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유학생활에 굵은 동아줄이 되어준 코센
2002-07-29
고병설(etoi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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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옛날에 어머니와 오누이가 살았다. 어느 날 어머니는 잔치집에서 일을 하고 떡을 얻어 가지고 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났다. ‘떡하나 주면 안잡아 먹지’ 라는 호랑이의 말에 떡을 주었으나 호랑이는 결국 어머니를 잡아 먹고, 어머니의 옷을 훔쳐 입고는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왔다. 이것을 눈치챈 아이들은 도망쳐 나무 위로 올라갔다. 호랑이도 나무 위로 쫓아 올라갔다. 다급해진 오누이는 하늘을 향해 동아줄을 내려 달라고 기도한다. 하늘은 그 기도를 들어 주어 오누이에게는 굵은 동아줄을 내려 하늘로 올라오게 하고, 호랑이에게는 썩은 동아줄을 내려 주어 수수밭에 떨어져 죽게 하였다. 그 때부터 수수밭이 붉어졌고, 하늘로 올라간 오누이는 해와 달이 되었다는 이야기. 얼마 전 나는 만 4살이 되어가는 내 아이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준 일이 있다.
어렸을 때는 아무런 느낌 없이 여러 번 들었고, 동화의 하이라이트인 ‘떡하나 주면 안잡아 머억~지’ 를 특유의 억양을 넣어가며 우스개 소리로 즐겨 사용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 이 동화를 다시 읽어 보니 얼마나 비참하고도 다급한 상황을 표현한 슬픈 이야기인가 ? 남의 잔치집에 초대받지 못하고 일을 하러 간 어머니로 미루어 볼 때 넉넉치 못한 살림일진대, 아이들에게 주려고 떡을 얻어 싸 가지고 오는 길에 호랑이를 만나 떡도 빼앗기고 목숨까지 잃는다니.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어머니를 잡아 먹은 호랑이가 아이들까지 잡아 먹으러 온다. 나무 위로 도망쳐 올라간 오누이.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이겨낼 기회도 없이 그 자리에서 죽을 판국이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하늘을 향해 동아줄을 내려달라 기도를 했을까 ? 그 때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오지 않았다면 오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
지금으로부터 약 6년 전, 나는 아내와 함께 유학생으로 파리행 비행기에 올랐다. 유학생이라면 누구나 극복해야 할 문화 적응과 언어 문제 등도 힘이 들겠지만 이러한 필수적 어려움 외에 일부는 경제적 문제까지 해결하면서 공부를 해야 한다. 그런 학생들을 위해 장학금 제도가 있지 않냐 반문할 지 모르지만 외국 유학생들 가운데 장학금 혜택을 받는 사람은 몇 퍼센트에 불과하다. 나 또한 장학금 수혜자가 되고자 사방으로 알아보고 지원도 해봤지만 결국 나와 장학금은 인연이 없었다. 유학을 떠나기 전 집으로부터 매달 받기로 한 생활비는 아무리 절약해도 생활고와 싸울 수 밖에 없는 금액이었지만 젊은 몸을 굴려서라도 스스로 해결하면서 공부를 하겠노라 결심했기 때문에 송금 액수에 대한 부족을 한 번도 한국에 알린 적이 없다. 유학 1년차 시절에는 음식점에서 종업원으로 일을 했다. 사실 당시는 아르바이트를 꼭 해야 할 정도로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앞으로 어떤 경제적 어려움이 닥친다 해도 견디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는지를 스스로 시험하기 위한 일종의 도전이었다.
