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원자력 연구소(CEA)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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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미국에서 프랑스로 파견연구 나갔다가 예상치 않게15년이나 살게 되었다. 프랑스는 필자가 박사학위를 위해 살았던 나라이기에 고향처럼 편했지만,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미국으로 재취업하여 돌아왔다. 아직 프랑스에 대한 기억이 좀 더 분명할 때 정리해두는 것이 좋을 것같아, 이번 칼럼은 프랑스 원자력청 소개로 대신한다. 보안위반을 염려하여 사진을 전혀 소개하지 못한 점에 양해를 구한다.)
필자는 2007년부터 프랑스에서 ITER 프로젝트에 참여했는데, ITER는 초기 몇년간 자체건물이 없었기에 CEA 내부 공터에 가건물을 짓고 일을 시작하였으므로 CEA 연구환경을 접할 수 있었다. CEA는 지금 재생에너지 연구까지 하느라 이름이 길어진 상태이며, 정확한 번역은 “프랑스 원자력청”이다. 왜냐하면 연구뿐 아니라 정책 및 운용까지 원자력 분야 모든 업무를 정부로부터 일임받아 독자적으로 수행하는 독립기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구인력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므로 여기에서는 그냥 “원자력연구소”라고 번역했다.
역사: 방사능이라는 현상자체가 프랑스의 퀴리부부에 의해 처음으로 알려졌다. 그러므로 프랑스에서 원자력의 역사는 아주 깊지만, 본격적인 원자력 연구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된다. 초대 청장으로는 퀴리부부의 장녀이며 1935년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졸리오 퀴리가 초빙되었다. 전쟁 패배감을 극복하고, 대전후 새롭게 대두된 소련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하여 드골 대통령 시절부터 일관되게 CEA는 핵폭탄과 원자력 에너지 연구를 해왔다. 프랑스는 선진국들 중 가장 마지막까지 (1996년) 핵폭탄 실험을 한 국가다. 미테랑 대통령 시절에는 원폭실험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던 그린피스 배를 뉴질랜드 항구에서 스파이를 통해 폭파시켜버린 테러사건 (1985년)을 주도하여, 많은 나라에서 프랑스산 포도주들이 길거리에 쏟아부어지는 퍼포먼스를 겪으며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원자력 에너지 연구는 제1차 석유파동 이후에 가속되었다. 공짜로 석유를 공급받던 산유국 알제리가 1962년에 독립하여 프랑스 식민지에서 이탈했다. 그런데 10년 정도 경과후 제1차 석유파동이 발생했기에 프랑스 경제는 한국의 IMF 사태 같은 직격탄을 맞았다. 이때부터 본격적인 연구와 핵발전소 건설에 들어가, 현재 EDF라는 프랑스 전력회사는 세계 최대의 전력회사가 되었으며 도버해협을 넘어 영국의 전력까지 책임지고 있다. 그리고 CEA는 원자력 설계 회사인 AREVA의 절대지분을 가진 주주다. 현재 프랑스는 전력생산의 75% 이상을 원자력에 의존하고 있으며 당분간 원전 의존율을 줄이지 않을 것 같다.
환경과 위치: CEA는 프랑스 내 여러곳에 산재해있으며, 가장 큰 연구센터는 파리근교 남쪽에 위치한 Saclay라는 종합연구단지와, 그리고 지중해 가까운 마르세이유에서 북쪽으로 50km 정도 떨어져 있는 Cadarache라는 두 곳이다. 필자는 Cadarache연구소 내부에서 근무했으므로, 이후 이 부분에 대해서만 정리했다. Cadarache는 지중해에서 가깝지만, 알프스 자락 끝에 위치하여 사실상 산악기후다. 인구가 많이 사는 남쪽으로 몇 km만 내려오면 나즈막한 산들이 막고 있다. 방사능 사고가 일어나더라도 인명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위치이면서도 연구원들이 생활할 대도시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이 부지가 선정되었다고 한다. 바로 정문 앞에는 알프스에서 내려오는 물을 막아 자연 반 인공 반으로 만들어진 호수가 있다. 둘레가 5km 이상 되는 아주 큰 호수다. 연구소 내에 사고나 화재가 발생하면 소방차들이 정문 앞에서 바로 급수를 할 수 있는구조로 만든 것이다. 연구소 넓이는 약 2500 hectares (가로세로 5킬로미터에 해당)로 광활한 넓이다. 연구소 내부에 고층건물은 거의 없고 작은 2~3층 건물로 흩어져 있다. 이 구조 역시 원전사고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고, 건물들이 분리되어 있으니 다른 연구과제간의 보안유지에 최적이다. 관내에서도 특별하게 더 높은 보안이 필요한 지역은 이중 팬스로 만들어져 별도의 출입허가가 필요하다. 바깥 담장은 철조망이 있고 다시 내부에는 전기철조망이 설치되어 살벌한 느낌을 준다. 예전에는 철조망만 설치되었기에 그린피스 운동가들이 사다리를 이용해 담장을 넘어와 연중행사처럼 구내에서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전기 팬스까지 추가되면서 깜짝시위는 사라졌다고 한다.
