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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동산, 부동산, 부동산

그나마 제일 공정하며 개인에게 지속적인 동기부여를 할 수 있는 경제제도로 자본주의가 유일하다고 우리는 믿고 있다. 그런데 그 이름부터가 ‘공정’ 또는 ‘투명’이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돈이 돈을 번다는 뜻이다. 그래서 언론으로부터 자주 욕먹는 현대자동차 원청 노동자들이 하루에 12시간 이상 일하고 잔업수당으로 노동소득을 아무리 많이 끌어올려봐야, 부자들이 담궈둔 우량주식이나 상가빌딩에서 잠자는 사이에도 농익은 과일처럼 뚝뚝 떨어지는 자본소득을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다. 이런 연유로 전국민의 모든 지식과 생산 또는 예술행위의 동기부여를 부동산이 블랙홀처럼 삼키고 있는 중이다. 상황이 이쯤되면 연구개발이니 특허니 논문이니 하는 일들이 다 심드렁해질 수밖에 없다. 코로나 이전이라면 해외학회에 출장가는 즐거움도 연구의 기폭제가 되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노른자위 지역에 땅과 집을 가진 사람이냐, 아니냐로 은근히 신분이 나뉘고 조직 내에서 직언할 수 있는 수위도 다를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제 한국사회는 부동산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어려워보인다. 누구는 지키고 더 키우려고 전전긍긍하고, 누구는 멀어져가는 내집마련에 속만 태우며 바라보고 있어야 한다. 90년대에 필자는 기흥 삼성연구소에 근무했는데, 연구원들 대화의 주제로 미분방정식이나 최적설계 같은 전공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하다못해 연예나 스포츠 이야기라도 등장하면 다행이었을 터인데 그렇지 못했다. 진지한 대화라면 언제나 주식과 부동산이 중심이었는데, 그들의 꿈은 대박을 찍은후 그곳을 떠나는 것이었으며, 집에서 오는 전화의 상당부분은 와이프가 전하는 정보나 코칭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어느날 동아일보 일면에 연구소 주위의 기흥지역 땅 거의 전부를 서울지방 판사들이 ‘공동구매’했다는 머리기사가 실렸던 일이다. 그런데 그후 30년이 지난 현재도 여전히 부동산 불패신화가 계속되고 궁극의 목표는 강남 아파트를 넘어 빌딩 소유자가 되는 것이라니... 부동산 문제는 제도를 넘어 거의 문화의 경지에 이른 것이 틀림없다. 어떤 사회적 현상이 제도를 넘어 문화에까지 이르렀다면, 살과 뼈를 깎는 고통 없이 바꾸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문화란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집단적 가치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도를 넘어 문화가 되었다는 것은 그런 가치가 대물림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늘 반민주적이라고 목청높여 비난하는 북한체제의 세습이 사실은 남한에서는 좀 더 광범위하게 그리고 자연스럽게 세습되는 중이다.

더욱 큰 문제는, 부동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부동산 폭주현상의 혜택자이거나 최소한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이다. “저는 임차인입니다”로 시작되는 명연설을 했다는 야당의 모 여성국회의원도 사실은 서울에 집이 있는 사람이라고 확인되었다. 집이 두 채나 있었지만 하나를 팔았고, 지역구에 거주하기 위해 하나를 세주고 지역구에 전세를 얻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임차인이라는 연설은 전형적인 반쪽 진실 그래서 결국 교묘한 거짓말인 것이다. 아마도 고위공직자들 대상으로 부동산 정밀조사를 해보면, 진기명기에 나올만한 꼼수의 대가들이 수두룩할 것이다. 필자가 그들을 걱정해줄 처지는 아니지만, 설사 그들이 공직에서 쫓겨나도 투자특강에 불러줄 곳이 많아서 밥굶을 일은 없을 것같다.

부동산 문제는 대북관계를 포함한 외교문제에 비하면 상당히 쉬운 문제다. 의지만 있다면 가능한데, 그 의지가 진심을 담은 것이 아니라 표를 의식하고 경제지표를 의식하니 정책들이 어정쩡하게 시작했다가 오히려 후유증만 키운다. 주택보유는 인간의 기본권과도 관계되니, 너무 현실성 없는 강경정책은 오히려 시장을 교란시켜 역효과를 낼 뿐이다. 당장 해야 할 것은 부동산 완전 실명제다. 그러니까 명의대여를 해주었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어도 무조건 명의자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인정해주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부모자식간에도 명의도용을 하지 않을 것이다. 가구당 일주택 이상은 허가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자유시장경제니까 두 채 이상 구입시 허가를 안해줄 수는 없고, 자금의 출처와 실거래 금액을 파악하는 것이다. 납부할 세금에 동의하고 자금 출처와 실거래 금액이 소명되었으면 자동으로 허가를 내어주는 것이다. 팔려고 내어놓고 다른 집을 샀는데, 안팔려서 이주택자가 되었다면, 일정기간내 안팔린 주택은 지자체가 공시가로 매입할 수도 있다. 그 후 경매로 되팔수도 있고… 필자의 어설픈 제안을 비웃을 정도로, 정책관련자들은 이미 많은 대책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책입안 관련자들은 자기 발등을 찍는 정책입안은 어떻게든 피하려고 노력하거나 아니면 최대한 미루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현정권 출발시 공약했던 것처럼, 부동산 관련법에 약간이라도 저촉되는 고위공직자들은 그냥 무조건 아웃시키는 용단이 필요했다. 해당 국회의원들 역시 대대적으로 알려 전부 낙선시켰어야 했다. 인사원칙에 몇 번 예외를 두었더니 이제는 너덜너덜해져서 피차 민망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LH 사태까지 겹쳐 아예 할말이 없다.