일년 동안 대학원 ( Maitrise) 수업을 이수한 나는 운 좋게도 박사 준비과정 (DEA) 없이 곧바로 박사과정 (These) 입학 허가서를 얻었다. 그래서 1년 동안의 파리 생활을 정리하고 지방 연구소 근처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파리에서는 생활비의 반을 조그만 스튜디오 임대를 위해 출혈해야 했던 것과 달리 지방은 집세가 저렴했기 때문에 적은 비용으로 넓은 아파트를 임대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갹쏭으로 일하면서 벌었던 돈으로 쓸만한 중고차도 구입해서 끌고 다닐 수 있었다. 그 때까지는 언어 문제, 박사과정 입학 문제, 이사 문제 등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절약하며 생활하면 일 하지 않고도 공부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사람 일은 모른다 했던가. 지방으로 이사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한국은 IMF 를 맞았다. 한국에 있는 가족들도 어려운 시기를 거쳤지만 외국 유학생들에게 IMF 는 외환 송금 환율의 직접적 영향을 받는 피해 당사자였다. 주변에서 학업을 포기하고 되돌아 가는 경우를 여럿 보았다. 환율이 무너져서 그나마 두 식구 생활하기에 아슬 아슬했던 송금 액수는 같은 액수의 한화가 심할 땐 반으로 줄었으며, 월세를 내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자동차는 집 앞에 세워 놓고 기차를 타고 출퇴근 해야 했고, 조금 가지고 있던 돈은 달이 갈수록 바닥을 드러냈다. 그 때 아내의 배 속에 아기마저 자라고 있었으니 당시는 공부보다 어떻게 살아야 할 지가 더 큰 고민이었다. 7개월 만에 다시 방 하나짜리 스튜디오로 이사를 하고, 교통비 절약을 위해 연구소 가까이에 집을 얻었다. 생활비를 줄여 보자는 목적으로 이사했던 그 무렵 무척이나 더운 날씨에 아내는 남산만한 배를 껴안고 이사를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찌나 미안한지… 절약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야 했다. 받기만 하는 전화마저 2달에 한번씩 내는 기본요금을 아끼기 위해 해지했다. 내가 공부하던 연구소에 해양 수족 박물관이 있는데 여름방학 때에는 매일 밤 10시까지 문을 연다. 그 때 저녁마다 수족관 매표소 아르바이트를 신청, 7-8월을 휴일 없이 꼬박 매표소에서 일을 했다. 아이가 태어난 후에는 대형 쇼핑센터의 광고지를 집집마다 돌리는 아르바이트도 했다. 일주일에 약 이틀 정도 일하면 될 분량을 학업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새벽마다 약 3시간씩 나누어서 매일 했다. 아내는 잠을 줄여가면서 여러 종류의 전단지를 한 묶음으로 분류해서 나의 아르바이트 시간을 줄여주었다.
주경야독이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무거운 전단지를 어깨에 메고 마을 전체를 걸어다니는 일은 운동 차원을 넘어 중노동에 가까웠다. 몸이 너무 피곤한 날에는 집중해서 공부를 할 수도 없었다. 과연 이렇게 일하면서 제 때 공부를 마칠 수 있을까 불안감이 엄습했다. 어느 날 저녁, 아이를 재우고 아내와 술 한잔을 하면서, 부족한 불어 실력이지만 그래도 나의 전공과 관련된 서적이나 정보를 번역해 보내면 그에 합당한 보수를 주는 곳은 없을까 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 공부도 되고 힘든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가 아닐까 싶어서였다. 아내는 그런 아르바이트가 어디 있겠냐고 반문했다. 그래, 그런 일이 어디 있겠어… 그런 일을 원하는 곳이 있다면 열심히 할텐데 라고 자조적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막연하게 기도했다. 그런 일이 있으면 알게 해주세요 하고, 동아줄을 내려 달라는 오누이의 심정으로 기도를 했다.
그런데, 정말로 하늘에서 동아줄이 내려왔다. 어느 날, 재불 과학기술자 협회로부터 이메일이 왔는데 내용인즉, 코센이라는 사이트가 얼마 전 문을 열었으니, 그곳에 가입해 정보도 제공하고 장학금 혜택도 받으라는 내용이었다. 정확히 내가 기도하면서 찾았던 그 일이 아닌가 ? 조심스럽게 코센 사이트를 방문하여 회원 등록을 했다. 일단 눈에 뜨인 것은 해외 Events 와 취업 정보를 제공하면 순위에 따라 마일리지 장학금을 준다는 내용이었다.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나는 코센을 알게 된 그 날부터 작은 수첩을 들고 다니면서 연구소 게시판에 공시된 프랑스 국내 학회 정보, 국제 학회 정보, 취업 정보, 여름학교 정보 등을 틈나는대로 적어서 번역해 올리기 시작했다. 스스로 프랑스 파견 기자가 된 느낌이었다. 장학금의 액수가 보통이 아니었는데 과연 줄까 의심도 해봤지만 한시적으로 있다가 없어지는 사이트라 할지라도 하는 데까지 열심히 해 보자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더 큰 시련이 다가왔다. 프랑스의 많은 과학 관련 연구소들이 박사과정 학생을 연구원으로 받으면서 요구하는 기본 서류가 장학 증서이다. 그런데 나의 경우 학과장 교수님이 박사 입학 허가서를 발급해 주면서 일단 박사 과정을 시작하고 나서 장학금은 나중에 취득해서 제출하라 했고, 그것이 그렇게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고 여기셨던 모양이다. 갑자기 전임소장이 암으로 입원하고 신임 소장이 와서 인수인계를 하는 도중 나의 서류를 점검하다가 장학증서가 빠져 있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박사 과정을 시작한지 이미 2년이 지난 당시 당장 어디서 장학금을 타서 증서를 제출할 수 있겠는가. 알고 있기로는 이미 박사과정을 시작한 지 2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지원 자격조차 없는 경우가 많았다. 최악의 경우, 연구소에서 나의 체류 허가를 자격 미달로 취소한다면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야 할 상황이었다. 아~, 오랫동안 생활고와 싸우며 학업을 유지하려고 나름대로 그토록 애써 왔는데, 이젠 아예 학업 기회마저 빼앗길 절박한 상황이 되고 말다니.