필자가 “신의 한 수”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연구소 바로 바깥에 위치한 샤또다. 기부받은 지역의 고성을 리모델링한 샤토에는 회의실들과 넓은 식당 그리고 침실들이 준비되어 있는 여느 클래식한 호텔처럼 운영된다. 외부인들이 많이 참석하는 중요회의는 이곳에서 개최되는데, 연구소 담장 바깥이어서 출입증 신청이나 발급 등의 번거로운 절차가 필요없다. 그래서 샤또에서 열리는 대규모 회의에 외부인을 초청하는 것은 정말 간편하다. 출입허가는 필요없고 숙식예약과 회의실 예약은 동시에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다음 부러운 것은 구내식당이다. 엄청나게 많은 인원들이 동시에 몰려와도 다 수용할만한 거대한 구내식당은 정말 다양한 메뉴들이 매일매일 공급되며, 와인과 맥주 등 각종 주류까지 갖추어져 있다. 대낮에 구내식당에서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는 풍경은 상당히 낯설다. (대다수 연구원들은 점심 때 음주를 하지 않지만, 단지 내에서 건설공사를 담당하는 인부들은 구내식당에서 낯술을 자주 한다.) 더불어, 구내식장 옆에는 정말 호텔 식당 같이 원탁에 하얀 천이 깔린 간부식당도 있으며, 사전에 예약을 하면 직급에 관계없이 누구나 이용가능하다. 부서 회식을 할 때는 바깥에 나가지 않고 이곳을 이용할 수 있다.
내부에는 응급환자를 즉시 수용하고 치료할 수 있는 의료진이 상시 대기하고 있는 병원이 있으며 해마다 전직원 건강검진도 구내 병원에서 담당한다. 방사능 피폭측정과 근무환경의 스트레스 조사가 위주인데, 구내의 일원이었던 필자도 항상 받아봤던 검진이지만 의료기기로 뭘 측정하기보다 의사 면담시간이 훨씬 길다. 아마도 정신에 이상이 생겼거나 조직에 앙심을 품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사고를 기획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사전방지를 위한 조치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재미있는 것은 단지 내에 멧돼지를 방목하여 키운다는 것이다. 운전하다가 길을 건너는 멧돼지 가족을 한참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멧돼지들은 신기하게도 어린 새끼들을 인솔하여 일열로 얌전하게 차길을 건널 때가 많다. 연구소 관리직들은 일년에 한번씩 휴일에 모여 성년 멧돼지들을사냥하고 사체에서 방사선 피폭 측정을 한 후 바베큐 파티를 즐긴다고 들었다. 사람들은 출퇴근하지만, 멧돼지는 24시간 연구소 부지에 살고 있으니 아마 방사능 피폭이 이루어졌다면 훨씬 높은 오염수치를 나타낼 것이다. 그런 멧돼지를 해마다 간부들이 시식한다는 사실은, 지역사회 주민들의 염려를 줄여줄 수 있는 좋은 증거자료가 될 수 있을 것같다.
근무 분위기: 조금 과장하면 CEA에 입사하면 거의 인생이 보장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월급이 사기업보다 크게 차이나지도 않으면서 각종 혜택들이 많고 무엇보다 너무 자유로운 근무환경이 보장되기 때문이다. 출근은 좀 이르지만 퇴근버스가 오후 5시 이전에 떠난다. 자기 차로 출근하는 사람들은 9시에 출근하여 5시에 칼퇴근한다. 중간에 12시부터 2시까지는 문화적으로 서로에게 업무에 관한 연락을 잘안하는 프랑스의 점심시간이니까 실제 근무시간은 6시간 정도되는 셈이다. 참고로 프랑스의 법정 근로시간은 하루 7시간, 주당 35시간이다. 만약 남아서 좀 더 오래 일을 해야 한다면 식당에서 저녁을 사먹을 수도 있다. 점심 때 남은 메뉴로 다시 저녁이 준비되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들이 아직 합류하지 않았던 시절, 여기에서 저녁을 먹으면서 포닥하는 한국인 연구자를 만난 소중한 경험이 있다. 서로를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알고 한참을 영어로 묻고 답하다가 서로가 한국인임을 알게되어 박장대소했었다.
