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국어 복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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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여름이다 보니 시의성 있는 글을 피하고, 좀 쉬어갈만한 주제를 골라봤다. 외국에 오래 살면 확실히 모국어 구사력이 줄어든다. 인터넷 덕분에 한국 내의 최신 유행어를 따라잡는데 큰 어려움은 없지만, 노래방을 같이 해보면 대략 이민온 시점이 드러난다. 심한 경우는 배호의 ‘돌아가는 삼각지’까지 레퍼토리가 거슬러올라가는 경우도 있는데, 나 역시 그들을 놀릴 처지는 못된다. 물론 요즘 유행하는 트롯트 광풍처럼 현대가요를 한바퀴돌고나서 다시 찾은 복고풍 트롯이 아니라, 그냥 항상 복고였던 것이다. 반면, 금방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레퍼토리도 최근 가요로 장착했을뿐 아니라, 말도 청산유수다. 장기이민자들의 경우 생활언어로써 모국어는 그런대로 구사가능한데, 격식있는 표현들이 입에서 잘안나온다. 오래전 유학생활 초기에 유럽 과학자 회장단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당시 회장님들은 상당히 오랜 세월을 유럽에서 사시던 분들이셨는데, 독일-영국-프랑스에서 모이다보니 회의는 모국어인 한국어로 진행되었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한참 들어봐야 알 정도여서 신참이던 필자가 한국어를 듣고 문장을 다시 구성해서 한국말로 통역에 나섰던 적이 있었다. 혹시 가끔 나하고 대화하는 이곳의 젊은 한국인들도 답답함을 느끼지 않을까 조심스럽다.
각 나라마다 자기네 언어가 최고라고 말하지만, 각언어의 문제도 있고 그래서 벌어지는 소통의 오해도 흔하다. 문법에 맞지 않는 표현이나 세월과 더불어 어근에 상응하지 않게 변해버린 단어들은 언어를 배우는 국외자들을 괴롭힌다. 그리고 부정확한 번역이 당연한 것처럼 고착된 경우도 많다. 생각나는대로 몇가지를 써본다. 영어에서는 forty / fourteen의 발음이 비슷해서 혼동을 많이 준다. 그래도 미국 영어에서는 forty를 [포티]가 아닌 [포리]로 발음해버리니 영국영어보다는 구별이 쉽다. 정반대의 뜻인 can / can’t 구별이 안될 때가 많고, want to / won’t의 구별도 어렵다. 한국어에서는 어떤가?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이라고 말하면 누가 죽고 누가 산다는 말인지 귀로 들어서는 모른다. 그래서 구어에서는 ‘니가 죽고 내가 산다면’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낫다 와 낮다는 말도 거의 반대말인데, 혼동스러울 때가 있다. 앞의 문맥을 잘 기억하지 않고 있다가 “더 나따”라는 말만 귀에 들리면 좋다(낫다)는 의미인지, 저급하다(낮다)는 의미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물론 앞뒤 문맥 없이도 모든 단어들의 뜻이 전부 구분되는 언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일전에 어떤 기사에서 ‘삶은 소 잔등처럼 부드럽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멋진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Life는 smooth하게 전개되지만은 않는다는 뜻으로 쓴 문장이지만, 문장 앞에 있기에 눈에 가장 처음 들어온 ‘삶은 소’는 Boiled beef로 나의 뇌에 먼저 입력되었다. 아마 나처럼 식탐이 많은 사람들 눈에는 ‘삶은 소’라는 부분을 읽는 순간, 뒷문구로 눈이 가기도 전에 벌써 김이 모락모락나는 쇠고기국이 흰 쌀밥과 함께 밥상에 얹혀진 장면이 머리 속에 그려졌을 것이다. 그래서 할 수 있는대로 의미의 혼동을 피하려면 자기가 쓴 글을 여러번 읽어봐야 한다. 그래서 일부로 중의적 표현을 사용하려는 경우가 아니라면 혼동을 줄 수 있는 단어들을 찾아서 고치는 것이 좋다. 나도 책을 쓰면서 이런 과정을 거치지만 그래도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이기 때문에 나는 본인 책이 출판되고나면 한동안 안읽어본다.