걱정으로 일주일 동안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민 끝에 장학 혜택을 준다는 코센에 사정 이야기를 하면 도와줄 지 모른다는 지푸라기만한 기대를 가지게 되었다. 코센의 웹 마스터 이메일 주소로 "이 이메일을 코센을 운영하는 책임자에게 전달해 주십시오 ’ 라는 문구로 시작되는 이메일에 나의 자세한 소개와 절박한 상황을 조목 조목 적어 보냈다. 나는 한국의 국가 기관 종사자들에게 어떤 문의를 위해 보낸 이메일에 대한 답장을 일주일 이내에 받아본 기억이 없다. 답장을 못 받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 이틀만에 답장이 온 것이다.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노라는 따뜻한 답변을 코센의 운영 책임자로부터 받았다. 그 분은 내 일생에서 만난 가장 중요한 한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 며칠 뒤 해외 학회 및 취업 정보 제공자 가운데 순위에 들어 천불이라는 장학금을 받게 되었다. 이 액수는 내가 6개월 내내 새벽마다 무거운 전단지를 돌리면서 받은 6개월치 월급과 비슷한 것이었다.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또 장학 증서가 필요하다는 나의 요청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져 며칠 뒤에는 장학증서가 우편으로 배달되어 왔다.
나는 코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코센에 신세를 무척 많이 지고 사는 사람’ 이라는 표현을 쓴다. 결코 과장이 아니다. 코센에 회원으로 등록한 이후 프랑스의 학회 정보와 취업 정보를 나름대로 열심히 제공했고, 유럽 연합의 환경 분야 프로젝트의 연구계획서를 번역 분석하는 일, 참석한 국제학회 보고서를 보냈다. 약 2년 전부터 나는 코센의 해외정보실에서 운영하는 해외과학기술 동향 정보원으로도 일할 수 기회를 얻었다. 그 이후 프랑스와 유럽의 과학 관련 기사를 번역, 정기적으로 제공하는 일을 하고 있다. 코센을 만난 이후 나는 더 이상 힘든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고도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박사 논문 제출 자격인 국제 학술지 논문 투고 경력이 쌓여 결국 박사 논문을 완성할 수 있었다.
나의 힘들었던 유학생활 중 굵은 동아줄이 되어준 코센. 사실 나는 코센의 전체 사업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러나 코센에서 활동한 경험이 있는 회원들의 의견은 내가 느끼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찌 보면 그 표현에 비해 너무 많은 보상을 받는 것이 아닌가 라는 물음을 갖게 되기도 하지만 이런 ‘활동’ 을 통해 받는 마일리지 상금이 어떤 이에게는 어려운 유학생활 중에 기본적인 생활을 보장해 주는 수입원이 되기도 하고, 어떤 이에게는 장학금이 되며, 경제적으로 어려운 본인이나 가족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흐뭇한 이야기를 직-간접으로 들을 때마다 얼마나 귀하게 쓰이고 있는지를 느낀다.
코센은 본질적으로 장학재단은 아니다. 그러나 코센은 과학 정보사업을 위해 활동하는 회원들에게 도움을 줄 ‘준비’ 가 되어 있다. 회원들이 수고하여 가공한 정보에 대해 합당한 가치를 부여해준다. 나는 코센이 유학생들에게 제공하는 혜택에 대한 보답으로 보다 유용하고 질 높은 정보를 제공하는 일에 참여하자고 권하고 싶다. 해외 회원인 경우 본인 주변에 날아다니는 살아있는 정보를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가공해서 제공하자. 그리고 국제 학회에 참석할 경우 참석치 못한 관련 전공자들을 위해 1일 과학부 기자가 되어 보자. 또, 자료 입수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회원들에게 본인이 구할 수 있는 정보와 자료를 제공해 주는 것도 좋은 일이다.
코센의 주요 사업 이외에 보너스라고 할 수 있는 ‘광장’ 은 전세계에 흩어져 있는 한인 과학자들이 모여 우정을 나누고 정보를 나누며, 토론할 수 있는 귀한 공간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다. ‘카페’ 라는 이름이 어색하지 않게 연구에 몰두하다가, 혹은 코센의 정보 사업에 참여하다가 잠깐씩 들려 차 한잔 하는 여유를 맛볼 수 있다. 코센의 해외 회원들은 여기서 잠시 시름과 외로움을 달래는 것은 물론 한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느끼고 세계적인 과학자로 우뚝 설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으니 그저 고마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