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티브잡스의 유산 그리고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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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전쯤 스탠포드 대학 교정을 방문한 적이 있다. 2005년 졸업식에서 행한 잡스의 명연설이 생각나서 당시 현장이 어딘지를 교직원들에게 물었더니, 야외 졸업식이 진행되었던 장소를 가르쳐주었다. 나는 그 공터를 걸으면서 잡스의 연설을 아이폰으로 다시 들어보았다. 그리고 이 글을 쓰기 위해서 인터넷을 통해 그의 연설을 또 들었다. 훌륭한 스피치는 내용도 풍부하지만,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처럼 절제미가 있다. 잡스의 연설 역시 내용도 좋지만 너무 길지 않아 훌륭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도 그가 마지막에 강조한 “Stay hungry, stay foolish”라는 말을 기억할 것이다. 영어권 사람들은 ‘멍청하다’라는 표현으로 Foolish 보다는 Stupid 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겨우 foolish에 근접한 단어를 만날 수 있는 경우는 만우절 (April fool’s day) 이다. 아마도 foolish는 좀 옛날 말인 것 같다. 그래서 foolish는 나에게 ‘바보같은’이 아니라 (돌쇠처럼) ‘우직한’이라는 뜻으로 새겨진다.
나는 잡스를 산업디자이너라고 생각하는데, IT 에 기여한 잡스의 업적은 나열하기 힘들만큼 많지만, 단 한가지만 꼽는다면 휴대전화에서 자판을 없애버린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새가 날기 위해서는 두개의 날개가 필요하고 인간이 걷기 위해서는 두 다리가 필요한 것처럼, 자판과 화면은 컴퓨터나 휴대전화에서 꼭 필요한 두가지 기본요소라고 모두가 인식하고 있었던 때였다. 그런데 잡스는 자판을 휴대전화 디자인의 가장 추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그후 아이폰을 선보이면서 정말 자판을 없애버렸다. 아이폰은 겉으로 보면 그냥 하나의 약간 도톰하고 아담한 직사각형 판이다. 그런데 손가락으로 톡 치면 화면이 살아나면서 자판이 등장하는 구조다. 지금이야 당연하게 보이지만, 그 당시 아이폰의 충격은, 마치 플라스틱 토막이 전화로 변하는 마술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그 다음부터 거의 모든 기계들이 필요 이상으로 아이폰을 배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바깥으로 보이던 버튼들이 숨어버려 많은 기계들이 블랙박스화 되어버렸다. 가려진 커버를 제치면 버튼들이 보이던 옛날식도 아니고, 일단 어딘가를 터치해야 비로소 뭔가가 나타나기 시작하는 구조다. 필자는 최근 프랑스에서 미국으로 이사와서 몇가지 기계들을 다시 샀다. 전원이 유럽은 220볼트인데, 미국은 110볼트여서 버리고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프린터 등 여러 기계들을 설치하면서 애를 많이 먹었다. 기계를 언박싱해둔 채 쩔쩔매는 나에게 “당신, 엔지니어 맞아?”라며 놀리는 와이프에게는 창피해서 대꾸도 못했다.
밖으로 노출되지 않은 버튼들은 디자인이 깔끔하기는 하지만, 직관적으로 작동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화재경보기를 터치패드 화면으로 만들어두었다고 해보자. 과연 위급상황에서 거기 터치하고 메뉴들 찾아들어가서 119먼저 누르고, 화재 종류 선택하고, 주소 업로드 하고, 화재현장 인증사진 첨부하고 등등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말이다. (분명 메뉴는 이런 일련의 데이터들을 요구할 것이다. 당장 위급한 상황인데도 말이다.) 모든 기계들이 지나치게 컴퓨터화하고 있으며 버튼들이 꼭꼭 숨는 방식으로 제작되면 초보자들이나 문외한들에게 친절하지 않은 기계가 된다. 그래서 ‘기계가 아니라 웬수네…’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된다. 단적인 예를 들면, 새로운 복사기가 회사 사무실 복도에 깔리면 한동안 내부에서 종이가 걸리는 잼도 자주 발생하는데 사용자들이 버튼을 몰라서 조작에 시간도 오래 걸리다보니 결국 제대로 복사기가 작동하기까지 최소한 일주일이 걸린다. 버튼이 터치식 스크린으로 바뀐 기계들의 또 다른 특징은 (위의 화재경보기처럼) 귀찮게 많은 선택사항을 묻는다는 것이다. 새로운 기계를 사서 익숙해지는 과정이 힘들어 사용중이던 기계를 안바꾸려고 한다면 결국 제조회사에 손해가 되는 줄은 모르는 것인지…
그러고보니 스티브 잡스는 뭔가 복잡하게 보이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던 것 같다. 그가 즐겨 입던 검정색 토틀넥 셔츠를 보자. 그의 토틀넥 셔츠는 색깔도 단색이지만, 단추도 목컬러도 없는 그냥 자루형 셔츠다. 깔끔해보여서 전문직들이 콤비 안에 토틀넥 셔츠 입는 것을 좋아하는데, 사실 토틀넥 만큼 불편한 옷도 없다. 날씨가 갑자기 더워지거나 따뜻한 실내에 들어가면 목이 너무 답답해서 목부분을 쥐어뜯고 싶어진다. 가슴팍에는 주머니가 없어서 바쁠 때 차표나 영수증을 재빨리 쑤셔넣을 공간을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목컬러가 있고 최소한 한쪽 가슴에 주머니가 있는 단추식 셔츠를 여전히 선호한다. 비행기를 탈 때면 가슴팍 주머니는 길다란 비행기 티켓을 구기지 않은 채 넣어둘 수 있는 유용한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남자들 와이셔츠에는 가슴 양쪽에 주머니가 있었는데, 왼쪽 하나로 줄더니 이제는 아예 주머니가 없는 셔츠들이 대세다. )
AI시대로 가는 중이라고 요란스럽지만, 나이든 사람들과 초보자들에게 기계의 장벽은 점점 높아져간다. 이런 트랜드를 역으로 가는, 정말 고객에게 친절한 기계, 돈주고 사오면 세팅 같은 것 필요없이 플러그에 꼽으면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기계 (Plug & Play)가 대세일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늘나라에서 잡스가 우리를 굽어본다면, 땅위의 사람들이 이제 자기 작품 그만 카피하고 새로운 디자인으로 자기를 넘어서길 바랄 것이다. 옛날 것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두 개를 합해서 새로운 디자인, 모두에게 친절한 기계, 초보자들에게 문턱을 낯춘 IT 환경을 구성하자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 이념에도 맞고, “사람이 먼저다”라는 구호의 실천도 될 것이다.
전 회원님 의견에 백 번 동의 합니다. 보기에만 좋다고 "스마트" 만 앞 장 세우면 뒤 쳐지는 사람들이 당면하게
되는 많은 불편 들을 고려해 "모두에게 친절한 기계" 도 적당하게 같이 출시하는 IT기업 마인드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