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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수의대 황우석 교수

‘복제소의 아버지’ 황우석(49) 서울대 교수의 실험실은 새벽 6시면 잠에서 깬다. 황 교수는 실험실의 다른 교수들과 매일 6시 30분에 회의를 연다. 본격적인 실험은 7시에 시작된다. 실험에 앞서 황 교수는 매일 4시 30분 집에서 나와 1시간 가량 목욕과 단전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는다. 집에는 대개 9시쯤 들어가고 12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든다. 황 교수에게 주말은 평일보다 더 바쁠 때다. 그는 경기, 충북에 있는 농장들을 방문해 소와 돼지들이 잘 자라는지 둘러본다. 복제돼지나 복제소를 임신하고 있는 대리모 동물들이다. “취미가 무엇이냐”는 기자의 물음에 “일이 취미”라는 당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황 교수는 결혼하고 가족과 한번도 놀러간 적이 없다고 했다. 올해 처음으로 부인이 “우리도 물놀이 한번 가자”고 해 무척 미안했다고 한다. 그러나 올해도 가지 못했다. 그는 앞으로도 당분간 힘들 것 같다고 털어놨다. “너무 연구에만 매달리시는 것 아닌가요?” 황 교수는 고개를 저었다. “생명과학은 과학을 위한 과학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기 위한 학문입니다. 부모 형제가 죽어 가는데 비가 온다고, 몸이 좀 힘들다고 연구를 게을리 할 수 있겠습니까. 생명과학의 보람은 돈이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생명의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황우석 교수는 1999년 2월 국내 최초로 복제소 ‘영롱이’를 탄생시키면서 단숨에 스타 과학자로 떠올랐다. 1997년 영국 로슬린 연구소에서 세계 처음으로 복제양 ‘돌리’가 태어나면서 복제 동물은 세계적인 화제가 됐다. 황 교수는 당시 영국, 일본, 미국, 뉴질랜드에 이어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복제 동물을 출산시켰다. 이후 황 교수는 한우 ‘진이’ 등 복제소를 계속 태어나게 했고, 8월에는 유전자를 바꾼 복제돼지를 선보였다. 이 돼지는 아쉽게도 태어난지 이틀만에 죽었다. 그는 현재 장기이식용 복제돼지, 백두산 호랑이 복제 등을 연구하며 한국의 복제 동물 연구를 주도하고 있다. 한국이 복제 동물 연구에서 세계에 뒤쳐지지 않는 것도 상당 부분 황 교수의 노력 덕분이다. 황 교수는 늘 자신의 연구는 업적이나 돈이 아니라 생명을 위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황 교수의 ‘생명 사랑’은 어린 시절 ‘어머니와 소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다.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대전)에서 중학교를 다녔어요. 여름방학에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마중나온 어머니의 발목을 보니 새빨갰어요. 소에 먹일 꼴을 베다 거머리가 달라붙어 피를 빨아먹은 것이지요. 마음이 너무 아팠습니다.” 황 교수는 그날 일기를 쓰면서 ‘어머니가 이렇게 힘들게 소를 키우지 않도록 하겠다’고 결심했다. 농민의 아들로 어린 시절부터 소와 함께 지낸 황 교수는 막연히 소는 그의 운명이라고 느꼈다(이 말을 하며 황 교수는 자신의 이름도 ‘황우’ 아니냐며 웃었다). 고3때 담임 선생님은 의대를 권했지만, 그는 주저없이 수의학과를 선택했다. 황 교수는 복제소로 유명해지기 전만 해도 일주일에 두세 번씩 농촌을 돌아다니며 농민들의 소를 돌봤다. 몇 년 전 기자가 황 교수를 만났을 때 새로 산 그의 차는 소똥 냄새로 가득했다. 그를 잘 아는 농민들은 황 교수를 ‘소똥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소는 5000년 동안 우리 민족과 운명을 함께 한 동물입니다. 솔직히 우리 축산업은 경쟁력이 떨어집니다. 세계에서 가장 원유값이 비싼 곳이 한국입니다. 그러나 생명과학을 이용해 기능성 우유를 만들 수 있다면 우리 소가 설 자리가 다시 생깁니다.” 소와 농민에 대한 황 교수의 사랑은 요즘에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향해 있다. 그는 유전자를 바꾼 복제돼지가 태어났을 때 기자에게 “장기이식용 복제돼지가 7~10년 정도면 나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최근 만났을 때에는 “더 빨리 해야겠다”며 서두르고 있다고 말했다. 복제돼지 출산을 발표한 뒤 서울의대에서 공동 연구 요청이 왔단다. 그곳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들의 실태를 들으니 쉬고 있을 틈이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황 교수 스스로 죽을 뻔한 병(병명을 밝히지 않았다)에 걸렸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경험이 있어 환자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더 애틋하다. 지금은 복제동물의 아버지로 불리는 황 교수도 “복제소가 태어나기 전만 해도 많이 힘들고 앞이 불투명했다”고 털어놨다. 연구비도 부족했고, 결과가 나올지 확신이 없었다. 그래도 그는 학생들과 함께 죽자살자 매달렸다. 한때 그의 실험실에서는 ‘무박삼일’ 실험이 잦았다. 이틀 밤을 안자고 실험에 매달리는 것이다. 중간에 쓰러진 학생들은 링거를 맞고 다시 실험에 매달렸다. 다행히 그 학생들이 현재 국내외 좋은 자리로 많이 진출했고, 우수한 성과로 언론을 장식한 이들도 있다. “얼마전 집안도 훌륭하고 성적도 뛰어난 중학생 4명이 찾아왔어요. 법관이나 의사가 되겠다고 생각한 학생들이었어요. 그들에게 생명을 살리는 생명과학자의 보람에 대해 이야기해 줬더니 나중에 모두 생명과학자가 되겠다고 이메일을 보내왔어요. 요즘 흔히 말하는 이공계 기피를 극복하려면 대우도 개선해야 하고, 장학금 같은 것도 필요하겠지만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청소년들에게 과학의 의미와 보람에 대해 제대로 알려주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과학의 참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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