각설하고, 이 글을 쓰게 된 배경은 사소한 번역의 오차를 오랜동안 불편해온 탓이다. 한국어 단어에 행복-불행, 행운-불운, 다행-소(확)행(?)이라는 단어들이 조금씩 의미가 다른데, 그 차이를 우리는 자동적으로 인식하여 올바르게 사용하지만, 번역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대부분의 책에서 Unfortunately 는 보통 ‘불행하게도’라고 번역되어있다. 그러면 Fortunately는 ‘행복하게도’라고 번역되어야 하지만, ‘다행하게도’로 번역되어있다. 영어 단어는 분명 반댓말인데, 우리말로 넘어오면서 반댓말이 아니게 되어버렸다. Unfortunately 는 ‘운이 없게도 (불운하게도)’라고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불행할’ 정도로 의미가 강한 단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우연하게도 좀 운이 없었다는 뜻이다. 행복-불행은 긴 기간동안의 좋은 일들과 나쁜 일들이 쌓인 결과에 해당되고, 행운-불운은 짧은 기간에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좋은 일, 나쁜 일에 어울린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행’이라는 말이다. 어원상 ‘행복’과 비슷해야 하지만, 불운에 빠지지 않은 상태로 의미가 변한 것이다. 즉 ‘불행중 다행’이라는 말처럼, 다행은 일상을 이어갈 수 있는 정상적인 상태가 유지되었다는 말이다. 수학적으로 말하면, 제로에서 플러스가 된 것(행운)이 아니라 마이너스로 떨어질 뻔 했던 상황이 잘 해결되어 제로로 유지되었다는 것이 현대 한국어에서 ‘다행’이라는 단어의 뜻이다.
요즘 나는 맞춤법에 많이 약해져서 ‘제재를 가해야 한다’고 쓰려면 혹시 재제인지 재재인지 아니면 제제인지에 자신이 없다. (경우의 수를 다 보여주려고 좀 과장했고, 사실은 ‘제재’와 ‘재제’ 둘 사이에서만 약간 망설인다.) 맞춤법도 해마다 조금씩 바뀌고 있지만 더 어렵고 애매한 것은 띄어 쓰기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띄어쓰기를 최대한 줄이자는 쪽으로 주장한다. 그리고 외국어 표기는 미국식 발음에 가깝게 표기하지만, a는 ‘애’로 e는 ‘에’로 표기해서 원철자가 무엇인지 추정할 수 있게 하자는 쪽이다. 예를 들면 Van은 [밴]으로, Ben은 [벤]으로 하자는 것이다. 이런 외국어 표기는 어떻게 해도 완전하지 않기 때문에, 유명매체들이 자기들만의 기준을 정하고 점차 수정해나가면서 살아남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표준을 정하는 것이 어떨까 한다.
한때 영어공용어 논의가 힘을 받은 적 있었지만 요즘은 잠잠해졌다. 중국이 급부상하면서 1세기후에 중국어가 영어를 누르고 득세하면 그때는 다시 중국어를 공용어로 바꿀 것이냐는 논리에 답할 수 없었던 이유가 가장 컸다. 아마 앞으로 계속 더욱 발전된 통번역 인공지능이 출현할 것이며 여전히 사람들은 자기네 고유언어를 버리지 않고 사용할 것이다. 생각을 달리해보면 다양한 언어가 있기에 인류가 덜 팟쇼화될 것이며, 자기들만의 독창적 문화가 있기에 훨씬 다양한 삶이 지구촌에 보장되고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언어에는 문학-문화적 요인만큼이나 과학적 요인도 많으니까 이공계 전공자들도 모국어와 다양한 외국어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대 정보화시대에는 정보를 쥔 자가 권력도 쥔다고 앨빈 토플러가 일갈했지만, 사실은 역사 이래로 줄곧 언어를 쥔 사람들이 권력을 쥐어왔다. 미래에도 정보는 권력에 데이터를 제공하는 하부구조에 머물 것이며, 여전히 언어가 권력을 지배할 것이다. 왜냐하면 데이터는 사실만을 기반으로 하지만, 언어는 사실에서 신앙의 경지까지를 포함하는 감동과 설득 그리고 선동의 가장 강력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처음, 제목을 보고 무슨 내용일까 궁금했습니다. 모국어 복습? ㅎ 하지만 컬럼 글을 다 읽고 나니 너무나 공감되는 내용이며 제목 선택을 너무 잘 하신것 같습니다. ^^ 모국어 복습!! 그리고 예전에 언어는 정체성! 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민 사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모국어를 가르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지요. 맞춤법이 조금 틀리더라도 모국어 교육은 필수인듯 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도 35여 년 전 3년 반의 외국 생활 중 교포와의 대화에서 언어 혼란을 종종 경험했으며 귀국 후 아파트 내에서 차선을 잘못 이용해 눈총 받은 적이 여러 번. 뭐라 해도 부강해지는 국력의 힘을 국내 아닌 외국 사는 외국인들의 우리말로 자주 느껴 아버님들께 진짜 감사함을 가집니다 자주.근데 알아들을 수 없는 단어 파괴와 아무 데나 붙이는 존댓말을 보면 너무하다는 느낌을 너무 자주 느끼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