어달라는 이야기여서, 스웨덴 사람들이 불쾌해할 수도 있겠다.)

개인이 아닌 국가, 그리고 국제사회는 집단지성의 힘으로 위기를 정확하고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두려움 때문에 진실을 똑바로 못쳐다보면, 진실은 멀리있는 벽에 투사되어 실체보다 훨씬 더 크고 무서운 그림자로 보인다. 이상한 이야기같지만, 원래 이런 결정은 이해당사자인 전문가 집단에게만 맡기면 안된다. 원전지속 여부를 원자력 전문가들에게만 맡길 경우, 객관적 결론을 얻을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한분야 전문가 그룹은 자신들 분야내에서 서로의 이익이나 책임이 엇갈리는 사안을 직접 결정하기에 난감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사회과학자들을 포함한 다방면의 과학자들이 개입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국가 과학기술 최고자문회의’ 같은 것이 있어서, 각 분야별 전문성을 동원하여 정부가 최적의 결정을 내리도록 도와줘야 한다. 앞으로 지구온난화와 에너지 정책문제들이 다시 현안으로 부상할 때도 ‘정치적 감’이 아니라 ‘과학적 이성’이 작동되도록 과학기술계가 권위를 가지고 종합적인 조언을 해야 할 것이다. 이런 기구가 아마도 정부조직 내에 이미 존재하고 있을 터인데, 유명무실하다면 하루 속히 기능을 회복해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는 전문가도 아닌 필자가 사안의 중대성을 너무 쉽게 재단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있을 것 같아 변명을 덧붙인다. 감염병 전문가들 중 코로나가 오기 전에 이 일을 경고하고 예언한 학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들은 코로나가 퍼지기 시작한 후부터 비로소 물만난 고기들처럼 엄청난 경고들을 쏟아냈다. 마치 선거 하루전까지 오락가락하던 전문가들이, 출구조사발표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쪽집게 분석’들을 쏟아내는 장면과 닮아있다. 이처럼 아직 현실의 과학 수준이 예언을 할 정도에 이르지 못했으므로, 전문가들의 의견과 우리의 건전한 상식을 잘 배분하여 사안을 판단할 수밖에 없다. 2차 유행에 대한 조치로는 집단적 격리보다 개개인이 셀프격리로 감염에 조심하면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독려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면역이 약한 노약자들, 기저질환이 있는 환자들 격리와 치료에 집중하는 것이 최선이었을 것이다. 물론 실내외 대형 집회는 여전히 금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증상이 없는 사람들까지 광범위하게 검사를 시행해서 의료진들을 거의 탈진하게 만든 부분이다. 무증상자 검사는 득보다 실이 더 많아보인다. 설사 음성으로 나왔어도 추후 감염가능성이 있을 터인데 마치 면죄부를 받은 것 같이 착각하여 방심할 수 있고, 양성으로 판명된 무증상자들의 체내 바이러스는 약하거나 이미 항체가 생겼다고 봐야 할 터인데, 양성판정에 겁을 먹고 이들이 모두 병원에 입원하겠다고 나서면 병상이 마비될 것이다. 결국 사회전체의 패닉상태가 길어져 모두가 완전히 지친 와중에, 의료계 일부 파업까지 이어지면서 상황이 몹시 어수선해졌다.

사상초유의 긴박하고도 엄중한 사태에 의료계나 정치권이나 대처를 잘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한다. 필자도 겨우 지금에 와서 뒤를 돌아본 것인데, 차후 비슷한 유형의 사태가 다시 온다면 그때는 공포 마켓팅을 자제하고 냉정하고 차분하게 대처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 사태후에는 전세계가 합심하여 꼭 해결해야 할 더 큰 과제가 있다. 코로나가 지나가면, 자연을 파괴해서라도 자본을 극대화하려는 집단자살형 자본주의로부터 하루빨리 벗어나야 한다. 또한 생산자와 소비자가 거의 1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착취형-공해형 세계화 경제 역시 수정되어야 한다. 지구와 인간을 착취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경제구조는, 또다른 코로나를 불러올 것이고 우리의 낙원을 점점 지옥으로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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