모두가 알고 있어서 식상한 내용이지만, 몇 개 중요한 점을 디시 짚어보자. 우리나라에만 있는 전세제도는 월세를 내지 않고 세입자로 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반면, 집주인의 갭투기를 유발하고 전세금이 없는 젊은이들의 결혼을 어렵게 만드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집주인이 사업에 실패하여 전세금을 날리거나 세입자 몰래 집을 팔아버리는 등, 알고보면 상당히 위험한 제도다. 그래서 전세가 가능한 정도의 자금이 있는 무주택자들에게는 혜택을 줘서 적극적으로 주택구매를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해보인다.

미국의 경우는 재산세가 너무 높아서 기업이 아닌 개인이 집을 세놓는 경우는 흔치 않다. 시골이 아니라면, 일년간 내는 재산세는 주택가격의 1~2% 정도다. 그러니까 5억짜리 집을 소유하고 있다면, 연간 오백만원에서 천만원을 재산세로 낸다. 이쯤되면 조세저항이 클 터인데, 미국만의 특이한 구조가 있다. 미국의 초중고는 연방정부나 주정부가 도와주지 않고 그 학교가 속한 말단 지자체의 재산세로 운영된다. 그래서 재산세가 높은 지역은 학군이 좋기 때문에 집값도 오르고 조세저항이 적으며, 높은 재산세는 투기를 억제한다. 미국의 문제는 모기지를 낼 때 초기 원금이 적을수록 이자율이 높아져, 돈없는 사람들이 이중으로 높은 주거지출을 감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매달 내는 돈을 감당하지 못하고 집을 은행에다 도로 헌납하는 가구들이 꽤 많다.

프랑스는 미국과 정반대로 재산세가 높지 않다. 그리고 다주택에 대한 규제가 심하지도 않다. 그런데 세입자들에게는 식구수와 소득 그리고 집세에 따라 정부가 보조금을 준다. 중산층 이하라면 집세의 반 정도를 보조받고 극빈층에 애들까지 많다면 집세의 거의 전부가 나온다. 그래서 주인의 집세소득이 빠짐없이 국세청에 보고된다. 집주인을 보고하지 않으면 세입자는 월세보조를 못받기 때문에, 숨겨줄 수도 없고 명의도용도 불가하다. 그리고 주인은 재산세를 작게 내지만, 월세수익은 자신의 과외소득이므로 세율이 높게 적용된다. 필자도 프랑스에서 월세를 사는데, 샤워부스가 너무 낡아 바꿔 달랬더니 주인이 볼맨 소리를 했다. “그동안 우리가 낸 월세가 도대체 얼마인데…”라고 좀 쎄게 나갔더니, 주인이 전화기 너머에서 허탈하게 웃었다. 집세의 반 정도가 세금인데, 수리비까지 들면 절대 남는 장사가 아니란다.

국외자 아마추어 불평가가 쓴 이 칼럼이 부동산 정책에 대한 조언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필자의 주장을 반복하면, 이미 부동산 문제는 문화로 각인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문화란 의식구조의 저변을 지배하고 철학적 공리를 구성하는 사고의 틀을 형성한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예전에 지속적으로 교육받아와서, 입에 공산주의라는 단어를 올리기 전에 자기검열부터 했던 부담스러운 ‘레드 컴플렉스’ 같은 것이다. 이제 ‘빨갱이’라는 프레임은 극복되었다고 보고, 한국사회가 적극적으로 극복해야 할 문제는 다름아닌 부동산이다. 그 이유는 자명하다. 번영한 사회와 공정한 사회를 동시에 이루기 위해서다. 쉽게 말하면 풍요롭고 정의도 꽉 찬 사회를 만들자는 것이다. 돈만 많고 정의가 없는 사회나 돈은 없지만 공정한 사회, 어느 쪽이나 지속가능한 사회모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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