연구원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거의 모두가 독방을 사용하지만 방은 상당히 작다. 특이한 것은 방문이 유리여서 덜 답답하고, 찾아오는 사람은 바깥에서 방안이 훤히 보이니까 방주인이 재실인지 외출 중인지를 노크하여 확인해볼 필요도 없고 안전이나 보안에도 좋은 것 같다. (간혹 의식을 잃고 쓰러진 사람이 사무실 안에서 일찍 발견되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비보를 떠올려보면 유리방문이 조금 불편해도 더 유익해보인다. 물론 비서가 업무를 보조하는 고위직 사무실의 경우는 유리문이 아니다.)
또다른 흥미로운 부분은 연구소 내부에 동호회 활동이 활발하다는 것이다. 운동클럽, 춤클럽들의 동호회 가입행사가 있는 9월말이 되면 연구소가 잔치집 분위기로 바뀐다. 이런 날은 식당 앞에서 단체로 지루박이나 탱고를 추는 춤꾼들과 구경꾼들이 모여서 직장은 야외공연장이 된다. 8월 한달 내내 바캉스로 연구소가 휑하니 비었다가 9월이 되면서 겨우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또 이런 춤파티를 벌이다니 ‘이 사람들 도대체 일은 언제하지?’ 라는 생각이 종종 들었었다. 그리고 담장 너머에 전용 운동장과 테니스 코트, 조깅코스를 갖추어 구내에서는 조깅이나 운동을 못하게 하고 바깥 운동장을 이용하게 만들었다.
인력관리: 프랑스는 우리나라나 영미계와 다르게 교수가 되려는 고급인력들이 많지 않다. 교수직을 기피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엘리트들의 우선순위 일번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프랑스는 중-고-대학교 교원 전부를 교수라고 부르며, 교육부 국가공무원이기 때문에 미국 명문사립대학들과 비교하면 교수들 연봉이 정말 적다. 한편, 옛날 우리나라 KIST가 전체 연구의 대부분을 담당하듯, 프랑스에도 CNRS라는 비슷한 통합 연구소가 있다. 문과전공들까지 포함해서 전방위적 이론연구를 하는 국가연구기관이다. 이들은 대부분 대학과 연계하여 연구활동을 하고 있어 대학에서는 누가 교육부 소속 교수인지, 과기부 소속CNRS 연구원인지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섞여있다. 그 다음은 미션이 정해진 연구기관들이 있는데, CEA 외에도 항공관련 연구소들과, 생명과학연구소들이다. 미션이 정해진 연구소들이 연봉도 높고 대우도 좋은 편이어서 초엘리트들이 가고 싶어하는 곳이다. (그리고 SNCF, EDF같은 대형 국영회사들 역시 선호도가 높다.) 아마 프랑스 고학력자들 중 교수직과 정부 연구소 중에서 택하라고 하면 연구소 지원자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연구소들이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외국인이 미션이 정해진 연구소에 정식 연구원으로 취직되는 경우는 흔치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대학교수와 CNRS에는 필자가 아는 한국인 과학자들이 제법 있지만, 미션이 정해진 연구소에는 지인이 별로 없다. 산업기밀과 직결되어있어 외국인들을 잘 채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외적으로, 거의 40년간 Saclay CEA에서 근무하신 노만규 박사님이라는 분이 계시는데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되셨던 분이지만, 지금은 연세가 80이 넘으셔서 은퇴하신 것으로 알고있다.
눈여겨봐야 할 다른 점은 연구소들이 파리 근교와 전국에 넓게 분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CEA도 파리근교와 마르세이유, 그르노블, 보르도 등지에 흩어져 있어 근무지 선정이 유연하다. 프랑스도 한국처럼 수도권 집중이 심한 나라이지만, 사람들이 모두 빠리근처에 살고 싶어하지는 않는다. 채용시 근무지 선택 유연성과, 기존 직원들의 커리어가 쌓여가며 자녀들의 나이와 가족상황에 따라 근무지를 옮길 수 있는 점도 우수인력을 확보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결론: 프랑스 원자력 연구소 CEA는 워라벨의 균형과 정부의 지속적인 재정지원으로 정권이 바뀌어도 큰 흔들림 없이 일관된 연구를 해오고 있다. 전기생산 원자력 의존률 75% 이상이라는 엄청난 숫자를 유지해오면서도 프랑스에는 단 한 번도 원자력 대형사고가 없었다. 이런 성과는 업무를 서두르지 않는 프랑스의 문화적 요인, 정부의 지속적인 지원과 독립성 보장 그리고 국민들의 신뢰가 함께 만들어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문화와 정치형태가 다른 우리가 전부 모방할 필요는 없겠지만, 타산지석으로 삼을만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지난 5년 탈 원전으로 국가 발전에 큰 손해를 끼친 딱 한 달 남은 지금 아마츄어 정부와 비교하니 아주 부럽습니다.
현재 미국에 계시지만 한창 학문 성숙기 15년을 프랑스에서 보내신 거면 매일 매일 눈에 밟히겠습니다.
항상 건강 챙기시고요 ! 부럽게 만든 프랑스 연구소 소개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