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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치들을 위한 조언

당신은 영민한 사람입니다. 말도 아주 논리적으로 조리있게 한다는 평을 듣습니다. 학교다닐 때 수학도 잘했기에, 어쩌면 이공계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당신, 기계치는 아니신지요? 이렇게 잘난 척하며 글을 쓰는 저도 사실 위의 프로필에 수렴하는 사람입니다. 내친 김에 계속 잘난 척을 해보겠습니다. 기계치의 정의가 무엇인지는 아시죠? 기계치를 정의 하기 전에 우선 기계부터 정의해봐야 겠습니다. 전문적인 정의는 아래와 같습니다. “기계는 제한된 영역이나 범위에서 반복적이고 정해진 일을 하는 장치“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동일한 입력에 동일한 출력을 내야 한다는 것. (즉, 랜덤한 결과는 안됩니다.) 그리고 제한된 기능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즉, 한가지 기계가 심부름 센터처럼 모든 잡일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위의 정의가 너무 딱딱하니까, 다소 감상적인 언어로 다시 정의해봅시다. 기계는 벙어리입니다. 시키는대로 기능만 할 뿐 말을 못해요. 사고가 난 후에, “도대체 왜 그랬어?“라고 고함을 질러도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줘야 되는거야?“ 이렇게 자상하게 물어도 눈만 껌뻑이는, 지극히 내성적인 존재가 기계입니다. 기계는 언어로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손가락으로만 소통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간혹 발을 이용한 폭력이 먹힐 때도 있습니다만, 폭력이 더 거세지면 오히려 마음을 닫아버리거나 부서져버리는 소심하고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기계는 정말 심하게 눈치가 없습니다. 주인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전혀 상관하지 않고 시키는대로만 합니다. 하지만 제대로 주인을 만나면 피곤한 지도 모르고 신나게 일하는 존재가 기계입니다. 휴식도 필요없고 식사때 밥도 안먹고 열심히 일하죠. 하지만 너무 무지막지하게 부려먹으면 마음에 병을 얻고는 그만 쓰러져 버립니다. 그러니까 기계는 내성적이고 소심하고 외곬인, 그러나 아주 성실한 존재라고 보시면 됩니다. 전문적 건조체 정의보다, 제가 쓴 '감상적 정의'가 훨씬 더 리얼하죠? 기계치란 이런 기계와 소통하지 못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여러분 중에는 멍청한 인간과 기계치를 동일시하는 분이 계시겠지요? 절대로 아닙니다. 하는 짓이 다 멍청하면 백치라고 부르지 기계치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기계치란 지능이 높으면서도 유독 기계만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리고 남자들보다 여자들에게 더 많죠.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기계를 다룰 기회가 더 적기 때문이겠죠? 여자들은 대부분 남자라는 좋은 리모콘을 가졌기에 기계를 직접 다루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많죠. 어릴 때는 아빠, 자라서는 오빠, 더 커서는 남친, 결혼해서는 남편, 나이 들어서는 아들이나 사위가 여성들의 성능 좋은 리모콘 역할을 해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만약 여자들이 남자와 동일하게 경험한다면, 여자들이 기계를 더 잘 다룰 지도 모르겠습니다. 남자들보다 더 섬세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계가 작동이 잘 안될 때 무리한 힘을 주어 고장을 내는 경우가 많은데, 이 경우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힘이 약해서 기계를 고장낼 확률도 좀 낮아보입니다. 바로 직전 하버드대 총장이 “여자들은 남자들보다 수리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을 했다가 곤혹을 치루고 결국 물러났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 겁먹어서 여성들에게 아부하려는 것은 아니고, 진실을 말하려고 할 뿐입니다. 기계를 정의하고 기계치를 정의했지만, 뭔가 좀 모호하죠? 자! 그러시면 이제 실전으로 들어가서, 우리가 얼마나 많은 기계를 사용하는지 가상 상황을 한 번 봅시다. 아침에 일어납니다. 알람 시계를 어젯밤 분명히 맞췄었는데, 제대로 안울려서 지각인가요? 간신히 눈꼽을 뗴고 화장실에 갔는데, 변기가 이상한지 물이 안내려간다구요? (변기도 작은 기계장치...) 어젯밤 돌려논 세탁기 안에 빨래들을 널고 가려고 뚜껑을 열어봅니다. (하지만 늦어서 그냥 출근...) 아침 먹으면서 날씨나 보려고 TV 리모콘을 누릅니다.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려고 전자 레인지, 토스터, 커피내리는 기계 등등을 어지럽게 사용하고, 식기세척기에 그릇을 넣은 후 아파트를 나오면 엘리베이트는 오늘 따라 왜 이리 더딘 지... 내려가서 주차장에서 차에 몸을 싣고 운전하며 출근길에 오릅니다. 그리고는 즐겨듣던 라디오를 켜서 노래를 따라 부르며 기분을 전환합니다. 막히는 길을 정신 없이 뚫고 겨우 직장에 도착했습니다. 