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폭력 그리고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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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가 유명하다고 하여 유튜브에서 요약본으로 보았다. 부유하고 평온한 유년시절을 보낸 사람들은 과장이 심하다고 생각했을 것이지만, 트라우마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또다시 당시의 기억을 소환해 치를 떨게 하는 드라마였을 것이다. 프랑스에서는 전범들을 대상으로 공소시효를 없앴고, 한국도 최근 살인죄에 대해 공소시효를 없앴다. 그 연장선상에서 이제 학폭과 군대 폭력에 대한 처벌도 졸업이나 제대후 고소할 수 있게 공소시효를 없애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학교나 군대는 매일 만나야 하는 공간인데, 가해자가 피해자를 지속적으로 폭행하고 괴롭혔다면 정말 악질범죄다. 가해자 측에서는 철없던 시절에 저지른 장난이나 실수라고 변명하겠지만, 가해자들이 약한 상대만 골라 반복적으로 폭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계획범죄를 넘어 조직범죄라고 봐야 한다. 학교와 군대가 조직적 업무상 태만인 상황에서 발생하며, 알려진 후부터는 조직적 은폐와 협박으로 다시 판이 바뀌어 피해자는 또다른 괴롭힘을 당한다. 가해자 가족들이 피해자 가족에게 합의를 종용하고 처벌을 원치 않는다는 탄원서를 법정에 제출해 달라고 집요하게 조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형사부분은 합의가 판결에 영향을 끼치지 않아야 한다. 형사재판에서 원고는 피해자가 아니라 국가이기 때문이다. 지속적 악행을 저지른 범죄자들을 대상으로 한 “깊이 반성하고 있고, 전과가 없는 점을 고려하여…”라는 고장난 레코드 같은 온정주의 판결문은 정말 불편하다.
필자도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학폭과 왕따를 경험해보았기에, 피해자들의 분노를 짐작할 수 있다. 피해자이면서도 용기없는 자신을 탓하게 되고, 생업으로 바쁜 부모님을 미워하게 된다. 선생님은 그들과 내통하고 축소은폐를 담당하는 공모자로 생각되니 어른을 멸시하게 된다. 반면, 가해자만 나쁜 사람이 아니라 그런 나쁜 인간들은 어디에나 있을 것이며, 결국 배경 없는 집안에서 태어난 탓이라며 학폭 피해자인 자신에게 책임을 돌린다. 필자는 심한 학폭 피해자가 아니지만, 그 시절이나 그 사람들이 전혀 그립지 않을 정도로 당시 상황에 대해 충분히 냉소적이다. (남자학교에서는 선생님이나 선배, 동급생들에 의한 폭력이 흔하던 시절이었으니까, 심하지 않은 정도의 학폭은 거의 모두가 피해자였을 것이다.)
‘총’ 이야기가 오늘 칼럼의 주제인데, 학폭이란 단어에 너무 흥분하여 서론이 길어졌다. ‘더글로리’라는 드라마가 미국에서는 별로 공감을 얻지 못했다는 기사를 보았다. 여러 번의 끔찍한 총기사고에서 봤듯이 미국에서는 열받은 일이 있으면 중고생들도 집에 있는 총을 가지고 뛰쳐나가기 때문이다. 물론 그 총으로 학폭 가해자들만 쏘는 것이 아니라 약간만 섭섭한 행동이나 말을 한 친구들까지도 무분별하게 총질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정신병자인지 심신미약자인지 알 수 없고, 약해 보이는 상대방이라고 괄시하거나 괴롭히면 총으로 보복 당할 수 있다는 생각이 미국인들 마음속에 늘 자리하고 있는 것같다. 그래서 미국인들은 아주 사소한 실례에도 I am sorry! Excuse me!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차 안에도 상당수의 운전자들이 총기를 두고 있다고 한다. 끼어들기 정도는 괜찮겠지만, 창문 내리고 가운데 손가락이라도 들어올리면 무슨 일이 생길 지 아무도 모른다. 운전을 착하게 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이쯤 되면 찬반양론이 갈릴 것이다. 자기를 괴롭힌다고 총으로 살인까지 하는 것이 명백한 과잉대응이라는 측과, 타인의 자유를 지속적으로 제약하는 인간들은 모두를 위해 일찍 제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맞설 것이다. 근대국가에서는 피해자가 법의 심판을 요청하지 않고 직접 가해자에게 복수하는 ‘린치’는 불법이다. 그런데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순간이나 장소라면, 그리고 공권력의 응답이 너무 늦거나 왜곡되어 속 터지는 경우라는 어떻게 할 것인가? 미국처럼 드넓은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그래서 많은 총기사고에도 불구하고 총기규제가 어려운 것이다. 특히 어려운 문제는 규제를 본격적으로 시행하여 총을 거두어들인다면, 범죄 가능성이 낮은 사람들부터 반납할 것이다. 즉, 범죄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늦게 반납하거나 무시할 것이기 때문에 선악간 ‘힘의 균형’은 더욱 기울어질 것이다. 이렇게 되면 ‘선량한 시민들이 악한들의 사냥감이 되고 있다!’는 기사가 New York Times에 매일 대문짝만하게 걸릴 것이다.
미국의 특수성이다. 수많은 이민족들이 들어오는 나라인데, 기득권층은 새로운 이민자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시선이 있다. 회사에서 점심식사 후 자리에 돌아왔더니 책상에서 비싼 펜이라도 없어졌으면, 즉각적으로 새로 입사한 외국인 노동자 얼굴부터 떠올린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아랍계 학생들이 많은 곳에서 유학생활을 보낸 나로서는 뜨끔해지는 지적인데, 전부 본인 가방 안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학교 바깥에서는 ‘선수’에게 소매치기 당해본 경험이 있다.)
미국에서는 총기사고가 정말 큰 문제다. 반면, 중산층 이상이 사는 동네시민들은 주택칩입 강도의 위험을 거의 느끼지 않는다. 담벼락이 턱없이 낮거나 아예 없고 문과 창문이 허술함에도 말이다. 총기소지와 더불어 자기 영역 안에서의 정당방위가 확실하게 인정되기 때문이다. 총기소지 자유가 보장해준 보이지 않는 혜택임에 분명하다. 주장하고 싶은 결론은, 어떤 사회의 문화는 밖에서 보는 것과 안에서 보는 것이 다르게, 여러 겹을 가진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니까 안에서 보는 눈이 정확하니까 바깥 사람들은 입을 닫아야 한다는 결론에 쉽게 이르면 안되고, 안과 밖 데이터를 전부 살펴야 한다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