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고 속이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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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가 발전하면서 참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거의 동시동작으로 외국에 사는 지인들에게도 연락이 가능하고, 삐친 연인에게 보낸 멧세지 답장이 없어도 최소한 상대가 읽었는지는 알 수 있고, 언제까지 온라인 상태에 있었는지도 체크가능하다. 그런데 예전에 컴퓨터 성능이 발전하면서 컴퓨터 바이러스라는 말이 나왔을 때, 도대체 그런 것을 해서 얻는 소득이 무엇이길래 저렇게 애를 쓰나 하고 의아해했었지만, 이내 시장이 형성되는 것을 보고 무릎을 쳤었다. 컴퓨터 백신이 나왔기 때문이다. 해커는 병을 주고 백신회사는 약을 주는 공생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아마도 해커라면, 백신 프로그램 개발 회사에 상당히 쉽게 취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빛이 있다면 반드시 양지와 음지가 있으며, 양지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면 그 이면의 어두운 곳에서는 곰팡이가 생기기 마련인 것은 자연뿐 아니라 인간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IT를 적극적으로 범죄에 이용하는 보이스 피싱 같은 것은 아예 논외로 하고, 올려진 멋진 사진만 보고 남들은 다 행복하게 풍요롭게 사는데, 왜 내 인생만 늘 요모양 요꼴이냐고 자괴감을 느끼게 하는 인스타그램도 어떤 면에서 곰팡이 같은 존재라고 하면 화낼 사람들이 많을런가? 인스타그램도 푸른 곰팡이과의 하나라면 좀 심한 비하라는 것에 동의한다. 격상해서, 아름답지만 아편을 품은 양귀비꽃 정도라고 해두자. 보기만 하고 먹지만 않으면 해가 되지 않는, 에덴동산에 있었다는 선악과 같은…
IT 시대의 상거래 반칙들에 관해 몇가지 정리해보았다. 여기에서 나열하지 못한 수많은 유형들이 있을 것이고, 또 IT와 직접 관계 없는 ‘클래식 반칙’들도 섞였다. 현대는 죄형법정주의를 채택하고 있어서 피해사례들이 빨리 법으로 만들어져야만 소비자 보호가 가능하다. 우선 가장 애교 섞인 꼼수는 99의 애용이다. 만원 대신 9,900원으로 붙이는 가격. 현대 심리학이 개발한 가장 효과적인 발명품 중 하나다. 하지만 적극적 반칙은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자. 요즘 부쩍 유행중인 상술은 한달간 공짜, 그 다음달부터 얼마 그리고 언제든지 취소가능하다는 옵션이다. 물론 취소는 상당히 어려운 경우가 많고, 하루만 지나서 취소해도 한달 전체 비용을 부담해야 한다. 그리고 보통 석달이 지나면 가격이 오른다. 일이 바빠서 그냥 잊고 살다가 날잡아서 전화하여 물고늘어지면 또 다른 유혹될만한 조건을 제시한다. 정기구독과의 깔끔한 이별은 정말 쉽지않다. 필자는 그렇게 10년을 구독한 잡지가 있다. 정기구독료는 정말 저렴했다. 하지만 하나만 읽으려니 너무 편식하는 것같아서 바꾸려고 애를 썼지만, 결국 은행에 지불정지를 요청하는 초강수를 둔 후에야 결별이 가능했다. 계약 담당회사와 배달 담당회사, 그리고 요금징수 회사들이 각각 달라서 여기 연락하면 저기로, 저기 가면 다시 거기로 보내는 ‘뺑뺑이 신공’을 구사하는 통에 세월만 속절없이 갔다. 우리집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는 일년만 지나면 슬금슬금 가격을 올렸다. 이유를 물어보면 옛날 할인약정은 1년간만 혜택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다른 회사고객들을 꼬실 때는 훨씬 낮은 요금을 제시한다. 잡아둔 물고기에게는 미끼를 줄 필요가 없으니까 단골손님은 완전 찬밥신세다. 그래서 부지런한 사람들은 일년에 한 번씩 인터넷 회사를 갈아타는 모양이지만, 휴대전화 번호들까지 팩키지로 가입되어 있어서 공급회사를 바꾸는 것도 리스크가 있다.
보험회사들은 약관을 가능하면 작은 폰트체로 써둔다. 확대경 없이 읽기는 거의 불가한 글자인데, 서명란은 아주 크게 만들어두었다. 그래서 약관보다는 이미 가입한 경험자들의 리뷰를 참조하는 편이 낫다. 배달료 공짜라고 해두고 음식값에 배달료를 더 붙이는 행위, 환전 수수료가 제로라고 해두고는 환율로 장난치는 은행 등등 우리에게 너무 익숙한 것들이다. 한때는 설탕함량을 제로라고 선전하던 식품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설탕보다 더 해로운 화학물질을 사용한 것이 드러난 적도 있었다. 최근에 경험한 극간고수의 암수는 주유소에서였다. 주유를 마치고 결재창에서 비밀번호를 눌렀더니, 종이 영수증 대신 이메일로 영수증 보내줄까?라고 묻기에 그러라고 했더니 영수증이 날아왔다. 종이소비를 줄여 산림보호에 일말이나마 기여했다는 자부심은 단 하루뿐. 연달아 날아드는 그들의 광고 때문에, 거의 터지려는 이메일 박스가 더 빵빵해졌다.
기술이 편리해질수록 삶은 편리해지면서 동시에 더 복잡해진다. 필요없었던 욕구가 생겨나고 비교와 경쟁이 부추겨지면 더 이상 선택사항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으로 착각하여 더 빨리 뛰려고 한다. 이런 사정을 잘 안다고 해도 어차피 자본주의를 살아내야 하는 현대인으로서 부시맨처럼 폴더폰을 고집할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의 평온한 삶을 방해하는 이런 성가신 일들 (nuissance)에 대한 약속이 필요하고 안따르면 규제가 동반되어야 한다. 잡스럽고 성가신 일이 많을수록 우리 머리는 꼼수와 대응책으로만 채워져서 창의적 사고가 자리할 영역은 점점 줄어든다. 그러니까 지갑에 든 여러 장의 포인트 적립 카드를 잘 관리하고 있으니, 내가 그 백화점들을 이겨먹고있다는 생각은 순전히 본인만의 착각이다. 그 카드들은 오히려 나는 당신들의 충성스런 물주라는 고백서에 더 가깝다. (잘알지만 마음이 따르지 않는 이성과 감정의 균열로 인해 필자도 지갑에 충성고백증을 두 장 넣고 다닌다.) 끝으로, 층간소음 같은 굵직한 Classic nuissance는 우리 삶에 끼치는 악영향이 훨씬 커서, 창의적 사고 대신 복수를 위한 고안책에 몰두하게 만드니까 우선순위 일번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일단 한국 아파트들의 천정 높이가 너무 낮아보이는데, 이 부분은 정말 규제가 필요하다.
아! 층간 소음 문제와 아파트 층고는 연관지어 생각해 보지 못했는데, 신선한 발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