슬그머니 사무실에 들어와 컴퓨터를 연 후 이메일을 점검하는데, 휴대전화가 울립니다.“모닝 커피 한 잔 하지?“ 동료의 제의에 “잠깐만!“ 이라고 대답하고는 이메일 하나를 프린터로 보냅니다. 몇 장을 복사하여 책상에 올려두고는 아침에 마시고 나온 커피를 또 한잔 마십니다. 그렇게 정신 없이 오전이 가고 점심 먹으러 나오는 길에 무심코 봤던 빌딩위의 초여름 하늘이 멋집니다. 핸드백을 뒤져 디카가 들어있는 지 확인합니다. 도심 한복판 인도 위에서 잠시 여유를 내어 한 컷! 아침에 일어나서 겨우 점심시간까지, 반나절 동안 위의 (유치한) 일기에 나오는 기계가 도대체 몇 종류나 되나요? 우리는 정말 많은 기계를 상대합니다. 그리고 위에 언급된 기계들, 기능의 반도 사용하지 못하는 것들이 많습니다. 기계치란 현대생활의 재미를 반쯤 놓치고 사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딱히 기계를 일부러 싫어하는 휴머니스트가 아니시라면 아래 저의 충고를 한 번 읽어주세요. 첫째, 기계치를 면하려면 왕성한 실험정신이 있어야 합니다.“귀찮아서 그냥 이렇게 살다 죽을래!“가 아니라, 죽을 때 죽더라도 알 것은 알아야 되겠다는 정신이 필요합니다. 말은 사람과의 소통에만 쓰이는 도구라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기계와는 '손가락 언어'로만 소통됩니다. 즉, 제대로 된 버튼을 눌러야 합니다. 기계치들 중 많은 사람들은 말을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손으로 행동하기 전에, 입으로 다하는 사람들이죠. 하지만 이제부터는 '행동하는 양심', 또는 '눌러보는 양심'이 되어보시는 것은 어떨까요? 둘째, It should be! 가 아니라 As it is. 에 충실하여야 합니다. 기계치들은 지금 자기가 사용하려는 기계를 주의깊게 관찰할 생각은 안하고, 이전에 자기가 익숙하게 사용했던 기계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생각한 위치에 해당기능의 버튼이 없다는 것을 알게되면 짜증을 내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나오면 기계는 '나는 옛날 그 기계가 아니야!'라고 침묵의 항의를 하며 말을 듣지 않습니다. 반드시 이래야지(It should be!)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As it is.) 기계를 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셋째, 설계자를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오만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기계들 중에 기능이나 성능, 디자인이 이상한 부분들이 많습니다. 불필요한 기능이 쓸데없이 들어간 것, 꼭 있어야 할 기능은 오히려 빠진 것, 너무 크거나 작은 것 등등...그러나 그 이유가 설계자들이 멍청해서가 아닙니다. 설계자는 고객 끌어안기와 가격이라는 제한조건 속에서 설계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기능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 기능 때문에 삽니다. 가격을 50%만 올린다면 훨씬 좋은 기계를 만들 수 있지만, 소비자들의 부담을 고려해서 싸게 만든 제품도 많습니다. 그것 뿐이 아닙니다. 과거 기종과의 호환성 때문에, 지금은 쓸모없게 된 기능이지만 그냥 두어야 하는 부분도 많습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 앞에 있는 기계들은 출생하자마자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할 운명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그리고 그 불완전성이야말로, 역설적으로 더욱 발전할 가능성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니 기계치들은 잘못하면 연애치가 되기도 쉽겠습니다. 자신의 세계에만 갇힌 사람들은 기계와 소통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사람과의 소통도 힘들 것 같습니다. 언변이 좋다고 사람들와 내면적 소통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오만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를 보려고 노력하며, 왕성한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과학기술자라면, 기계치에서만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관계치도 졸업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상태진단과 개선에 어떻게 좀 도움이 되셨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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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솜씨가 정말 예사롭지 않으세요. 기계에 대해 이렇게 감성적으로 생각하실 수 있다니... 요즘 알랭드보통의 행복의 건축(Happiness of Architecture)을 읽고 있는데 문체가 비슷하네요.^^

앞으로는 생각을 고쳐보아야겠습니다^^

한선화(shhahn) 2007-07-27

정말 사물을 보는 시선이 탁월하세요. 앞으로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